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문왕릉

경주 신문왕릉

[ Tomb of King Sinmun, Gyeongju , 慶州 神文王陵 ]

요약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주 신문왕릉

경주 신문왕릉

지정종목 사적
지정일 1969년 8월 27일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번지
시대 통일신라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크기 보호구역 35,283㎡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사천왕사지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왕릉으로 비정(比定)되어, 1969년에 고분과 주위의 3만 5,283㎡의 면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둥근 모양의 봉토분(封土墳)으로 밑둘레는 92m, 지름은 29.3m, 높이는 7.6m이다. 봉토 밑의 둘레돌에는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납작한 갑석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로·세로 90㎝, 두께 50㎝ 정도의 돌을 삼각형으로 다듬은 44개의 받침돌로 일정한 간격으로 둘레돌을 받쳐서 무덤의 붕괴를 막으려 했다. 이러한 양식은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경주 성덕왕릉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성덕왕릉과는 달리 받침돌 사이의 12지상은 없으며, 무인석과 문인석, 석수 등도 없다. 정남향에 있는 삼각형 받침돌에는 한자로 ‘문(門)’ 자가 새겨져 있고, 동쪽에는 크고 긴 돌을 쌓아서 만든 상석이 있다.

정명왕(政明王)이라고도 불리는 신문왕은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681년 가을 문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삼국통일로 넓어진 영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행정체제와 수취체제를 개편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특히 귀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인 녹읍(祿邑)을 폐지해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달구벌(達句伐, 지금의 대구)로의 천도를 추진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이 692년 음력 7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낭산(狼山) 동쪽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의 낭산 기슭에 있는 경주신문왕릉은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해 신문왕의 왕릉으로 비정되었다. 하지만 실제 이 고분은 낭산의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고분이 신문왕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2)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효소왕이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매장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고분이 망덕사지(望德寺址)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낭산 동쪽에 해당하는 경주시 구황동 황복사지(皇福寺址) 인근의 폐왕릉터를 신문왕의 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참조항목

신라왕릉

역참조항목

신라의 분묘, 월성동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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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동영상

경주 신문왕릉 경주시에 있는 신라 신문왕의 무덤 사적 제181호 경북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신라 제31대 왕인 신문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문왕은 당시 귀족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인 녹읍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수도 천도를 추진했던 왕이다. 봉토분 밑둘레는 92m에 달하며 높이 7.6m, 지름 29.3m의 규모이다. 봉토 밑의 둘레돌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납작한 갑석이 올려져 있다.무덤의 정면인 동쪽 방향에는 크고 긴 돌을 쌓아서 만든 상석이 위치하며 정남향에 있는 삼각형 받침돌에는 門(문)이라고 쓰인 한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