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흥

박자흥

[ 朴自興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정언 ·사서 ·형조참의 등을 거쳐 참판에 올랐고 인조반정 때 경기도관찰사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자결했다.
출생-사망 1581 ~ 1623
본관 밀양
인길(仁吉)
별칭 초명 흥립(興立)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밀양(密陽), 는 인길(仁吉), 초명은 흥립(興立)이다.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승종(承宗)의 아들이며, 이이첨(李爾瞻)의 사위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아버지와 장인이 시관(試官)이어서 물의를 빚었다. 이듬해 설서(說書)가 되었고, 딸이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된 뒤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정언(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사인(舍人)·동부승지(同副承旨)·승지(承旨)·형조참의(刑曹參議)·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형조참판(刑曹參判)·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1622년(광해군 14) 경기감사(京畿監司)가 되었다.

1623년 경기감사 재임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부자가 함께 자결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따르면, 성정이 사납고 드센 인물로서 이이첨의 간교함을 미워하여 반목하였으며, 딸이 세자빈이 된 뒤로는 권세를 빙자하여 기세를 부리고 전민(田民)을 널리 점유하여 저택을 크게 화려하게 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참조항목

박승종, 이이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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