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가야

전기 가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9간(干)이 추장이 되어 각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던 바, 하늘로부터 보랏빛 줄이 내려와서 보니 붉은 보자기 안의 금합에 6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도간이 이를 집으로 가져간 지 12시간 만에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알이 어린아이로 변하였는데, 그 중 먼저 태어난 이가 수로였다. 그는 곧바로 금관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5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설화는 9간으로 대표되는 김해지역의 토착세력과 수로 집단이 연합하여 금관가야국(변한 12국 가운데 구야국)을 건국한 사실과 그 뒤의 어느 시기에 그 국가를 중심으로 가야연맹체를 결성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지역은 일찍부터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으므로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를 비롯한 한예(韓濊)와 중국 군현세력들이 여기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중국의 군현 및 왜 등과 경상도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금관가야는 중국 군현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이를 경상도 내륙지역의 여러 국가와 왜 등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낙랑군 ·대방군의 소멸과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가야연맹도 커다란 변동을 겪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왜 ·가야 세력과 동맹을 맺고,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다. 400년 왜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왕은 보기(步騎)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신라국경에 집결한 왜군을 격파한 다음 임나(가야)의 종발성(從拔城:위치 미상)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의 여러 가야국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쇠잔해졌으며, 일부 세력들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전기가야연맹도 와해되고 말았다.

참조항목

구지가, 금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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