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모리스

윌리엄 모리스

[ William Morris ]

요약 영국 출신의 화가이자 공예가(工藝家), 건축가, 시인, 정치가, 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진정한 노동의 즐거움을 예찬하였다. 처음으로 ‘장식예술’이라는 강연을 하고, 또 고대건축보존협회를 설립하는 등 사회 활동도 벌였다. 시(詩) 작품에는《제이슨의 생애와 죽음》,《지상의 낙원》등이 있다.
출생-사망 1834.3.24 ~ 1896.10.3
국적 영국
활동분야 디자인, 문학, 공예, 건축
출생지 영국 에식스주(州)
주요작품 《제이슨의 생애와 죽음》(1867) 《지상의 낙원》(1868∼1870) 등
주요업적 생활미술 디자인의 창시

1834년 영국 에식스주(州) 월덤스토우(Walthemstow)에서 출생하였다. 모리스의 아버지는 런던에서 증권중계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재력가였으며 월덤스토우의 전원 숲속에 엘름하우스(Elm House)라는 대저택을 지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모리스는 1848년 말보로 칼리지(Marlborough college)를 입학했지만 교내 폭동에 가담하여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위해 옥스퍼드대학 엑세터(Exeter) 칼리지(1853∼1855)에서 공부하였다. 여기서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Coley Burne Jones)를 만나 평생을 함께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당시 엑세터 칼리지의 교육에 실망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특히 고딕 건축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모리스는 친구들과 함께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사상에 접했으며, 당시 영국이 직면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예술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참다운 노동은 반드시 즐거움이 동반되는 것이어야만 하고 그런 자발적이고 즐거운 노동의 시대가 중세 고딕(Gothic)시대라고 생각했다. 모리스는 고딕건축물이 가진 아름다움에 열광했는데 그 때문에 자신의 인생도 건축가가 되려고 계획하였다. 프랑스 북부지역을 여행하면서 중세시대 고건축물을 답사하였고 특히, 루앙(Rouen)의 대성당 고건축물 스테인드글라스와 문양 등을 스케치하고 그것들의 디자인을 수집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대건축 전문가였던 조지 에드먼드 스트리트(George Edmund Street)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건축공부를 하였다(1856). 그리고 그해 옥스포드 캠브리지 잡지(Oxford Cambridge Mazine)를 창간하였다. 화가의 길을 걷던 친구 번 존스의 스승이었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를 만나면서 회화에도 관심을 가졌고 건축공부와 함께 병행하였다. 하지만 로세티의 조언에 따라 건축을 포기하고 회화로 방향을 바꾸었고 자연을 미술의 대상으로 하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때 공부한 건축에 대한 관심이 중세건축물을 보호하고 형식적 복구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어 건축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1850년대 말에는 회화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생활미술에도 관심영역을 확대하였고 직접 가구를 디자인하고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가 디자인한 가구는 중세적인 간결함을 가진 것이었다. 이 때 자신의 그림 모델이었던 제인 버든(Jane Burden)을 만났으며 1859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자신의 건축적인 이상을 담은 레드하우스(Red House)를 지어 이사했다. 하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아내와 로세티의 불륜으로 평생동안 그를 괴롭혔다. 레드하우스는 중세풍의 붉은 벽돌 외관에 간결한 구조로 당시로는 파격적인 형태의 건물이었으며 현대 건축디자인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861년 친구들과 모리스-마샬-포크너 회사(Morris, Marshall and Faulkner Company)를 설립, 벽면장식으로부터 스테인드글라스 ·가구 ·금장(金匠)에 이르는 모든 실내장식 미술을 다루게 되었는데 현대 디자인의 효시가 되는 회사가 되었다. 1875년부터는 모리스가 단독으로 경영하게 되어, 모리스회사로 개칭하였다. 1877년 처음으로 ‘장식예술’이라는 강연을 하고, 또 고대건축보존협회를 설립하는 등, 사회활동도 벌였다. 모리스는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경험한 신분의 구분이 없는 평등사회와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대학살을 방관하는 영국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영국 자유당원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의회에 실망을 거듭하여 진보적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노동자계급 민주연맹(Democratic Federation)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인 순회강연회를 펼쳤으며 사회주의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1887년 11월 런던 트라팔가르광장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사회주의 운동의 무력감을 느끼고 정치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는 시인으로서도 이미 《제이슨의 생애와 죽음》(1867) 《지상의 낙원》(1868∼1870) 등으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문학에서의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경향은 공예가로서의 모리스의 중세 예찬과 교착하면서, 점차 19세기 문명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계문명의 해독을 입고 노동의 기쁨을 상실한 시대의 변혁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의 문예작품으로는 《유토피아 소식》(1890)이 있다. 공예 방면의 일도 여러 영역에 걸쳐서 계속되었다. 그의 일 자체가 새로운 공예의 길을 개척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1880년대에 들어 모리스의 영향으로 각종 공예디자인 조직이 형성되어, 근대 디자인 운동의 발단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움직임을 ‘아츠 앤드 크라프츠 운동’이라고 하며 그가 설립한 모리스 디자인회사는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모리스의 정치활동 중 고건축물 보호운동은 가장 성공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고건축물이 비록 낡았지만 역사적 전통을 간직한 건축물로 보호되어야 하며 외관만 유사한 형태로 복구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고건축물보호협회(The Society of Protecting Ancient Building:SPAB)가 조직되었다. 만년에는 해머스미스에 켈름스콧 프레스를 설립(1890), 인쇄 ·제본사업에 몰두하였다. 여기서는 켈름스콧판(版) 초서로 알려진 《캔터베리 이야기》 등이 인쇄되었다. 1896년 10월 3일 지병이 중풍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