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

의상

[ 義湘(相) ]

요약 신라시대의 승려로 화엄종(華嚴宗)의 개조이다.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하고 돌아와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화엄의 교종을 확립하는데 힘썼다. 저서에《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등이 있다.
출생-사망 625 ~ 702
활동분야 종교
주요저서 《화엄일승법계도》, 《십문간법관》 등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義湘(의상)’으로 되어 있지만, ‘義相(의상)’이나 ‘義想(의상)’으로 기록되어 있는 문헌도 있다. 625년(진평왕 47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644년(선덕여왕 13년)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650년 원효(元曉)와 함께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遼東)에서 첩자(諜者)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揚州)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2대 조사(祖師)인 지엄(智儼, 602∼668)에게서 화엄(華嚴) 사상을 배웠다. 668년 7언(言) 30구(句) 210자(字)로 화엄사상의 핵심을 도인(圖印)으로 나타낸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저술하였다.

의상은 671년(문무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왔는데, <삼국유사>에는 당 나라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국한 뒤에 동해의 굴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를 친견(親見)하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당시의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이 전해진다. 676년(문무왕 16년)에는 왕명에 따라 과거 삼국(三國)의 요충지였던 죽령(竹嶺) 인근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그 곳에서 화엄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고 제자를 양성하여 ‘해동(海東) 화엄(華嚴)의 초조(初祖)’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문하에서는 오진(悟眞)·지통(知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의상십철(義湘十哲)’이라 불리는 고승(高僧)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가운데 지통(知通)은 노비 출신이었으며, 진정(眞定)도 품을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고, 신라 하대(下代)에는 전국 곳곳에 화엄종 사찰이 세워졌다. 그 가운데 부석사(浮石寺), 비마라사(毘摩羅寺), 해인사(海印寺), 옥천사(玉泉寺), 범어사(梵魚寺), 화엄사(華嚴寺), 보원사(普願寺), 갑사(岬寺), 국신사(國神寺), 청담사(靑潭寺)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大刹)로 이름이 높다. 또한 의상의 제자인 표훈(表訓)에게 화엄사상을 배운 김대성(金大城)이 화엄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세운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남아 있다.

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으며, 고려 숙종에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는 중국과 일본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친 학승(學僧)이었지만, 매우 적은 저술만을 남겼다. 그나마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등의 저술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으며,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외에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투사례(投師禮)> 등의 짧은 글들만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꾸준히 연구되어, 신라 하대에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관한 주석서인 <법융기(法融記)>, <대기(大記)>, <진수기(眞秀記)> 등이 편찬되었고, 이들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으로 집대성되었다. 이처럼 의상이 매우 적은 저술만 남겼지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을 두고 일연(一然)은 <삼국유사>에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충분하다”고 평했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의 전기(傳記)와 함께 낙산사, 부석사 등의 창건과 관련된 여러 개의 설화가 전해진다. 중국의 송(宋) 나라 때에 찬녕(贊寧)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도 의상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날 경상남도 거창 우두산(牛頭山)의 의상봉(義湘峰)이나 강원특별자치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의 의상대(義湘臺) 등의 명칭은 의상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엄사상

