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서예

삼국시대의 서예

삼국시대의 서예를 살펴보면 먼저 고구려의 경우, 유물로는 전문(塼文) ·석각(石刻) ·명(墓誌銘) 등이 있고 또 유명한 광개토경평왕호태왕비(廣開土境平王好太王碑)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부근, 즉 [吉林省] 퉁거우[通溝]에 남아 있다. 이것은 높이 약 7m, 너비 약 2m나 되는 거대한 으로, 4면에 모두 가 새겨졌으며 고구려 영군(英君)의 훈적을 기록한 것으로 서체는 파세가 없는 고예(古隷)로서 특이하며 호탕 ·웅대하여 동양 서예사상 중요하다.

백제의 경우, 광복 후 부여에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가 발견되었고, 1972년에는 공주의 (武寧王陵)에서 최고의 지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불상명(佛像銘) 등 단편적인 것밖에 없었다.

신라의 경우, 통일 이전의 것으로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창녕비(昌寧碑) ·황초령비(黃草嶺碑) ·마운령비(磨雲嶺碑) ·북한산비(北漢山碑)와 1982년에 발견된 충원비(忠原碑)가 있다. 모두 북조풍의 로 고졸(古拙) 청경(淸勁)하여 신라적인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서체는 그 당시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의 서풍 가운데 해서는 주로 법이, 는 법이 신라 ·고려 두 나라의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따라서 통일 초기의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김인문묘비(金仁問墓碑)와 화엄사석경(華嚴寺石經) ·사천왕사비 등이 모두 구법으로 앞의 두 비는 쓴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매우 뛰어난 글씨로 방정고아(方正高雅)하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흰 종이에 먹으로 쓴 사경(寫經)으로 한국 사경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김생(金生)은 각체를 모두 잘 썼다고 하며 고려 때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있지만 진적(眞蹟)이 없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이 비만을 볼 때 왕희지의 아류(亞流)로서 과대평가되었다고 하겠다. 석영업(釋靈業)의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도 왕희지풍으로 주경(遒  勁)하고 아름답다.

문장으로 유명한 (崔致遠)의 쌍계사진감국사비(雙磎寺眞鑑國師碑)는 구양 통과 흡사한 풍골을 지니고 있는 글씨이나 그의 문명(文名)을 따르지 못하였다. 김원(金薳  ) ·김언경(金彦卿) ·최인곤(崔仁滾) 등은 좋은 글씨를 쓴 서가들이다. 성주사사적비는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매우 방정하고 고아하여 뛰어난 작품으로 최일류이다. 이채로운 것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비로 무장사비(鍪  藏寺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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