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위자야 왕국

스리위자야 왕국

[ Srivijaya Kingdom ]

요약 2~13세기동안 말레이반도 남부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자바섬을 거점으로 발전한 고대 해상왕국.
동남아시아 지역의 왕조 변천

동남아시아 지역의 왕조 변천

산스크리트어로 스리(sri)는 “빛나는”이라는 뜻이고, 비자야(vijaya)는 “승리” 또는 “최고”를 의미한다. 스리위자야 왕국이 정확히 언제 건국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3-5세기경 왕국이 존재했다는 문헌이 발견되었고, 1400년경에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18년 프랑스 역사학자인 세데스(George Ceedes)가 스리위자야왕국이 직접 존재했다고 주장했고, 이후 팔렘방을 중심으로 왕국이 융성했다는 추측이 객관성을 얻게 되었다. 1992-93년경 스리위자야왕국의 중심이 현재 수마트라 남부 지역에 존재했다는 가설이 입증되었다.

수마트라 남부에서 출토된 부깃 비문에는 스리위자야왕국은 다푼타 향 스리 자야나사(Dapunta Hyang Sri Jayanasa)가 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현재의 미낭까바우에서 팔렘방, 잠비, 벵껄루 지역으로 이주하여 왕국을 건국하였다고 적혀있다. 이 시기가 7세기 경이므로 스리위자야왕국이 2세기경에 건국되었다는 설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 하더라도 스리위자야왕국은 작은 해안 도시에 불과했을 것이다.

왕국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도시 국가로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단기간에는 영토 확장이 이뤄지지 않았다. 500년경부터 현재 인도네시아의 팔렘방, 수마트라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수도는 현재의 팔렘방으로 삼았다. 수도 이북지역은 중국 상인들이 무역을 할 수 있게 해 두었고, 수도는 왕에 의해 직접 통치되었다. 왕족들은 중부 자바의 사일렌드라왕국과의 혼혈을 통해 동맹관계를 구축했다.

7세기경 중국 문헌에 두 명의 스마트라 왕국 사람과 세 명의 스리위자야 왕국 사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들은 공히 불교도들이며 중부 자바를 거점으로 하고 있고, 혈통적으로 사일렌드라 출신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스리위자야왕국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고, 또한 두 왕국간의 동맹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같은 시기 현재의 베트남과 캄보디아 남부에 집중적으로 거주한 참(Cham)족들이 해상 무역도시를 성립시켜 수마트라와 자바에 몰려있던 상인들을 흡수함에 따라 스리위자야는 이 지역을 자주 공격했고, 8세기 초반에는 현재의 메콩강 유역에 자리 잡은 참파왕국의 수도인 인드라푸라를 일시적으로 지배하기도 했다. 크메르왕국을 건국한 자야바르만 2세가 볼모로 잡혀 스리위자야왕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3대 왕인 사마라퉁가(Samaratungga, 재위 792-835)는 영토확장보다 자바섬에서 스리위자야왕국의 영향력을 굳히는데 주력했다. 세계 3대 불교유적지인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이 사마라퉁가 재위시기인 825년 완성되어 명실 공히 힌두불교국가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9세기부터 11세기 초반까지 스리위자야는 황금기를 맞는다. 수마트라섬에 있었던 잠비왕국을 합병하고 당나라가 스리위자야를 인정, 양국의 조공관계가 성림됨으로써 스리위자야왕국은 해상무역의 거점 국가로 발전했다.

1025년 인도 촐라 왕국의 왕이 현재 말레이시아의 끄다(Kedah)지역을 일시 점령한 후 스리위자야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촐라 왕국은 20년간 이 지역에 대한 약탈과 군사적 공격을 일삼았고, 스리위자야도 해상 무역에서 농업으로 경제구조를 전환하면서 왕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070-1090년 사이 스리위자야는 2-3회에 걸쳐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는데 이 사신이 두 개의 도시를 두고 수도를 주기적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로 스리위자야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혼란 상황에 빠져 있었다.

스리위자야 왕국 본문 이미지 1
말라카(말라카 왕국)참파스리위자야 왕조파간 왕조(바간 왕조)대월마자파힛 왕조수코타이왕조고려원수코타이왕조

13세기 후반 자바섬을 거점으로 마자파힛 왕국이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영토적으로도 스리위자야는 축소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슬람 상인들과 인도인들이 도래하면서 이슬람교를 전파시켰다. 기존의 힌두불교 세계관이 삽시간에 붕괴되어 신권사상에 기초한 왕국의 정당성이 훼손되었다. 결국 스리위자야 왕국은 크메르 왕국과 태국의 수코타이 왕국의 조공국으로 전락하였고, 1402년 파라메스와라 왕자를 끝으로 스리위자야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