의상은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초조(初祖)’라는 별칭처럼 화엄사상의 발전과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사상은 중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중국에서 법장(法藏, 643~712)이 화엄종의 교리를 집대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서신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특히 의상은 개인적 저술과 교화 활동을 중심으로 했던 원효와는 달리 부석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화엄교단을 세웠는데, 이는 통일 이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불교가 왕권의 안정적 운영과 사회적 통합의 이념적 기반으로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그가 668년에 저술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 ‘법계도(法界圖)’, ‘법도장(法圖章)’, ‘법성도(法性圖)’, ‘해인도(海印圖)’ 등으로도 불리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 사상의 핵심을 7언 30구의 운문(韻文)으로 나타낸 것이다. 게송(偈頌)들은 4개의 ‘회(回)’자 모양의 도인(圖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글자인 ‘법(法)’과 마지막 글자인 ‘불(佛)’이 가운데에서 다시 만나 이어진다. 각 게송(偈頌)과 그것들의 배열은 <화엄경(華嚴經)>의 근본정신과 깨달음의 과정을 나타내고 있어, <화엄경>의 핵심 내용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화엄종(華嚴宗)은 천태종(天台宗)과 더불어 중국 불교 교학(敎學)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종파이며, <화엄경(華嚴經)>을 주요 경전으로 삼아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화엄종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서로 끊임없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대로가 바로 불성(佛性)의 드러남이라고 하는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과 ‘성기설(性起說)’을 주장해 ‘법계종’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법계(法界)의 연기(緣起)에서 존재의 본체인 ‘리(理)’와 현상인 ‘사(事)’는 서로 장애가 되지 않으며, ‘사(事)’와 ‘사(事)’ 또한 서로 원융(圓融)한다는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를 강조한다. 곧 화엄사상은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圓融)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이러한 화엄사상의 핵심을 압축해서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리상즉설(理理相卽說)’ 등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했다. 의상의 법계연기설은 ‘리(理)’도 ‘사(事)’처럼 차별적인 것임을 인정하여 ‘이리무애(理理無礙)’까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라는 구절은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연기(緣起)를 나타낸다.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따라 존재하므로 하나가 없으면 일체도 있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일체가 없으면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결국 하나와 일체는 서로를 포용하며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나와 일체가 서로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서로를 인정해야 성립할 수 있다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연기설은 모든 개체의 평등과 조화를 지향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이루어져 고정된 본성이 없으므로 분별이 없는 중도(中道)에 일체의 법이 있게 된다. 또한 중도에 따라 흔들림 없이 본래부터 고요한 법성(法性)을 깨달으면 그를 일러 부처라 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불성의 현현(顯現)이라는 ‘성기설(性起說)’을 강조한다. 이처럼 의상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은 중도를 강조하며 개체의 독자성과 개체간의 융합을 동시에 인정하는 특색을 지니고 있고, 이는 중생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衆生隨器得利益)는 가르침으로 나타났다.

관음신앙과 미타신앙

한편 의상은 관음(觀音) 신앙과 미타(彌陀) 신앙을 중심으로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의상의 관음 신앙은 그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했다는 낙산사(洛山寺) 창건 설화에서 잘 나타나는데, 자비(慈悲)로 중생을 보살피는 관음보살이 이 땅에 상주(常住)하고 있다는 ‘관음상주신앙(觀音常住信仰)’은 사람들이 불교를 좀 더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나아가 이러한 관음상주신앙은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기초해 국토 이곳저곳에 보살이 상주(常住)하고 있다는 ‘보살주처신앙(菩薩住處信仰)’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신라가 본래 불국정토(佛國淨土)라는 ‘불국토 사상(佛國土思想)’의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의상의 미타신앙은 그가 676년에 문무왕의 명으로 세운 부석사(浮石寺)의 가람 배치 등에서 그 특징이 확인된다.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설법을 한다는 부처이며, 미타신앙이란 이러한 아미타불이 있는 정토(淨土)로의 왕생(往生)을 기원하는 믿음을 가리킨다. 부석사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본전(本殿)으로 하여 미타신앙에 기초하고 있는데, 화엄(華嚴) 사상의 보급에 앞장섰던 의상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정토종(淨土宗)에서 숭앙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불(本尊佛)로 하여 절을 창건했다는 사실은 신라 불교가 지닌 통불교(通佛敎)의 특징을 반영한다. 그리고 부석사의 불상은 불교의 관행에서 벗어나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가파른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아 세워진 가람은 크게 3단으로 나뉘어 ‘구품왕생(九品往生)’의 정토사상에 기초해 배치되어 있다. 곧 부석사는 정토의 모습을 실재화하여 세워졌는데, 이는 의상의 미타신앙이 불국토 사상에 기반하여 현세 중심적인 왕생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의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佛性)의 드러남이라는 화엄(華嚴) 사상에 기초하여 현세 중심의 정토사상을 확립하였다. 이를 기초로 현실 세계에 정토의 이상 세계를 구현하려는 불국토 사상은 신라의 중요한 문화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는 석굴암과 불국사의 건설 등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불국토 사상은 외래 종교인 불교를 토착화하고, 불교가 통일 이후의 현실에서 사회 통합의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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