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낙산

[ 駱山 ]

요약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 조선시대 한양 성곽이 낙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낙산

낙산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동서(東西)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산으로, 높이는 약 125m이다.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낙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만들어졌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東小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은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낙산에는 낙산의 유방이라고 불렸던 약수터 2곳이 있었는데 각 이화동약수, 신대약수로 불렸다. 신대약수에는 강세황의 글씨인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암각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이 낙산 인근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인평대군이 거처했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고, 그외 이화정(梨花亭), 일옹정(一翁亭), 백림정(柏林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단종과 이별하고 이곳 낙산에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순왕후는 폐서인되어 낙산 아래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고 창신동 골짜기에서 비단에 자색 물을 들여 시장에 내다팔며 살았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 샘물이 있던 곳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암각자가 남아있다. 그리고 고종 때인 1868년에 건립되었으며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三軍府)의 총무당이 있었는데, 1880년에는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이 낙산 아래 위치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萬)의 집인 이화장(梨花莊)이 지금도 남아있다. 사찰로는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청룡사(靑龍寺)가 있고,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창건한 미타사(彌陀寺)가 있다. 미타사는 여승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담진국사에 의해 창건된 보문사(普門寺)가 있다. 근래에는 한 때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지만,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철거되고 성곽이 복원되었으며 낙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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