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성씨

[ 姓氏 ]

요약 사람의 혈족(血族)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칭호.

성씨(姓氏)는 혈족(血族)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 앞에 붙이는 표지(標識)로, 성(姓)은 혈족(血族)을 나타내며, 씨(氏)는 그 성(姓)의 계통을 표시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성(姓)과 씨(姓)의 구분이 없어져 성씨(姓氏)가 성(姓)을 높여서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초기 발생 단계에서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된 개념이었다.

한국의 성씨(姓氏) 제도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중국에서는 성(姓)이 먼저 나타나고, 뒤에 씨(氏)의 구별이 나타났다. 성(姓)은 ‘여자[女]가 낳은[生] 자녀들’이라는 글자의 의미처럼 모계 씨족사회에서 동일한 모계(母系) 혈족(血族)을 구분하기 위해 나타났다. 때문에 ‘희(姬)’, ‘사(姒)’, ‘강(姜)’, ‘영(嬴)’ 등 초기의 성(姓)들에는 ‘계집 녀(女)’ 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성(姓)은 부계사회(父系社會)로 바뀌면서 부계(父系)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종족(宗族)에 따라 자신들의 거지나 숭배물 등을 성(姓)으로 삼기도 하였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족(宗族)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姓)에서 갈라진 지파(支派)는 새로운 거주지나 조의 이름 등을 따서 자신들을 구별할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의 성(姓)에서 갈라진 계통의 구별을 나타내는 칭호를 씨(氏)라고 한다.

이러한 성(姓)과 씨(氏)의 구별은 하(夏), 상(商), 주(周) 3대(三代)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BC 221)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귀족들은 분봉(分封) 받은 국읍(國邑)의 지명(地名)이나 관직(官職), 조상의 자(字)나 시호(諡號), 작위(爵位), 거처(居處) 등을 씨(氏)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부자(父子) 사이에도 성(姓)은 같지만 씨(氏)가 다른 경우가 생겼고, 성(姓)이 다른데도 씨(氏)는 같은 경우도 나타났다. 그래서 성(姓)이 같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고, 씨(氏)가 같아도 성(姓)이 다르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소(離騷)’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전국시대 말기 초(楚)의 문인(文人) 굴원(屈原)은 초(楚) 무왕(武王) 웅통(熊通)의 아들 굴하(屈瑕, ? ~ BC 699)의 후손으로 굴(屈)은 씨(氏)이고, 성(姓)은 미(羋)이다. 초(楚)의 왕들은 무왕(武王)처럼 대대로 웅씨(熊氏)가 계승했지만, 성(姓)은 마찬가지로 미(羋)였다. 때문에 진(秦, BC 221∼ BC 207) 말기에 항량(項羽)이 서초(西楚)을 세우면서 옹립한 의제(義帝,?~ BC 206)의 이름이 기록에 따라 미심(芈心)이나 웅심(熊心)으로 달리 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러 종법(宗法) 제도가 무너지면서 성씨(姓氏) 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종족(宗族)의 유대와 연결 관계가 약해지면서 씨(氏)가 성(姓)처럼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시대 이후에는 평민(平民)의 지위가 상승해 그들도 성(姓)을 지니기 시작했다. 결국 진(秦), 한(漢) 시대 이후에는 성(姓)과 씨(氏)의 구별이 점차 사라져 하나의 의미로 쓰였으며, 백성(百姓)이 민중(民衆)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참조항목

종법, 혈족

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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