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말 알딘 알아프카니

자말 알딘 알아프카니

[ Jamal al-Din al-Afghani ]

요약 19세기 후반 활동한 이슬람 사상가로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독재와 서구의 식민지배에 항거하며 범이슬람주의를 제창했다.
출생-사망 1838 ~ 1897

본명은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니(Jamal al-Din al-Afghani)이다. 1838년 카불 근교의 아쓰이드 아바드라는 촌락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에 족보를 둔 명문가 출신으로 전해진다. 8세가 되던 해에 카불로 옮겨와 이슬람 전통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알 아프가니는 아랍어를 비롯하여 이슬람 법학, 수피사상, 역사학 등을 배우고 예술과 군사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성인이 된 뒤 인도에서 유학하던 중 영국 식민주의의 현실을 경험하며 유럽 침략의 위험성과 이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적 단합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857년 방문한 메카에서 이슬람 세계가 직면한 문제점의 개선에 대한 영감을 얻은 알 아프가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 뒤 약 10년간 이슬람 사회 환경의 개선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1864년 아프가니스탄에 정권 다툼이 발생하고 영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개입되자 이에 실망하고 카불을 떠나게 된다. 이 사건은 그가 전 생애에 걸쳐 반영(反英) 투쟁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1869년 인도로 갔으나 영국령 인도 식민정부의 견제로 1870년 초 이집트로 향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교육위원회에서 활동할 기회가 있었으나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개혁에 실패하자 1871년 이집트로 돌아왔다.

1879년까지 이집트에 체류하며 이슬람 세계를 이끌어 갈 개혁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독재에 항거하는 자들의 망명지이자 전통 이슬람과 아랍 문화 부흥의 중심지였으므로 알 아프가니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주로 알 아즈하르 근처 칸 카릴리의 자택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으며, 알 아타바 광장의 알 부스타 찻집에서 당대의 지식인들과 함께 자주독립,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민중의식 고양 등 정치적 주제들을 논의했다.

1879년 영국의 견제로 이집트에서 추방되었으나 무함마드 압두, 싸아드 자들룰, 무스타파 케말 등 많은 제자들이 그의 개혁 사상을 승계하여 활약했다. 이집트에서 추방된 알 아프가니는 인도와 런던을 거쳐 파리에 정착했다. 이후 약 3년간 파리에서 체류하며 이슬람 국가간의 단합과 결속을 추구하고 식민주의 정책에 대항하는 '알 우르와 알 우스까(강건한 결속)' 회의를 조직했다. 1884년 3월 동명의 협회지를 창간했으며 이 협회지를 통해 헌법주의·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 이슬람 세계의 단결·아랍민족의 단결을 주장했다.

1886년 이란의 샤 정권으로부터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나 샤의 의도와 달리 민중의 정치참여와 체제 개혁을 주창하다 샤와 반목한 뒤 러시아로 떠났고 상 페테부르크에서 3년간 체류했다. 1889년 샤의 권유로 다시 이란으로 향했지만, 이란의 담배불매운동을 선동·지원한 혐의로 1891년 이란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의해 이스탄불로 초청되어 그의 범이슬람주의를 실천할 기회를 맞았으나 술탄과의 불화로 성공하지 못했고,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1897년 5월 9일 이스탄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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