경기잡가

경기잡가

[ 京畿雜歌 ]

요약 서울과 경기도 지방에서 불리던 잡가의 한 갈래. 일명 십이잡가(十二雜歌).

조선말기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공장인(工匠人)·상인(商人) 출신의 들에 의해서 성장되어 온 경기잡가는 조선 말기의 (秋敎信)·(曺基俊)·(朴春景)은 경기잡가의 삼걸(三傑)로 알려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추·조·박(秋·曺·朴)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고종(1863~1907) 말과 대한제국(1897~1910) 시절 활동했던 인물들이며, 일제강점기 의 잡가·가곡·가사 선생이었던 (張桂春)은 추교신의 제자이다. 그리고 일제 초기 와 시절 유명했던 (朴春載)는 박춘경의 제자이다. 장계춘의 제자로는 (崔景植)이 있고, 최경식의 제자로는 (崔貞植)·(柳開東)·(朴仁燮)·(金泰鳳)·(李昌培) 등이 있다.

이들 외에 일제강점기 잡가명창으로 탁순흥(卓順興)·(朱壽奉)·(李慶俊) 등이 있었고, 여류명창으로는 보패·홍도·강진······이유색· 등이 있다. 이 당시 남자 잡가명창들은 대체로 구한말 사계(四契)축의 소리꾼 출신들의 제자였다. 여류명창들은 (券番) 출신의 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여류명창들은 모두 광교조합(廣橋組合)의 장계춘·유개동, (朝鮮券番)의 최정식, 또는 (鍾路券番)의 박인섭에게 잡가를 배웠다. 광복 이후에는 ··· 등이 잡가와 의 명창으로 그들의 명맥을 전승하였다.

경기잡가는 에 따라서 느리고 긴 의 긴잡가와 빠른 속도의 로 구분된다. 형식상으로 보아 긴잡가는 가사에 가깝고, 휘모리잡가는 에 가깝다. 오늘날 12잡가로 알려진 긴잡가와 휘모리잡가를 포괄하는 경기잡가는 경기 지방 잡가의 주류를 이룬다. 경기잡가는 내용이나 계통에 따라서 ·휘모리잡가··기타 잡가로 구분되지만, 12잡가는 대표적인 경기잡가로 알려져 있다. 경기잡가는 조선 사회 낮은 신분의 소리꾼들에 의해서 구전되어온 성악곡이기 때문에, 그 음악적 특징은 민요나 ·가곡·가사와 서로 다르다.

12잡가는 ""(遊山歌)·""(赤壁歌)·"제비가" 또는 "연자가"(鷰子歌)·""(執杖歌)·"" (小春香歌)·""(刑杖歌)·"선유가"(船遊歌)·""(平壤歌)·""·""(十杖歌)·""(方物歌)·""(出引歌), 이상 12곡이다. 이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은 "유산가"이다. 휘모리잡가는 ""(萬壑千峯)·""·""(兵丁打令)·""(妓生打令)·""(六七月)·""·""·""·"한잔 부어라"·""(緋緞打令), 이상 10곡이다.

이 밖에 서울 지역에는 ""·""·""·""으로 구성된 이른바 산타령이 있었다. 산타령은 으로 따로 분리시키기도 하고 경기잡가에 넣기도 하지만, 그 발달과정으로 보아서 잡가 계통에 든다. 산타령은 "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으로 구성되지만, 때에 따라서 몇 곡이 첨가되기도 한다.

기타 잡가로는 ""(豊登歌)·""(金剛山打鈴)·""·""·""·""·""·""(張大將打鈴)·"금강유람가"(金剛遊覽歌)·"국문뒤푸리"·""(開城八景歌), 이상 11곡이 있다. 구비전승(口碑傳承)된 경기잡가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개 19세기 중반에 발생하여 20세기 초 즈음에 이르러서 오늘날과 같은 경기잡가의 형태가 갖추어졌으리라고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1.129~31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543쪽
  • 『文藝總鑑』,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년, 283쪽
  • 『民俗藝術事典』,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년, 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