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한국미술

삼국시대의 한국미술

금귀걸이

금귀걸이

삼국시대 때부터 커다란 고총(高塚)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그 때의 장신구 ·일상생활품 등이 부장품으로서 남아 있다. 불교는 372년에 처음으로 고구려에 전해졌으며 이로부터 한국미술의 중심적 추진력이 되었다. 목조와가(木造瓦家) 건축은 이미 낙랑군(樂浪郡:BC 108∼AD 313)의 중국인을 통하여 소개되어 있었으나 불교건축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불탑(佛塔)은 처음에는 중국식 고루목탑(高樓木塔)으로 동 ·서 ·북의 3면이 각각 독립된 금당(金堂)으로 둘러싸인 8각탑(角塔)이 있던 흔적이 고구려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나, 6세기경부터 화강암에 의한 석탑이 건조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경에 이르러 한국 석탑이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을 완성하게 되었다.

불상조각(佛像彫刻)은 고구려가 북위(北魏)를 주로 한 중국 북조(北朝)의 조각을 본보기로 하고 있는 데 반해서, 백제에서는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아 둥그스름한 얼굴에 온화한 ‘백조의 미소’라고도 할 수 있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은 불상이 만들어졌고, 고신라(古新羅)는 기본적으로는 북조불(北朝佛)에서 영향받아 엄숙하고 침울한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정면시(正面視) 위주의 평면조각에서 입체조각으로 발전한 것은 900년경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이 구리 또는 돌로 만들어졌다. 이 반가사유상을 포함하여 7세기 전반(前半)의 삼국 불상은 종래의 북위 전통에서 벗어나 북제(北齊) ·수(隋) ·초당(初唐)의 양식을 차례로 반영하여 의복 밑의 신체에 보다 주력하였다.

7세기 중엽이 되면 고신라의 불상도 한국적인 온화함을 되찾고, 구리 ·돌의 조각기술이 원숙해져 이후 통일신라의 황금기를 예시하고 있다. 회화는 압록강 중류 북안(北岸)의 퉁거우[通溝]와 대동강(大同江) 하류 북안의 용강(龍岡) 부근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벽화고분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후한(後漢)과 삼국시대의 중국벽화 고분에서 배워온 것으로, 발생기는 4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4~5세기에 걸친 초기 고분벽화는 중국식인 주인 부부의 초상화를 주로 하고, 6세기에 접어들면 부부를 중심으로 한 중요 생활기록, 즉 풍속화로 바뀌며, 7세기 전반(前半)에는 사신도(四神圖)와 수목(樹木) ·연화(蓮花)를 제재로 한 풍경화가 주류를 이룬다.

벽화고분은 백제의 공주(公州)와 부여(扶餘)에서 각각 볼 수 있으나 가야(伽倻) ·고신라 땅에도 전해져 근래에 고령 ·영주(榮州)에서도 1기(基)씩 발견되었다. 금속공예는 처음에 낙랑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의 육조미술(六朝美術)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크게 발전하였다. 고신라의 금관총(金冠塚)에서 나온 순금제 외관(外冠)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3개의 수목형(樹木形) 입식(立飾)과 2개의 녹각형(鹿角形) 입식을 단 시베리아 초원(草原) 일대에서 유래된 특수 형식인 데 반해서, 고구려 ·백제는 일보 전진하여 포제(布製)의 모자에 수목형 또는 초화형(草花形) 투조(透彫)로 된 전식(前飾)을 달았고, 71년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유물은 고신라의 것보다 세련되었다.

고신라 토기는 3세기경에 성립한 초벌구이의 경도(硬陶)로서 고배(高杯) ·감(坩)을 주체로 하고 있다. 표면 장식은 파상집선(波狀集線) ·기하학적 선(線)무늬 등으로 한정되어 소박 ·고졸(古拙)한 기형(器形)과 더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