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레핀

일리야 레핀

[ Ilya Yefimovich Repin ]

요약 러시아의 화가.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이라 불린다. 중량감 있는 구성과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화면 속에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담았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내면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그의 작품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러시아 회화사 전체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출생-사망 1844.8.5 ~ 1930.9.29
본명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Ilya Yefimovich Repin)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러시아 추구예프(현재 우크라이나)
주요수상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금상 수상
주요저서 《예술에 관한 서신》(1893~1894)
주요작품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1870~1873),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No One Waited for Him》(1884~1888), 《톨스토이의 초상 Portrait of Leo Tolstoy》(1887), 《튀르키예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지에 카자크들 The Zaporozhye Cossacks Writing a Letter to the Turkish Sultan》(1880~1891)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은 1844년 러시아의 추구예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는 15세 때 고향 추구예프의 이콘 화가 부나예프(Bunakov)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19세 되던 18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예술장려협회의 미술학교에서 데생 교육을 받았다. 이듬해인 1864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의 평생의 스승인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를 만났다. 크람스코이는 이동파를 이끈 지도자이자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가로 그는 레핀에게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각인시켰다.

레핀은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졸업 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레핀은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유학을 미룬 채 이 장면을 그리는 데 매달렸다. 3년 뒤에 탄생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각각의 인물 속에 개성 넘치는 성격과 다양한 삶의 흔적, 강인함과 절망, 비극적인 러시아의 상황을 담아낸 수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레핀은 1873년 5월 유럽으로 향했다. 비엔나, 베니스, 로마를 방문한 그는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1874년 파리에서는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레핀은 인상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예술의 흐름과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옹호했다.

레핀은 1876년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여 《성직자》, 《황녀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등 러시아적 가치와 전통에 바탕을 둔 작품을 발표했다. 1877년 추구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온 레핀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의 영지 아브람체보를 자주 방문했다. 이곳에는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Petrovich Mussorgsky),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 등 예술가 및 재력 있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레핀은 이념적으로 자유로웠던 아브람체보의 분위기를 즐겼고, 이 모임의 가장 활동적인 회원이 되었다.

18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옮긴 레핀은 이동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이동파는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 도시로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러시아 사회를 통찰력 있게 묘사한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은 이후 러시아 미술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핀은 이 시기에 혁명을 주제로 한 역동적인 삶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삶 속에 내재된 다양한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유형지에서 고향의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간의 긴장된 심리 상황이 날카롭게 포착되어 있다.

레핀은 초상화의 대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80년대부터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고골(Nikolai Gogol) 등을 비롯한 문학가,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ii-Korsakov) 등의 음악가, 스타소프(Vladimir Stasov) 같은 예술 비평가, 그밖에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레핀은 모델의 특징적인 포즈와 몸동작, 행동 등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지닌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에 탁월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았다. 레핀의 마지막 대작이 된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핀은 오른손 관절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왼손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이전의 명성에 걸맞는 작품에는 미치지 못했다. 레핀은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다. 그리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레핀이 거주하던 쿠오칼라 마을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1948년 레핀의 이름을 따 ‘레피노’로 개칭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Barge Haulers on the Volga》(1870~1873), 《무소륵스키의 초상 Portrait of Modest Mussorgsky》(1881),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Religious Procession in the Province of Kursk》(1881~1883),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No One Waited for Him》(1884~1888), 《톨스토이의 초상 Portrait of Leo Tolstoy》(1887), 《튀르키예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지에 카자크들 The Zaporozhye Cossacks Writing a Letter to the Turkish Sultan》(1880~1891), 《숲에서 책을 읽고 있는 톨스토이 Tolstoy Reading in the Forest》(1891),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 Ceremonial Meeting of the State Council on May 7, 1901》(190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