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

[ Saitō Makoto , 齋藤實(재등실) ]

요약 일본의 군인. 일본 해군대장 출신이며 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원어명 さいとう まこと
출생-사망 1858.11.13 ~ 1936.2.26
국적 일본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일본 이와테현[岩手縣]

이와테현[岩手縣]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나 1877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1906년 해군대신으로 취임한 후, 1912년 해군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14년 일본 내각과 해군의 수뇌부가들이 군수업체로 부터 뇌물을 받은 독직(瀆職)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당시 일본 야마모토 내각의 실각과 함께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1919년 조선총독에 취임하면서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하였다. 

당시 3.1운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이 심각하게 전개되자 기존의 한반도 통치방법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술수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헌병을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을 뿐 오히려 군병력을 증가하였으며, 이 기간을 이용하여 많은 지식인을 변절하게 하였고, 위장된 자치론을 이용하여 독립운동 방향에 혼선을 빚게 하였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취임하여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할 때 한국의 독립운동가 강우규(姜宇奎)의 폭탄 공격을 받았지만 목숨을 보존했다.

1927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해군군축회의에 일본의 전권위원으로 참석하였고, 귀국 후 조선총독을 사임하고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다. 1925년 자작(子爵)이 서훈되고, 1929∼1931년 재차 조선총독에 취임하였다가 1932년 거국일치 내각을 조직하여 수상에 취임, 만주국 승인·국제연맹 탈퇴·농촌 구제사업 등을 통하여 비상시국의 진정을 도모하였으나, 1934년 ‘데이진사건[帝人事件]’으로 내각총사직을 단행하였다. 1935년 재차 내대신(内大臣)으로 취임했으나 1936년 군부의 급진파 청년장교들에게 친영미파(親英美派)의 중신으로 지목되어 ‘2·26 사건’ 때 암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