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참
[ 水站 ]
- 요약
조선시대 내륙지방의 하천망을 이용한 세곡의 운송을 위해 설치한 역참.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이 좌수참으로, 황해도 배천의 금곡창(金谷倉)이 우수참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세조 때 충주에 가흥창 건물을 세우고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의 곡식을 운송하도록 하였으나,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고 산간지역의 전세 수납도 쌀이나 포 대신 돈으로 납부하게 되면서 현물 수송의 양은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순조 때는 세곡 운송에 사용되는 수참선(水站船)의 숫자도 16척으로 줄이고 충주·음성·진천·연풍·청안·괴산 등 충청도 6개읍의 세곡만을 운송하게 하였다.
수운판관(水運判官)이라는 전임 직책을 따로 두어 운송을 주관하게 하다가 정조 때 이를 폐지하고 충주목사가 도차사원(都差使員)의 직책을 맡고 5읍의 수령이 돌아가면서 차사원을 맡아 관리하게 하였다. 가흥창의 세곡운송 기능은 점차 약화되다가 고종 초에는 수참선의 숫자가 14척으로 줄었을 뿐 아니라 운송 대상지역도 충주·음성·청안·괴산 등 4읍으로 줄게 되었다.
황해도 금천의 우수참 역시 해서지방의 곡식 운송을 전담하였으나 운송을 관할하던 대부분의 고을들이 세곡이 아닌 돈으로 상납하게 되고 평산(平山)은 민간선박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수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 《속대전》(1746)에 이르러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