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싸움

관산성싸움

[ 管山城─ ]

요약 554년(진흥왕 15)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성왕(聖王)이 패사한 싸움.

433년(눌지왕 17)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551년(진흥왕 12)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한강상류지역을, 백제는 남·북한성(南北漢城)을 포함하는 한강하류방면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553년(성왕 31) 진흥왕은 백제가 회복한 남·북한성 등지를 탈취하여 자국의 주현(州縣)으로 삼아 신주(新州)라 칭하였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관산성의 군주(郡主) 각간(角干) 우덕(于德)은 전세가 불리하자 신주(新州:경기 광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의 원조를 얻고, 삼년산군(三年山郡:보은)의 비장(裨將)인 고간(高干)·도도(刀都)가 구천(狗川:옥천 부근)에서 백제군을 격퇴하니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좌평(佐平) 4명과 군사 2만 9600여 명의 전사자를 냈고 120년간이나 계속된 나제동맹은 깨졌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는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과 함께 서해를 거쳐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문호를 확보하였다. 백제는 전쟁에 패한 이후, 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동성왕 이후 강화되었던 왕권이 동요되고 국왕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참조항목

관산성, 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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