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척화비

양산 척화비

[ 梁山 斥和碑 ]

요약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비.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양산 척화비

양산 척화비

지정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지정일 1979년 5월 2일
관리단체 광주안씨종중
소재지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로 78 (북정동, 양산시립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척화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물리친 후 백성들에게 통상수호거부의 의지를 고취하고자 세운 비이다. 다른 비석과는 달리 귀부(龜趺)와 이수가 없고, 일반 척화비와 마찬가지로 통비(通碑) 형태이다.

전면에 굵은 글씨로 2행 12자가 음각되어 있다. 원문은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라고 하였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계아만년자손병인작신미립(戒我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이라고 씌어 있다. 이것은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음은 즉 화친(和親)하자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자는 것이므로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이라는 뜻이다.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통상수호거부의 결의를 굳히고 국민에게 외세 침입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전국 각처에 세웠는데 높이나 너비 등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형태는 거의 동일하다. 원래는 전국 각지에 있었으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개항을 하게 되자 그중 상당수가 철거되거나 매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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