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사

화담사

[ 花潭祠 ]

요약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켜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정희(鄭熙)와 그의 아들 정초(鄭招), 손자 정수충(鄭守忠) 3대와 정오도(鄭吾道)·민제장(閔濟章) 등 5위(位)를 배향하는 사당. 1993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화담사

화담사

지정종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지정일 1993년 3월 20일
관리단체 화담사보존회
소재지 광주광역시 서구 화운로 156번길 17-8 (화정동)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1993년 3월 20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광주광역시 서구 화운로 156번길 17-8에 있다.
 
화담사는 원래 세조 때의 좌익공신으로 경사(經史)에 능하고 청렴결백한 문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문절공(文節公) 정수충(鄭守忠)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35년(영조 11)에 건립된 영당(影堂)이었다. 1776년(영조 52) 그의 가문인 하동정씨(河東鄭氏) 문중에서 사당을 새로 건립하자는 의견에 따라 1784년(정조 8) 지금의 화담사가 건립되고 정수충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이후 1796년(정조 20) 광주향교 유회소(儒會所)의 발의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광주 출신의 무장 민제장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08년(순조 8)에는 정수충의 할아버지이며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킴으로써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묵은공(默隱公) 정희 그리고 정수충의 둘째 큰아버지로 세종 때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는 등 학문·예술·과학기술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문경공(文景公) 정초(鄭招)를 함께 배향하였다. 1910년부터 조상의 예를 갖추어 할아버지인 정희의 위패를 으뜸으로 삼았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건물의 지붕을 가리고 제사만 폐하였다가 1905년 광주향교 유회소의 발의로 복설되었다. 1906년에는 광주 유생들의 발의로 충효가 출중한 광주 출신의 학자 약포공(藥圃公) 정오도를 추가로 배향하여 현재의 틀을 갖추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앞뒤에 마루가 있는 맞배지붕 구조이다. 앞면의 마루는 개방되어 제향 의식 때에 편리하게 한 사당 건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앞부분의 문은 굽널을 둔 빗살문이다. 청지재(聽之齋)와 열호재(悅乎齋)는 동재와 서재로 같은 양식으로 건립된 정면 4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앞에 마루를 두고 모두 온돌방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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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사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정희와 그의 아들 정초, 손자 정수충 3대와 정오도, 민제장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1784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앞뒤에 마루를 설치한 맞배지붕지이다. 앞면의 마루는 개방되어 제향 의식 때에 편리하게 한 사당 건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사당의 부속건물로 청지재와 열호재가 있으며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동일한 규모의 건물이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