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강왕

헌강왕

[ 憲康王 ]

요약 신라의 제49대 왕(재위 875∼886).
경주 헌강왕릉

경주 헌강왕릉

출생-사망 ? ~ 886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875년 ~ 886년
본명 김정(金晸)
시대 남북국시대
활동분야 정치

성은 김(金), 이름은 정(晸)이며 시호는 헌강(憲康)이다. 신라의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의 딸인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은 동생들이다. 의명부인(懿明夫人)을 비로 맞이해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의 왕비인 의성왕후(義成王后) 김씨와 제56대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어머니인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 등을 낳았다. 이 밖에 김씨 여인과의 사이에서 서자(庶子)인 김요(金嶢, 제52대 효공왕)를 낳았다. 《삼국사기》에는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나갔다가 길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해 수레에 태워 막사로 데려가 범해서 김요를 낳았는데, 뒷날 진성여왕이 그의 소식을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 골격으로 헌강왕의 아들임을 확인하고는 태자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헌강왕의 어머니가 문자황후(文資皇后)이며, 을미년(乙未年)인 875년에 즉위해 11년 동안 통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강왕은 866년(경문왕 6) 태자로 봉해졌으며, 875년(경문왕 15) 음력 7월에 아버지 경문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헌강왕이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보기만 해도 모두 입으로 읊을 수 있을 만큼 천성이 총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문치에 힘쓰며 876년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큰 법회)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이찬(伊湌) 위홍(魏弘)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대아찬(大阿湌) 예겸(乂謙)을 시중(侍中)으로 임명했다. 880년(헌강왕 6)에는 자리에서 물러난 예겸을 대신해 이찬 민공(敏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879년(헌강왕 5) 일길찬 신홍(信弘)이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유지되었다. 자연재해도 일어나지 않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의 삶도 안정되었다. 《삼국사기》에는 880년 헌강왕이 음력 9월 9일에 신하들과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금성에 민가가 즐비하고 곳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헌강왕 때에 바람과 비가 철마다 순조로워 금성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잇달아 있으며 초가는 하나도 없었고 거리마다 풍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회적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렸으나, 헌강왕은 중앙귀족들과 함께 향락적 귀족문화를 즐기는 데만 몰두하고 신라 하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했을 때 남산(南山)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자 왕도 이를 따라서 춤을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이나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헌강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에는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령(玉刀鈐)이라 했으며,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에는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이를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산신과 지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하도록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 향락에만 빠져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고 헌강왕 때의 향락적 귀족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헌강왕 때에도 신라는 당나라·일본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876년에 당나라로 사신을 보냈고, 878년에는 당나라 희종(僖宗, 재위 873∼ 888)이 사신을 보내왔다. 그 해 가을에 다시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당나라에서 농민반란인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했다.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황소의 난이 진압되자 885년(헌강왕 11) 당나라로 이를 축하하는 사신을 보냈다. 일본은 878년(헌강왕 4)과 882년(헌강왕 8)에 신라로 사신을 보내왔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886년(헌강왕 12) 봄에 북쪽 말갈의 소국인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신라에 화친을 청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강왕은 886년(헌강왕 12) 음력 7월 5일에 죽었고,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주시 남산동에 위치한 경주 헌강왕릉은 사적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에 동생인 김황(金晃)이 왕위를 이었다.

헌강왕 본문 이미지 1경문왕효공왕

역참조항목

산신가, 처용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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