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릉비

문무왕릉비

[ 文武王陵碑 ]

요약 신라 문무왕의 능비.

최대 높이 52cm. 너비 64cm. 두께 24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682년(신문왕 2)에 건립되었으나, 언젠가부터 비가 부서진 것으로 전해진다. 1796년(정조 20) 비석 조각 2개가 처음 발견되었다가 분실되었는데,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그 가운데 1개가 다시 발견되었다. 2009년 9월에는 경주시 동부동 다른 주택에서 비의 윗부분 조각이 발견되었다.

청나라의 유희해(柳喜海)가 1796년에 발견된 비석 조각의 탁본 네 장을 입수하여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었으므로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글자는 적갈색 화성암(火成岩)의 앞뒷면에 가로 3.2cm, 세로 3.3cm의 크기로 네모칸[井間]을 긋고 그 안에 2cm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국학(國學) 소경(少卿:차관)인 김□□(□□는 마멸되어 안 보이는 글자)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고, 글씨는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구양순체의 해서로 썼다.

비가 깨어지고 마멸된 부분이 많아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 왕실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업적, 신라의 백제 평정 사실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죽음과 유언, 문무왕에 대한 찬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특히 김씨의 시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 하고 문무왕의 15대조라고 함으로써, 당시 신라 왕실 계보와 조상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비의 성격을 왕릉에 세운 능비로 보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무덤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그 재를 동해에 뿌렸다는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 이 때문에 문무왕과 사천왕사(四天王寺)의 밀접한 관계를 들어 절 안에 능비만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비문 내용상 죽은 이의 덕을 기리고 있고 명(銘)이 있는 점 등을 들어 묘지(墓誌)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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