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

벼루

요약 먹을 가는 문방구.
바이오딩산 벼루

바이오딩산 벼루

간다는 뜻에서 '硏'자를 동의자로 쓴다. 대개는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 도연(陶硯)도 있고 옥·유리·비취·수정 등 보석류라든가 금·은·동·철·목(木)·죽(竹) 등으로도 만든다. 형태는 직사각형·사각형·원형·타원형·풍자(風字)형 등이 있다. 물론 다른 의장(意匠)으로 만들어진 것도 더러 있다. 을 가는 부분을 연당(硯堂), 또는 묵도(墨道)라 하고 갈려진 먹물, 즉, 묵즙이 모이도록 된 오목한 곳을 연지(硯池), 또는 연홍(硯泓), 연해(硯海)라 한다.

벼루가 구비하여야 할 첫째 조건으로는 먹이 잘 갈리고 고유의 묵색이 잘 나타나야 한다. 연당의 표면에는 숫돌과 같은 꺼끌꺼끌한 미세한 봉망(鋒芒)이 있어 여기에 물을 붓고 먹을 마찰시킴으로써 먹물이 생긴다. 따라서 봉망의 강도가 알맞아야 한다. 봉망이 약하면 먹이 잘 갈리지 않고 반대로 강하기만 하면 잘 갈리기는 하나 먹빛이 좋지 않다. 그래서 벼루는 실용의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재질의 것을 첫째 요건으로 하지만 구석기시대부터 중국인의 돌에 대한 강한 애착은 벼룻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다만 먹을 가는 도구라는 차원을 넘어 돌의 빛깔이라든가 무늬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나아가 연면(硯面)을 고도의 미적 의장으로 조각 장식하여 문방사우의 하나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소중히 여겨왔다.

중국의 벼루

전한시대(前漢時代:BC 202∼AD 8)의 벼루는 낙랑의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길이 약 21.8 cm, 가로 약 10.3 cm의 두껍지 않은 직사각형의 점판암으로 되어 있었고, 이것 외에 따로 지름 약 2.5 cm 크기의 석제 ·실린더라 할 수 있는 마묵구(磨墨具)가 곁들어 있었다. 벼룻돌에 먹가루를 놓고 교착제를 섞어 이 작은 숫돌과 같은 마묵구로 갈아서 묵즙을 얻었을 것으로 본다.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에는 먹이 분말에 아교질을 섞은 묵환(墨丸)으로 개발되어 이것을 갈기 위하여 원형의 석판 밑에 3개의 발을 만든 널빤지를 받친 벼루가 만들어졌다. 허베이성[河北省] 왕두[望都]에 있는 후한시대 분묘의 벽화에 그 그림이 보이고 잔결(殘缺)된 실물이 낙랑에서 출토되었다. 육조시대(3~7세기)나 당시대(7~9세기)에는 주로 도연(陶硯)이 만들어졌으며 형태는 앞 부분이 둥글고 좁으며 뒤는 넓게 퍼져 풍(風)자를 닮은 꼴이어서 풍자연이라고 불리었다. 또 둥근 모양의 발이 달린 도연과 백자연도 있었다. 당나라 전성기에는 흡주석이 채굴되고 당나라 말기에 단계(端溪)의 연석갱(硯石坑)이 발견되면서부터는 점차로 석연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도하녹석(洮河綠石)은 송(宋) 이전에 이미 간쑤[甘肅]에서 채굴되었으나 송대에 이르러 석맥(石脈)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은 드물고 따라서 매우 고가이다.

송대(10∼13세기)에는 단계의 난가산(爛柯山)에서 양질의 석재가 채취되어 문인들에게 애호되면서 갑자기 연재의 으뜸으로 꼽혔다. 송대에 채취된 연석은 송단계라 불리며 지금도 귀하게 여겨진다. 진(秦) ·한(漢)의 고와당(古瓦當)을 가공하여 벼루로 만들었다든가 벼루의 둘레에 문자나 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청조(淸朝) 건륭시대(乾隆時代:18세기)에는 벼루의 형식이 대단히 복잡하여지고 의장이 섬세 ·교묘하여 화려한 것이 특징이었다.

흡주석(歙州石)은 안후이성[安徽省] 서셴[歙縣] 용미산(龍尾山)·나문산(羅紋山) 일대에서 산출되기 때문에 용미연이라고도 한다. 석질은 점판암으로서 빛깔은 청흑색·청색·황색 등 여러 색이 있으며 청흑색의 것에는 용미연과 그물 같은 무늬가 있는 나문연이 있다. 이 밖에도 대모석(玳瑁石)·미자석(眉子石) 등이 산출되며 어느 것이나 알맞게 단단한 봉망이 밀립하여 발묵(潑墨)이 매우 좋아 옛부터 단계석과 더불어 귀중히 여겨진다.

단계석(端溪石)은 광둥성[廣東省] 가오야오현[高要縣]의 난가산(爛柯山)의 계곡에서 산출된다. 당나라 때부터 채굴되었으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 더욱 문인들이 애호하였다. 암질은 휘록응회암, 빛깔은 자색·저간(猪肝)색·청색·흑색·녹색 등이 있으나 자색과 저간색이 많다. 단계석(端溪石)의 특질은 다른 돌에 비하여 봉망의 단단하기가 먹을 가는 데에 적당하여 온(溫)·윤(潤)·유(柔)·눈(嫩)·세(細)·니(膩)·결(潔)·미(美) 등 팔덕(八德)을 갖추어 벼루로서의 기능 이외에 감상의 대상으로도 진중된다.

징니연(澄泥硯)은 강물 속에 침전된 고운 진흙을 정선하여 틀에 넣어 굳혀서 구워낸 인조연이다. 당나라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돌보다도 오히려 견고하고 봉망이 밀립하여 발묵이매우 잘 된다.

한국의 벼루

낙랑출토의 연이 가장 오래 된 것이나 이것은 한인(漢人)의 작품이요 삼국시대 내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연 몇 점이 출토되어 그 중 가장 우수한 제품인 원형다족연(圓形多足硯)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석연산지의 분포를 보면 압록강변의 위원석(渭原石), 장산곶돌의 해주연(海州硯), 보령(保寧)의 남포석(藍浦石)이 대종을 이루고 장단(長湍)·울산(蔚山)·단양(丹陽)·안동(安東)·정선(旌善)·언양(彦陽) 등지에서 연재가 산출되고 있다.

이 중에서 양적으로는 남포석이, 질적으로는 위원의 화초석(花草石)을 높이 쳐 위원단계(渭原端溪)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이다.

일본의 벼루

연재로서 양질의 돌이 별로 없으며 주요한 연석으로는 다카시마[高島]·다카다[高田]·나지[那智]·아카마[赤間]·아메바타[雨畑] 등을 좋은 것으로 친다. 일본의 연석은 단계석에 비해 돌이 단단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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