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층

신사층

[ 紳士層 ]

요약 중국 명(明)·청(淸)대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행사한 계층.

명 중기~청 말기의 관직 경력자인 '신(紳)'과 관직 경험이 없는 학위 소지자인 '사(士)'로 구성된 지배층을 가리킨다. 신사라는 집단은 명 초기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관직경력자인 '신'은 이미 전대부터 특권 계층에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학위 소지자인 '사'는 명대부터 특권 계층에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성 관료보다 신진 관료를 우대하였다. 이에 학위 소지자들도 신진 관료 우대의 일환으로 9품관에 준하는 특권을 부여받아 특권 계층으로 편입되었다. 이때의 학위 소지자는 동시(童試, 지방에 위치한 학교의 입학 시험)에 합격한 생원(生員), 생원 중에 국자감에 입학한 학생인 감생(監生), 과거 시험 응시자인 거인(擧人)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평생 요역(徭役)을 면제받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생원만이 향시(鄕試, 지방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감생과 거인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않았음에도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특권에 따라 명 중기인 15세기 중엽부터 학위 소지자가 관직 경력자와 함께 신사로 불리게 되었다. 명 중기에 들어서면서 생원, 감생, 거인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생원은 관료가 되기는커녕 감생이나 거인이 되기도 힘들었고, 감생의 관직 진출 기회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또한 거인은 회시(會試)에서의 경쟁률이 높아져 과거 시험 합격률이 급감하였다. 과거 시험을 통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감소하고, 관직에 진출한 몇몇 가문이 계속 관인을 배출하게 되자,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학위 소지자들은 점차 향촌에 정착하여 국가가 부여한 특권을 향유하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해 나갔다.

향촌 사회에 정착한 신사는 요역 면책을 토대로 세금을 면제받았고, 토지를 겸병하여 넓은 땅을 보유해 나갔다. 신사가 납부하지 않은 세금은 농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이에 명 초기 이갑제(里甲制)에 의한 향촌 지배는 타격을 입게 되었고, 농민들의 계층 분화와 이동을 초래해 심한 경우 민란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명 조정은 이갑제를 복구하기 위해 유랑민을 정착시키고 신사들의 특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향촌에서의 신사는 이미 중앙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결국 명 조정은 명 말기부터 신사를 이용한 향촌 지배로 전환하게 되었다.

명 중기부터 발생한 사회 변동은 이갑제를 무너뜨렸고, 이로 인해 발생한 향촌 지배의 공백은 신사를 통해 메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신사는 향약을 만들고 분규를 조정하는 등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또한 학문을 강의하고 서적을 간행하는 등 향촌을 교화하고 향론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수리시설, 도로 등 공공시설의 설치비 분담, 시장 개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다만 신사에 의해 설치된 공공시설이나 시장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명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청도 신사를 통해 향촌을 지배하였다. 청은 명을 비롯한 대외 정복과 그에 따른 정복지 유지에 신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청 조정은 한인 신사의 기득권과 재산을 보호하고 관리로 등용하는 등의 조치로 신사를 포섭할 수 있었다. 신사의 입장에서도 청군의 중원 진입, 도적의 활동 등으로 안전에 위협을 느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청 조정과 협력했던 것이다.

청의 지배가 안정되면서 신사는 명 말기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신사는 토지를 겸병하고 고리대를 취하였으며, 향촌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에 반해 농민은 또다시 유리되었다. 청 조정 역시 신사를 통제하고자 명과 같은 조치를 취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청 조정과 신사는 다시 타협에 이르게 되었다. 신사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되자 청 조정에 협력하기 시작했고, 청 말기에 무너진 관군을 대신하여 향병을 조직해 각지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명청대의 신사는 조정과의 협력을 통해 향촌 지배를 확대하고, 조정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여 농민을 유리시켰다. 그러나 한편 관인의 수가 한정되어 행정력이 부족했던 조정과 함께 향촌의 질서를 유지시켰고, 향촌의 여론을 대변하였으며, 조정과 향촌의 의견을 조정하는 등 국가의 지방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는 전대의 사대부와 신사가 가지는 차이점이자 신사의 특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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