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원

분원

[ 分院 ]

요약 조선시대 사옹원(司饔院)의 관영사기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

본래 관어용(官御用) 도자기는 전국에 있는 자기소(瓷器所)와 도기소에서 만들어 세공(歲貢) ·별공(別貢)으로 올라오는 토산공물(土産貢物)로 충당되었으나, 15세기 후반부터는 상품(上品) 자기의 토산공물 산지인 경기도 광주에 이를 세워 사옹원 밑에 두고, 봉사(奉事:종8품)를 두어 관과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도자기를 직접 충당하게 하였다. 고려시대 사옹원에서 매년 사람을 각도(各道)에 보내어 왕실에서 쓰는 어용자기(御用瓷器)를 감시 ·조사하는데, 이때 사리(私利)를 취하는 사람이 많아서 왕도(王都)까지 진상하는 수량이 대폭 줄어 그 폐단이 컸다고 하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사옹원에서 왕실용 어용자기를 관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옹원은 임금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과 기타 대궐 안에서의 음식 제공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기 때문에, 거기에 쓰이는 어용 및 궁중용 그릇을 만드는 일도 관할하였다. 이런 관영사기제조장은 설치할 때부터 사옹원에서 직접 맡아보았는데, 뒤에 사기 수요량이 늘어나면서 그 만드는 일이 더욱 중요해지자, 제조장이 있는 현지에서 직접 작업과정을 관할하는 관청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바로 이것이 사옹원의 분원이다. 이 이름은 1796년(정조 20)에 사원(司院:사옹원)은 분사(分司)를 광주에 설치하여 자기를 굽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옹원의 분사인 분사옹원(分司甕院)을 줄여서 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분원은 사기를 만드는 과정에 필요한 연료를 충당하기 위해 나무가 많이 자란 장소를 찾아 옮겨다녀야 했는데, 이를 위해 경기도 광주 일대 6개면에 분원시장절수처(分院柴場折受處)라 하는 일정한 산지를 국가로부터 지급받아 나무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 말까지 분원에 딸린 분원시장 6개는 퇴촌면 ·실촌면 ·초월면 ·도척면 ·경안면 ·오포면 등이다. 그런데 이 시장 일대가 분원의 연료채취 뒤에는 다시 번목(燔木)이 되지 못하고 화전으로 개간되면서 시장이 줄어들고, 따라서 연료 부족현상이 생기게 되자 17세기 말경에는 분원고정론이라 하여 분원을 교통이 편리한 곳에 고정해두고 반대로 번목을 옮겨 쓰면서 시장 안의 화전민들로부터 세를 거두어 번목을 충당하는 데 쓰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고, 이에 따라 18세기 전반에는 아예 교통이 편리한 경안천(慶安川:牛川) 강변인 지금의 경기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정도에 분원을 고정시켜두고 반대로 번목을 옮겨 쓰기에 이르렀다.

분원의 사기제조는 대개 얼음이 풀리는 때부터 다시 얼음이 얼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정규적으로 진상해야 하는 사기는 왕궁에서 쓰는 보통 그릇과 봉상시(奉常寺)에서 쓰는 제기(祭器), 그리고 내의원(內醫院)에서 쓰는 약그릇 등이며 이외에 왕가에 경사가 있을 때 쓰는 특수사기가 있었다. 1년 동안 만들어낸 사기의 양은 일정하지 않았으나, 별번(別燔) 이외에 예번(例燔)인 경우 《육전조례》에 따르면 1,372죽이었다.

한편, 광주지방은 분원이 15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경영된 한국 최대의 요지군(窯址群)인데, 지금 남종면 분원리에 남아 있는 분원리 도요지(陶窯址)는 광주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이 광주분원에서 만든 분원사기는 백자(白瓷), 양부(梁付)와 유리유(琉璃釉), 양부와 철사(鐵砂)의 2채(二彩), 양부와 철사, 진사(辰砂)의 3채(三彩) 등이 있으며, 또 분원에는 사옹원관선정비(司甕院官善政碑)가 있다. 이곳에서 자기를 만든 사기장(沙器匠)은 380명 정도였는데, 이들 장인은 자기제조를 위해 분원 주위에 따로 1개 촌락을 형성하여 살았으며, 그 자손들이 대를 이어 그 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분원에서의 사기 제조는 17세기 후반부터 공장(工匠)의 생계를 보조하는 의미에서 사경영을 허용하였는데, 이것이 점차 늘어나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여기에 상인자본이 개입하기에 이르며, 19세기에는 그 규모가 더욱 늘어 1884년(고종 21)에는 결국 상업자본가에 의해 민영화(民營化)로 바뀌게 되나, 1910년 이후로 점차 쇠퇴하였다.

역참조항목

, 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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