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허문명의 특징

황허문명의 특징

황허문명[黃河文明]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농경과 가축 사육 등의 생산 기술이 발달해 각 유적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농기구가 출토되었다. 하지만 황허[黃河] 유역에서는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양쯔강[揚子江] 유역과는 달리 조와 피, 수수 등을 주로 재배하였다. 초기에는 화전(火田)을 일구어 소규모로 농사를 지었지만, 기원전 4000년 무렵의 양사오[仰韶] 문화에서는 고정된 농지(農地)에서 집약농업(集約農業)이 이루어진 모습을 나타낸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함께 취락의 규모도 커졌는데, 양사오[仰韶] 문화의 반포[半坡] 유적지(遺蹟地)에서는 방어용 호(濠)로 둘러싸인 200~300개의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수백 명에서 천 명 정도가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공업도 발달해 각 유적지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생산 도구와 토기(土器) 등도 출토되었으며, 마(麻)와 견직물(絹織物)로 만든 의류 등도 발견되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함께 사회의 계층화와 부계사회로의 전환이 진행되면서 황허[黃河] 유역에서는 하(夏), 상(商), 주(周) 등의 고대 국가가 출현하였다. 우(禹)에서 걸(桀)까지 17왕(王)에 걸쳐 470여 년 동안 존속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하(夏)는 아직까지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실증(實證)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황허[黃河] 유역에는 커다란 도성(都城)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농업과 생산 기술의 발전이 더욱 고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夏)를 계승하여 나타난 상(商)에서는 갑골문(甲骨文)의 형태로 문자(文字)의 발달이 이루어지고,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청동기(靑銅器)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읍제국가(邑制國家)를 기반으로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점차 신정국가(神政國家)의 성격을 벗어나 강력한 전제왕권(專制王權)을 형성해갔다. 상(商)의 확대와 더불어 황허문명[黃河文明]은 북쪽의 유목민족(遊牧民族)이나 랴오허[遼河] 문명, 서쪽 쓰촨[四川] 지역에서 나타난 촉(蜀) 문명, 남부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양쯔강[揚子江] 문명 등과의 접촉을 넓히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기원전 1046년 무렵에 주(周)는 상(商)의 문물과 제도를 계승하여, 왕권의 전제화와 예교(禮教)를 통한 사회 조직의 체계화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에 황허문명은 각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들과 상호 융합하여 중국 문명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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