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론

양이론

[ 攘夷論 ]

요약 외국을 오랑캐[夷狄]로 낮추어 보고 외세의 배격을 주장한 봉건적 배외사상.

주로 중국문화권에 속한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이질적인 서양문물의 유입과 군사적 침입에 대처해서 자국을 지키기 위하여 대두되었다. 한국에서의 이 이론은 아편전쟁 이후 (淸)나라가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열강에 굴복하고 러시아가 남하하는 등 조선 주변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심각한 위기의식 속에서 대두하게 되었으며, 서유럽 세력이 직접 물리적인 힘으로 한반도에 부딪친 병인양요(丙寅洋擾) 등을 계기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60년대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김평묵(金平默) 등 주로 성리학자(性理學者)에 의하여 대표되는 양이사상은 논리적으로 ‘옳은 것은 지키고 그른 것은 물리친다’는 전통적 유교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 따라서 양이론은 당시의 서양이 물리쳐야 할 척사(斥邪)의 대상으로 의식됨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한 척사사상의 구체적인 한 형식이었다. 양이론에서 서양을 배척의 대상으로 하는 사상의 근거에는 한결같이 당시의 서양이 조선사회에 미칠 포괄적인 폐해(弊害)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곧 ‘종사(宗社)의 위급’ ‘국가존망의 위기’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러한 위기의식의 배경에는 서양에서 받을 경제적 침략이 특히 강하게 의식되었다.

여기에 당시 양이론자들은 ‘양물배격론(洋物排擊論)’ 또는 ‘양물금단론’을 주장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나 있다.

① 물리쳐야 할 대상은 서양이고 보존해야 할 가치는 바로 조선의 자기 질서였다는 점에서, 종전까지는 주로 관념적으로 중화문화권적인 화이사상(華夷思想)에서 주장된 위정척사의 틀이 한민족 그 자체를 의식하는 자주사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② 이러한 자주사상체계는 일단 부정적 대상인 서양이 우세한 물리적 세력으로 밀려올 때 이에 대한 저항력의 근거를 주로 한민족이 걸어온 역사의식에서 찾으려 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의식을 재창조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한민족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자기 역사의식에 대한 자율적 재창조라는, 바로 이 점에서 1860년대의 양이론은 전통 ·보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의 의병과 같은 자주민족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상적 추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양이사상은 서양을 대신해서 일본의 경제 ·군사력이 한반도에 대해 불평등을 강요하는 1870년대에 그것을 물리치기 위한 절화척사사상(絶和斥邪思想)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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