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루리아미술

에트루리아미술

요약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서 북부에 걸쳐 BC 7세기경부터 고대 로마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번영했던 이탈리아의 미술.
에트루리아의 도자기

에트루리아의 도자기

에트루리아는 대부분 현재의 토스카나 지방에 해당한다. 에트루리아 미술에 대하여는 20세기 초 이래의 활발한 발굴과 연구에 의해 그 모습이 점차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에트루리아인은 BC 8세기경부터 성벽과 도로 및 다리와 상하수도를 만들어 도시생활을 영위하였고,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에 에트루리아적인 독자적 성격을 발휘하였다. 그 발전과정은 일반적으로 3시기, 즉 BC 8세기경부터 BC 6세기 중엽까지의 ‘이오니아 시대’, BC 5세기 중엽까지의 ‘아르카이크 시대’, BC 4세기에서 BC 2세기에 이르는 ‘헬레니즘 시대’로 구분된다.

BC 7세기에는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았고, 이어 남이탈리아나 시칠리아섬의 그리스 식민시를 통하여 그리스 미술의 영향도 받으면서 이탈리아 중부의 풍토에 알맞은 독특한 미술을 발전시켜 BC 6세기부터 BC 5세기경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에트루리아의 건축

에트루리아의 건축은 동방에서 건너온 퇴석법(堆石法)에 의한 아치(arch:穹窿) )구조를 발전시켜 로마인에게 계승케 함으로써 서양건축사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체르베테리의 언덕에서 발견된 레골리니 갈라시의 묘갱(墓坑:BC 7세기 중엽)은 서쪽에 높이 쌓인 돌더미를 좌우에서 접근시켜 궁륭 천정을 구성하고 있으며, 1848년에 발견된 베이이(Veii) 근교의 ‘캄파나의 묘’(BC 7∼BC 6세기)에서도 이 퇴석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석재가 그리스만큼 풍부하지 못하여 신전의 기둥에는 목재를 많이 썼으므로 그 건축 유구(遺構)는 토대를 이룬 높은 돌 기단과 주대(柱臺)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나 피에솔레나 베이이의 신전유적의 평면 설계로서도 추측되는 바와 같이 원형은 전방에 주열(柱列)의 넓은 홀이 있으며, 거기에서 내진의 켈라(cella:신상이 놓였던 곳)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측면에도 주열은 있었으나 뒷면에는 주열이 없어 전면이 강조된 양식으로서 그리스의 주주식(周柱式)과는 상이하였다.


에트루리아의 조각

착색도토(着色陶土)인 테라코타를 즐겨 사용하였고, 인체(人體)를 본뜬 납골단지를 비롯하여 분묘장식의 부조(浮彫), 소(小)인물상, 반와(半臥)인물상을 올려놓은 묘관(墓棺) 등에서는 소박하면서도 예리한 사실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신전 장식군상의 일부였던 베이이에서 출토된 《아폴론》이나 《헤르메스》(BC 500?)는 그리스 신화에서 취재하면서도 늠름한 생동감을 보여준다. 청동 조각에서도 유명한 《암이리[牝狼]》(BC 500?)나 《괴수 키마이라》(BC 5세기)와 같이 박력 있는 표현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 금속조각에는 거울 ·촛대 ·잔 ·단지 등이 있으며 그 표면에는 그리스 신화 등이 부조되어 있는데 장식무늬나 인간상의 표현에 에트루리아적 ·이탈리아적인 왕성한 사실 정신을 발휘하였다.  

에트루리아의 회화

에트루리아의 회화는 지상의 건축물에 그려진 벽화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타르퀴니아나 키우시를 비롯하여 체르베테리 ·불치 기타에서 발견된 분묘 내의 벽화가 회화를 대표한다. 주제는 2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사자(死者)가 명도(冥途)로 떠나는 길이나 장례의 장면, 다른 하나는 주연(酒宴)과 경기와 수렵 등 일상생활의 장면을 취급하고 있다. 대부분은 그리스 도기(陶器)의 선묘화(線描畵)에서 암시를 얻어 인물이나 무늬를 흑 ·백 ·적 ·황 등으로 채색하였다.

가장 오래된 것은 베이이의 ‘캄파나의 묘’의 벽화(BC 6세기 초)로서, 거의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무장한 남자에게 안내되어 명도로 떠나는 마상(馬上)의 남자 모습이 흐릿하게 남아 있어 동방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수많은 작례(作例)를 남기고 있는 것은 타르퀴니아의 지하 분묘군으로서, ‘황소의 묘’(BC 6세기 전반)에서는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 취급하였고, ‘복자(卜者)의 묘’ ‘암사자의 묘’ ‘표범의 묘’ 등에서는 경기하는 남자와 춤을 추는 남녀가 많이 취급되었다. 그 밖에 ‘수렵과 어로의 묘’(BC 6세기)에는 수렵과 어로의 장면 등이 그려져 반드시 종교나 장례의 동기와는 관계 없이 자연이나 일상생활의 모습도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대가 내려오면 괴기한 주제를 취급한 타르퀴니아의 ‘귀신의 묘’(BC 4∼BC 3세기)나, 그리스 신화에서도 잔혹한 이야기를 취급한 불치의 ‘프랑수아의 묘’(BC 3세기) 등의 벽화가 나타나 에트루리아인의 마음에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가 싹트기 시작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의 예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아마도 당시 이탈리아 북부의 포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던 북방 갈리아인으로부터의 영향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 미술의 특질

에트루리아인은 같은 시대의 그리스 미술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사실을 누르고 전형적인 표현에 힘써온 그리스인의 미술취향과는 달리 소박하고 힘찬 사실에 철저하였으며, 그 특질을 로마인에게 전하여 구체성과 실증성을 중히 여긴 제정(帝政) 로마의 거대한 미술이 탄생하는 직접적인 동인(動因)이 되었다. 더욱이 에트루리아적 ·이탈리아적인 성격은 중세의 로마네스크 미술로 계승되었고, 14 ·15세기의 피렌체파 미술에 되살아났으며, 현대에도 M.마리니의 조각이나 캄필리의 회화 등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