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의회

장기의회

[ Long Parliament , 長期議會 ]

요약 1640년 소집되어 1653년에 해산된 영국 의회.
구분 의회
설립일 1640년
설립목적 스코틀랜드군의 침입에 대한 대처
주요활동/업무 왕의 실정에 대한 개혁
소재지 영국

1640년 3주 만에 해산된 단기의회와 구별하여 이 이름이 붙여졌으며, 청교도혁명의 중심무대였다. 단기의회 해산 후, 스코틀랜드군(軍)이 영국에 침입하여 찰스 1세는 북부 2주(州)의 점령을 인정하고 화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왕은 요크에 귀족만의 의회를 열었고, 다시 11월 7일 웨스트민스터에 서민원(庶民院)을 소집하였다. 이것이 장기의회이다. 의회는 왕의 실정에 대한 개혁에 힘썼으나, 1641년 12월 대간의서(大諫議書)의 의결을 전후해서 왕당파(王黨派)와 의회파(議會派)로 분열되었다.

1642년 1월 찰스 1세는 핌 ·햄덴 등 5명의 의원을 체포하려다가 실패,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이것이 동기가 되어 청교도혁명이 발생했다. 혁명이 일어나자 왕당파의원은 탈락하고, 의회는 의회파(라운드헤즈)의 거점이 되었다. 의회파는 장로파(長老派)와 독립파(獨立派)로 분열되어 처음에는 장로파가 지배적이었으나, 점차 군대를 장악한 독립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1648년 12월 프라이드 대령은 장로파를 추방하여 이후 독립파만으로 의회가 구성되었다. 이것을 ‘잔부의회(殘部議會)’라 한다. 1649년에는 왕을 처형하고 공화제(共和制)를 선언했으나 1653년 4월 임기연장을 꾀하다가 군대의 비판을 초래, 크롬웰이 무력으로 해산했다. 일반적으로는 이것으로 이 의회가 종결된 것으로 보고 12년 반 계속되었기 때문에 장기란 이름을 붙였지만, 1659년 왕정복고 직전 뭉크가 이 의회를 부활하고 이듬해 3월 자진해산하였으므로 이때를 종결로 보기도 한다.

역참조항목

프라이드의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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