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하우스사건

라이하우스사건

[ Rye House Plot ]

요약 1683년 영국에서 일어난 국왕 암살 미수사건으로 휘그당(Whigs) 의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져왔다.
언제 1683년 4월
어디서 영국의 하트퍼드셔의 라이 하우스
누가 휘그당의 과격분자와 청교도혁명 때의 크롬웰파의 잔당들
무엇을 국왕 찰스 2세와 왕제(王弟) 요크공(公) 제임스에 대한 암살미수
어떻게 몬머스공을 추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1683년 영국에서 휘그파(Whigs)의 인물들이 국왕 찰스 2세(Charles II, 재위 1660~1685)와 그의 동생인 요크공 제임스(James, Duke of York. 뒷날의 제임스 2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휘그파의 인물들이 리차드 럼볼드(Richard Rumbold, 1622∼1685)가 소유했던 하트퍼드셔(Hertfordshire)의 허드스턴(Hoddesdon)에 위치한 라이하우스(Rye House)라는 주택에서 암살을 계획했다고 해서 이러한 명칭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교도인 요크공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던 휘그파에 대해 대대적으로 탄압이 이루어져, 그가 1685년에 순조롭게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 휘그파의 인물들이 암살 계획을 세웠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분명하지 않아 사건 자체가 국왕이나 토리파(Tories)에서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가톨릭과 제임스 2세(James II, 재위 1685~1688)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져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1660년 영국에서는 왕정 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2세(Charles II)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가톨릭과 프랑스에 기울어진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정책들은 시민들의 불만을 낳았다. 더구나 왕위를 계승할 적자(嫡子)가 없는 상황에서 차기 왕위 계승이 유력한 요크공 제임스는 1673년 의회가 제정한 심사령에 따른 반(反) 가톨릭 서약을 거부하여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공공연하게 밝혔을 뿐 아니라, 그 해 첫 부인이 죽자 가톨릭교도인 모데나의 메리(Mary of Modena, 1658~1718)와 재혼하였다. 때문에 당시 영국 사회에 퍼져 있던 가톨릭과 절대왕정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1678년에는 가톨릭교도들이 요크공 제임스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찰스 2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가톨릭 음모사건’이 유포되면서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1679년에 새롭게 소집된 의회는 요크공 제임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도록 가톨릭교도는 왕위계승권을 지니지 못한다는 왕위배제법안(Exclusion Bill)을 제출하였다. 의회는 요크공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토리파와 이에 반대하는 휘그파로 갈려 격렬히 대립했지만, 결국 하원은 이듬해 왕위배제법안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하여 이 법안을 무력화시켰고, 3년마다 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3년 회기법’도 무시하고 의회도 소집하지 않았다. 

이처럼 합법적인 수단으로 요크공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막기가 어려워지면서 급진적인 휘그파 안에서는 더 적극적인 행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휘그파의 인물들은 라이하우스에 모여 국왕과 찰스 2세와 요크공 제임스에 대한 암살 음모를 세웠다. 1683년 4월 1일 찰스 2세와 요크공 제임스는 런던을 출발해서 뉴마켓(Newmarket)에 있는 경마장을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휘그파는 경마장에서 돌아오는 국왕을 기습하여 암살하기 위해 100인의 무장집단을 모았다. 하지만 3월 22일 뉴 마켓(Newmarket)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국왕과 요크공 제임스는 일정을 취소하고 예정보다 빨리 던던으로 돌아갔고, 암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그런데 그 해 6월 12일 휘그파가 라이하우스에 모여 국왕과 요크공 제임스에 대한 암살 음모를 하였다는 사실이 밀고되면서 휘그파 지도자와 의원들에 대해 ‘피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이 진행되었다. 조지 제프리(George Jeffreys) 판사는 충분한 증거도 없이 주모자로 지목된 러셀(Williamd Russell)과 시드니(Algernon Sidney) 등을 참수형에 처했고, 수많은 휘그파 의원들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처벌되었다. 프로테스탄트로 휘그파에게 요크공 제임스를 대신해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지를 받았던, 찰스 2세의 서자(庶子) 몬머스공 제임스(James, The Duke of Monmouth, 1649∼1685)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네덜란드 북부의 연합주(United Provinces)로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