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민란

곡산민란

[ 谷山民亂 ]

요약 1811년(순조 11) 황해도 곡산부의 농민이 환곡(還穀)운영의 폐단과 수령의 수탈에 반발하여 관에 저항한 사건.

부사(府使) 박종신(朴宗臣)이 환곡을 포흠(逋欠)한 아전(衙前)과 향임을 가혹하게 처벌한 데서 비롯되었다. 박종신은 읍폐를 고친다는 명분 아래 아전과 향임의 환곡 운영권을 탈취하였으며, 부민의 곡식을 침탈하였다. 이에 부민이 중심이 된 곡산농민들은 2월 23일 새벽 몽둥이를 들고 관아를 습격, 수령의 병부와 직인을 빼앗아 이웃 고을 수령인 수안군수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곡산부사 박종신을 빈 가마니에 넣어 읍 30리 밖에다 내다버렸다.

농민은 박종신의 비리 8조를 폭로한 다음 다짐을 받아내었고, 옥문을 부수고 창감(倉監)과 색리(色吏)를 비롯한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그 뒤에도 그들은 해산하지 않고서, 진상을 조사하려드는 신임 수령을 능멸하고 조사작업을 방해하였다. 3월 6일 순조의 명을 받은 안핵사 이면승(李勉昇)이 해주목에 도착하여 5진영 포교들을 풀어 난민을 모두 잡아들였다.

이에 곡산민들은 3월 6일부터 중순까지 약 1주일간 적극 저항하다가, 많은 농민이 체포되었다. 농민이 해산한 뒤 교졸들이 토색질과 살륙을 저지르자, 농민들은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저항하였다. 정부는 이 난을 가혹하게 처리, 1명이 조사 도중에 죽고 37명이 처형, 39명이 정배되었다. 한편, 박종신은 울산으로 유배되었다.

이 민란은 관속들의 방관과 묵인 속에서 부민이 지도하고 일반 농민이 주요 세력이 되어 일어난 19세기초 농민항쟁으로서, 비록 농민의 패배로 끝났지만, 10개월 뒤 ‘홍경래의 난’이라는 평안도 농민항쟁으로 비화되었다.

참조항목

홍경래의 난

역참조항목

이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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