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칠정려

의령 칠정려

[ 宜寧 七旌閭 ]

요약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조선시대 진양강씨 문중 7인의 정려. 1977년 12월 28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의령 칠정려

의령 칠정려

지정종목 경상남도 기념물
지정일 1977년 12월 28일
관리단체 진양강씨문중
소재지 경상남도 의령군 백산로 43 (의령읍, 칠정려)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1977년 12월 28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진양강씨(晉陽姜氏) 문중 7인의 충(忠)·효(孝)·열(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이다. 7인 중 2인은 쌍효정려를 받아 건물은 총 6동이며, 모두 한곳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일명 삼강문(三綱門)이라고도 불리는데 삼강이란 충·효·열을 이르는 말이다.

각기 건립연대도 다르고, 서로 다른 장소에 있던 정려들이었는데 언제부터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세월에 더러는 허물어지고 파손되었으나 문중에서 틈틈이 중수하였고, 1972년 내부수리를 말끔히 하여 오늘에 이른다.

모암공(慕菴公) 강우(姜瑀)의 정려는 1744년(영조 20) 건립된 맞배지붕 목조와가이다. 1495년(연산군 1)에 태어난 강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모친의 병환에 지성으로 간병하였으나 결국 돌아가시자 몹시 애통해하여 신병을 얻었고, 시묘 3년을 마치는 대상일(大祥日)에 자신도 생을 마쳤다 한다. 모암공의 정려와 나란히 서 있는 것은 그의 아우 매곡공(梅谷公) 강서(姜瑞)의 정려이다. 그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효행이 뛰어났는데 1544년(중종 39)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려가 내려졌다.

강서의 아들 충열공(忠烈公) 강수남(姜壽男)에게는 1592년(선조 25)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가 내려졌다. 강수남은 병조정랑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1592년 10월 삭녕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 1609년 이조참판에 추증된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다가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1593년 6월 순절한 참의공(參議公) 강기룡(姜起龍)에게도 1861년(철종 12)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려가 내려졌으며 같은 해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강시주(姜時周)의 처인 열부 김해허씨(金海許氏)는 남편이 부친을 살해한 살해범을 쫒다가 오히려 살인죄를 쓰고 감영에 갇히자 죽음으로 결백을 알렸다 하는데 1882년(고종 19) 허씨부인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한 정려가 내려졌다. 마지막 정려는 수재공(修齋公) 강재중과 그의 처 함안조씨(咸安趙氏)의 효행을 기려 1869년(고종 6)에 세운 쌍효(雙孝)정려로, 부부는 병환 중의 부모님을 극진히 간병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다.

참조항목

강수남, 동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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