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농업

한국의 농업

밭갈이

밭갈이

한국 농업의 기원은 선조들이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와 유목시대를 거치지 않고 원시적 농경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종전까지는 인접한 중국 대륙이 세계 농업의 기원지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었으나, 1998년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의 구석기 유적에서 기존의 견해를 뒤집는 고대의 볍씨가 발견되었다.

'소로리 볍씨'라고 부르는 이 볍씨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의 조사 결과 약 1만 7000년~1만 3000년 전의 재배 볍씨로 밝혀졌는데, 이는 종전까지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로 알려진 중국 후난성[湖南省]에서 출토된 1만 1000년 전의 볍씨보다 수천 년이나 오래된 것이다. 소로리 볍씨가 세계 최고의 볍씨로 밝혀지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에서 벼농사의 기원과 전파에 관한 연구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삼한시대에 이미 보리·기장·피·콩 ·참깨 등 5곡의 재배뿐 아니라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치고 명주를 짜는 방법도 알려져 있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농업이 현저히 발달하여 고구려에서는 1세기 초에 미개시대를 특징짓는 원예 및 식량작물이 재배되었고 짐승으로 쟁기를 끄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백제는 5곡과 함께 과일·채소·삼·뽕나무·약용식물 등이 재배되었고 양조(釀造)·가축사양·직물 등도 발달하였으며, 양잠법·직조법·염색법·재봉법 등이 일본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와 더불어 논농사가 급격히 발달하여 관개수리에 관한 농업기술이 발달하였다. 신라에서도 5곡의 재배 외에 뽕나무의 재배와 견직물이 발달하였고 목축에도 힘을 썼으며 축력을 농경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서기 114년(신라 지마왕 3)과 139년(신라 일성왕 6)의 기록에 의하면, 보리·콩은 1년 1작 또는 1년 2작의 작부형식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수서(隨書)》에 의하면, 논에 보리를 재배하는 2모작 형태의 농업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24~56년에 쟁기의 원형이 나타났고, 지증왕·문무왕 시대에는 축력쟁기·쇠가래·괭이·낫·호미 등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각종 식용작물·섬유작물·유료작물(油料作物)·약용작물과 과수·채소·관상식물 등이 재배되었으며, 농기구도 철제화하였고,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토지는 공전(公田)으로 규정하였으나 후기에는 토지의 사유화가 성행하였고 농민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여러 곳의 제방과 보를 수축 및 개축하여 관개농업의 발전을 도모하였고 세제 혜택을 주어 토지개간사업을 실시하는 등 토지개발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벼농사가 상당히 보급되어 쌀의 경제적 위치가 매우 높아져 986년(성종 5)까지 국가의 저장곡물이 조[粟]였던 것이 이때에 처음으로 쌀을 저장하는 기관으로서 의창(義倉)을 창설하는 동시에 쌀과 조를 공조(公租)의 수납곡물로 하였다.

한편, 1356년(고려 공민왕 5) 문익점(文益漸)에 의하여 목화가 도입되었고, 닥나무·배나무·밤나무·대추나무 등도 재배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토지공유제가 확립되고 집권봉건적인 토지 지배관계가 완성되어 고려 초기에는 과전제(科田制)가 확립 실시되었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공전제를 원칙으로 토지경제의 합리화를 위한 권농정책을 펴서 농사기술이 상당히 발달한 집권 봉건주의 시대를 이루었다. 농경지를 조사하여 조세의 자료로 하는 동시에 치산치수와 더불어 벼농사를 권장하였으며 농사기술에 대한 농서(農書)인 《농사직설(農事直說)》《금양잡록(衿陽雜錄)》《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을 출간하여 농업을 권장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벼의 직파법과 이앙재배법이 개발 실시되었으며 건답법과 윤답법도 고안 실시되었고 측우기가 개발되는 등 기상학도 발달하였다.

토마토·담배·고구마·감자 등도 도입 재배하게 되었고, 농작물의 품종분화도 점차로 이루어지고 토양개량이나 시비법 등 농업기술과 맥류와 두류의 돌려짓기, 벼와 보리의 1년 2작 등도 보편화되었으며, 2년 3작의 작부방식도 15세기경에 북서지방에서 보편화되었다. 이때에는 쟁기·쇠스랑·써레·두레·가래 등의 농기구가 보편화되었고, 비료로서 산야초·인분·구비·재 등이 이용되었다.

조선 말기인 1900년(광무 4)에는 잠업시험장이, 190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인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과 현대식 농업교육기관으로서의 농상공학교의 발족을 보게 되었고, 이로부터 1906년에 농림학교가 분리 발족됨으로써 근대적인 농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일제의 지배하에서는 식민지 농업정책에 의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토지를 정비하여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를 확립시켰으나, 봉건제도하의 경작농민을 근대적인 영세농으로 전락시켰다. 1918년 이후 3차례에 결쳐 수행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으로 한국의 농업은 벼농사 중심으로 바뀌었고 토지개량사업을 통한 수리시설이 대규모로 확충되었으며 목화재배도 확대되었다. 품종개량과 농업기술의 개량 및 제조기와 탈곡기의 보급 등이 추진되었으나 농민들은 노동력·농산물·농토 등을 계속 착취당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농업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농업정책이 입안 수행되어 왔다. 1949년에는 토지개혁법에 의한 토지개혁이 실시되었고 농촌 및 농업발전을 위한 농업협동조합법·농촌진흥법·축산협동조합법 등이 차례로 제정, 시행되었으며, 1962년 이후에는 6차례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행하면서 단계적으로 농업증산 또는 식량증산 계획과 새마을운동의 실시와 더불어 괄목할 만한 농업기술의 발전을 이룩하여 이른바 녹색혁명을 통하여 쌀의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1993년부터는 신경제 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였으며, 1995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을 계기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한국농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농어촌특별세를 신설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