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석

원천석

[ 元天錫 ]

요약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조선의 태종이 된 이방원을 가르친 바 있어, 태종이 즉위한 뒤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저서로 《야사(野史)》,《회고가》가 있다.
사양서원

사양서원

출생-사망 1330 ~ ?
본관 원주(原州)
자정(子正)
운곡(耘谷)
활동분야 학자
주요저서 《야사(野史)》《회고가》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정용별장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지으며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조선의 태종(太宗)이 된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바 있어, 1400년 태종이 즉위한 뒤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종이 직접 그를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아들 형을 현감에 임명하였는데, 이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른다.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서, 그가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를 두려워한 증손이 불살랐다고 한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망한 고려를 회상하며 쓴 《회고가》가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의 칠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