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연극

독일연극

[ German theatre , 獨逸演劇 ]

요약 16세기 초부터 현대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연극.

16세기 초 독일에는 다른 유럽 제국(諸國)의 종교극과는 그 기원이나 성격이 다른 일종의 ‘카니발 축제극(Fastnachtsspiel)’이라는 소극(笑劇)에 가까운 것이 있어, 인접국으로부터 본격적인 연극이 소개되기 전까지 이것이 대중을 즐겁게 하였다.

이 소극은 로마의 연극과는 달리 퍽 난폭하고 음란한 직설적인 극이었다. 이 극에서 가장 관객을 즐겁게 해 준 유형적(類型的) 인물은 나르(Narr)라는 등장인물이었는데, 후에 특히 남부지방에서 한스부르스트(Hanswurst)라는 인물로 발전하여 독일적 소극의 영웅으로 인정되었다.

이 카니발 축제극은 주로 아마추어들이 공연하였으며, 시공회당은 물론 시중 광장 같은 곳에서도 공연되었는데, 입장료는 받지 않았으며, 영국의 종교극과 마찬가지로 나중에는 시장의 상인조합에 의해서 공연되었다. 이러한 연극의 대본을 도맡아 쓴 사람이 H.작스(1494∼1576)였는데 그에게는 그의 극작을 이어받을 만한 후계자가 없었다.

독일 연극의 기초는 궁정공연(宮廷公演)에서가 아니라 지방순회공연 극단이 그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이 순회극단은 1650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 배우들의 극단이었다. 혼란기 독일에서의 연극은 주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외국극단이 거의 독점공연을 하였다.

이런 상황은 독일연극의 본격적 형성을 기치로 들고 나온 J.C.고트셰트와 C.노이버가 공동작업을 시작한 1725년경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라이프치히에 거점을 두고 노이베린극단을 조직, 본격적인 연극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 G.E.레싱(1729∼81)이 나타나 독일연극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함부르크 연극론>을 쓰는 한편, 실제로 극작에 손을 대어 《미나 폰 바른헬름》 《현자(賢者) 나탄》 등의 걸작을 썼다.

이때부터 파리나 런던에서의 중앙중심적인 연극에서 탈피하여 탈중앙적(脫中央的)인 연극이 형성되어 오늘날의 독일 연극의 특징을 낳게 하였다. 1967년에서 1987년 사이에 일어났던 이른바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은 독일 연극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 낭만주의 연극의 대가이기도 했던 J.W.괴테와 J.C.F.von 실러도 이 질풍노도파(派)에 속했는데, 괴테는 독일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심리극인 《타소:Torquato Tasso》와 불후의 명작인 《파우스트》 등을 썼다. 뒤이어 실러는 《군도:Die Räuber》를 씀으로써 괴테에 이어 질풍노도파의 선두에 나섰다.

그 후 C.D.그라베(1801∼36)와 G.뷔히너(1813∼37)가 나타나 근대적 의미의 사실주의적 요소를 다분히 내포한 작품을 써서 사실주의 연극의 서곡을 울렸다. 특히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Dantons Tod》과 《보이체크:Woyzek》는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 밖에도 J.P.헤벨은 G.W.F.헤겔의 변증법적 사상을 연극에 적용하여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앙트완의 자유극장에서의 작업에 자극을 받은 O.브람(1856∼1912)은 1889년에 베를린에 자유극장을 세웠다.

또 작센 마이닝겐 후국(侯國)의 통치자인 게오르그 2세는 자신의 극단을 당시의 풍조이던 ‘대배우 위주(star system)’의 연극을 지양하고,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일치된 연기와 종합적 분위기의 조성을 꾀한다는 이른바 앙상블을 강조했다. 이 극단은 유럽 각지를 순회 공연하였는데, 그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브람의 자유극장은 주로 상업극장이 기피하거나 검열에서 항상 문제가 된 작품을 과감히 공연하였는데 마침내는 독일이 낳은 위대한 작가 G.하우프트만(1862∼1946)을 발견, 그가 대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직공:Die:Weber》과 같은 자연주의적 작품을 썼으나, 후에는 《델피의 이피게니아》 등 고전에 바탕을 둔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마테를링크의 상징적 작품은 무대공연방식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의 바그너는 악극론(樂劇論)에서 공연에 상징적 방법을 도입하였다.20세기 독일 연극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뚜렷한 현상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배우들이 배출되어 대중과 밀착된 연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배우 양성의 본거지는 노이베린 극단이었다. 1975년에 고타에 첫 국립 극장이 생겼고, 뒤를 이어 빈과 만하임에도 국립극장이 생겼으며, 1986년에는 후에 독일 연극에 큰 공헌을 한 베를린극장이 건립되었다.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극작가들은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연극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표현주의 연극을 들고 나왔다. 대표적인 극작가로는 E.톨러(1893∼1939)와 G.카이저(1878∼1945)를 들 수 있는데, 표현주의 연극은 M.라인하르트와 E.피스카토르를 거쳐 B.브레히트에 이르러 서사연극(敍事演劇:Episches Theater)으로 발전하였다. 브레히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이 중시했던 감정교류 ·동화작용 ·카타르시스 등에 대하여 반대하고 극에서의 이성(理性) ·판단 ·객관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관객이 극중 사건이나 인물 속에 몰입되는 것을 반대하여 극과의 거리를 지킬 것, 즉 유리작용(遊離作用:Verfremdung)을 내세웠다. 1949년 동 ·서독 분열 후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하에서 브레히트가 계속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헉스와 H.뮐러, 브라운 등에게 변증법적인 연극이 계승되어 참신한 실험극(實驗劇)으로 발전하였다. 서독에서는 P.바이스, R.호흐프트 등이 ‘기록연극(記錄演劇)’이라는 장르로 국제적인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에 들어와 정치적인 좌절감과 내면화 경향이 나타나 그 상실감을 잘 포착한 슈트라우스, 파멸의 세계를 형상화(形象化)하는 베룬하르트의 작품이 곧잘 상연되고 있다. 한마디로 독일연극의 특징은 전통을 파괴하는 혁신 속에 전통이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