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의 역사

씨름의 역사

씨름은 사람이 모여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다. 무기가 발명되기 전, 인류는 맨몸으로 타 부족과 싸우기도 하고, 식생활을 위하여 짐승을 사냥하기도 하였다. 원시시대 생활의 수단이었던 맨몸 격투가 씨름의 기원이며, 인류는 생존을 위하여 그 기술을 익혀야 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 남아 있는 유적이나 서지(書誌)에서 이러한 자료를 찾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벽화에는 씨름과 유사한 형태가 묘사되어 있고,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왕자의 신분이었을 당시 그 사촌인 제바달다와 씨름 겨루기를 했다는 기록이 불전에 남아 있다. 《예기(禮記)》 <월령편(月令篇)>이나 장평자의 《서경부(西京賦)》를 보면 중국에서도 한무제 때에 씨름이 가장 성행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각저(角觝)라고 불렀다는 것이 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씨름은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태조 주몽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계루부 족장 때 5부 족장의 고추가(부족장의 존칭) 시합이 있었는데, 이 시합종목이 각저·궁사(弓射)·승마·수박이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의 문헌에는 우리의 씨름은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撩骹)라고 했을 정도로 중국의 각저희나 일본의 스모와는 그 방식이 다르고 독특하였다.

한국의 씨름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사료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각저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옛 고구려의 도읍지인 만주의 통주 부근에서 발견된 이 벽화에는 두 사람이 상대의 허리의 띠를 잡고 씨름을 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씨름과 관련된 첫 문헌상의 기록이 있으며, 충혜왕이 나랏일을 등한시하고 매일 내시와 오락용 씨름인 각력희(角力戲)를 즐겼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고려 시대에는 오락용, 군사 선발용 등의 다양한 씨름이 존재하였고, 씨름을 잘하는 군사를 용사라 칭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의 오락 거리로, 《세종실록》에 세종 때 상왕과 왕이 배에서 군사들의 씨름 경기를 관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군사 훈련이 강조되었고, 씨름은 국가가 장려하는 무예 수련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시대의 양상이 달라지면서 씨름은 세시 풍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6세기에는 단오의 풍속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조선 후기에는 농사 의례와 결합하여 단오 외에도 정월, 칠석, 백중, 추석에도 행하여졌다. 18세기에는 샅바가 출현하며 각희(脚戱)라고 불리는 다리 기술이 주축이 된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씨름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김홍도신윤복의 그림에도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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