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

을미의병

[ 乙未義兵 ]

요약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과 단발령(斷髮令)에 분격한 유생(儒生)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를 내걸고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驅逐)을 목표로 일으킨 항일의병.
을미의병 추모비와 효열각

을미의병 추모비와 효열각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분함을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한술 더 떠 친일내각이 황후폐위조치를 내리자 유생들은 토역소(討逆疏: 나라의 역적을 처벌하자는 내용의 상소문)를 올리고 물론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창의소(倡義所: 의병을 조직하고 훈련하기 위해 설립된 조직)를 설치하였다. 11월에는 충청도의 제천과 유성에서는 유인석(柳麟錫)·문석봉(文錫鳳) 등이 중심이 되어 거의토적(擧義討賊)의 기치를 들었다. 그 위에 친일내각이 전국에 내린 단발령은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을 확산시키는 한몫을 하였다.

1896년 1월 경기 지역에서는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하여 일어났으며, 충청 지역에서는 홍주의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 등과 제천의 유인석과 그의 문인 서상렬(徐相烈) 등이, 강원 지역에서는 춘천의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이소응(李昭應)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뒤 이들은 합류하여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처치하고 충주부를 점거하여 관찰사 김규식(金奎軾)도 처단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산청에서 곽종석(郭鍾錫)이,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許蔿) 등이 기병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전라도 지역에서도 기우만(奇宇萬) 등이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고 곧 흩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선무사를 파견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지방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혼란의 틈을 근왕세력인 이범진(李範晋) 등의 정동파(貞洞派)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으로써 친로내각(親露內閣)이 등장하였다. 새 내각은 단발령의 철폐와 의병의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냈으며, 이와 함께 각종 공세를 탕감하는 조치도를 취함으로써 의병봉기의 명분을 없애기에 노력하였다. 이후부터 의병활동은 사그러들었다.

참조항목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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