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건국설화

백제의 건국설화

백제의 건국설화는 3가지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3가지 이야기 모두 신비스럽거나 괴상한 부분이 거의 없고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국을 설명하고 있어, 고구려·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오히려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백제의 건국 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하여 2개의 설화가 전한다. 제1대 온조왕(溫祚王)을 주인공으로 건국과정을 설명한 온조설화는 본문에 실린 반면 비류(沸流)를 주인공으로 삼은 비류설화는 작은 글씨로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온조설화에는 위례성의 백제가 미추홀의 비류집단을 병합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온조계의 성읍국가가 주체가 되어 비류계 집단을 흡수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삼국사기》의 온조설화

먼저, 《삼국사기》에 실린 온조(溫祚)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생각하건대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말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았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다. 

비류는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나중에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삼국사기》의 비류설화

한편, 온조설화에 덧붙여 참고자료처럼 실린 비류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며,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는 졸본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 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았다. 나중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고 불렀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는데, 소서노가 국가의 기틀을 열고 다지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히 두텁게 총애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대하였다.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孺留)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邦業)을 이루니, 그 노고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낫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國都)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온조설화에서는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라고 하였다.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왕이 된 유리와 남쪽으로 이주해 백제를 세운 온조는 배다른 형제라는 관점이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파생한 나라로서 지배세력의 혈통과 문화기반이 같다는 생각을 반영한 설화인 셈이다. 그런데 비류설화에서는 주몽이 단순히 비류 형제를 예뻐해 준 의붓아버지에 지나지 않는다. 비류 형제의 친아버지는 주몽과 마찬가지로 북부여 출신의 졸본사람 우태이다. 백제는 부여에서 파생한 나라로서 고구려와도 혈통과 문화기반이 서로 통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설화인 셈이다.

《수서(隋書)》《북사(北史)》의 구태설화

한편,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북사(北史)》 등에는 전혀 다른 관점의 백제 건국설화가 전한다. 《수서》 백제전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백제의 선조는 고려국(高麗國)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의 시녀 한 명이 갑자기 임신하여 왕이 죽이려하자 시녀가 "마치 달걀처럼 생긴 물건이 내게 와서 감응하더니 임신했다"고 말하였다. 왕이 풀어주었더니 나중에 드디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뒷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자 신기하다고 생각해 기르라고 명령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매 고려 왕이 미워하자, 동명은 두려워하더니 도망해 엄수(淹水)에 이르렀는데, 부여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어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는데,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시집보냈으며, 점차 번성하더니 동이(東夷)의 강한 나라가 되었다. 처음에 백 집[家]이 바다를 건넜다 해서 백제라고 불렀으며, 10여 대를 지나도록 대대로 중국에 신하로 지냈는데, 예전 역사책에 상세히 실려 있다.

구태설화도 역시 백제를 고구려에서 파생한 나라로 설명하고 있다. 설화 속의 구태(仇台)가 공손도(公孫度; ?∼204)의 딸과 혼인했다는 대목에 주목해 이름이 비슷한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234∼286)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참조항목

구태, 비류, 온조왕

역참조항목

소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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