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충사

포충사

[ 褒忠祠 ]

요약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 고경명 등 임진왜란 때의 의병 5명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1974년 5월 22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포충사

포충사

지정종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지정일 1974년 5월 22일
관리단체 포충사관리사무소
소재지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776번지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1974년 5월 22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포충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의병 7,000여 명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1593년 8월의 금산싸움에서 전사한 고경명(高敬命)과 그의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因厚)의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국이 안정되자 호남지방의 유생들이 왜란 때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제향하기 위한 사당으로 제봉산 아래에 세운 것이다. 이어 1603년 박지효와 후손들이 임금에게 사액(賜額)을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이름과 편액을 받았다.

포충사는 1865년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폐쇄되지 않았던 전라남도 지방의 2대 서원 가운데 하나로도 유명하다.

포충사에서 특히 이채로운 것은 옛 사당의 입구 홍살문 옆에 있는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문이다. 이들은 고경명의 충직스러운 노비로, 주인과 함께 의병에 참가하였고, 금산싸움에서 고경명과 고인후 부자가 전사하자 그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지냈다. 이듬해에는 다시 살아 남아 있던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충의의 인물들이다.

이밖에 포충사에는 고경명의 친필로 쓰여진 《마상격문(馬上激文)》과 목판 493장 등이 보존되어 있다.

역참조항목

대촌동, 원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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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동영상

포충사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 등을 기리는 서원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과 그의 첫째아들 고종후, 둘째아들 고인후와 유팽로, 안영을 기리는 서원이다. 1593년 금산싸움에서 의병장 고경명은 둘째아들 고인후와 유팽로, 안영과 함께 전사하였고 금산싸움에서 살아남은 첫째아들 고종후는 1593년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싸움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1601년 유림들이 그들의 충절을 기려 사당을 세우고 1603년 "포충"이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