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습

고습

[ 袴褶 ]

요약 고대 중국 복식에 수용된 호복(胡服).

자의(字意)는 하고상습(下袴上褶)의 형제(形制)를 나타낸다. 넓은 뜻의 호복은 북방 기마 유목민족의 복식 일반을 이르는 것이나, 그 양식이 중국에 수용된 경우에는 고습이라 하였다. 고습의 유래에 비추어 보면 두 기본형식은 상의(上衣)와 바지[下袴]일 것이나, 습의 구체적인 형제에 대하여는, 포(袍) 모양이라는 해석(〈急就篇〉에 〈其形如袍〉라는 기록이 보이며, 同顔師古注에 〈左袵袍〉라 함)과, 상(裳) 모양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어 한결같지 않다. 고습은 처음에 융복(戎服)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호복 형식이 말 타고 활쏘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시초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인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 19년(BC 307), 왕이 호복을 채용한 것이라고 전한다. 비단 또는 마(麻)로 만든 중국 재래의 헐렁한 옷을 입고는 북방민족의 기사전력(騎射戰力)에 대항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고습이라는 이름은 이 뒤에 생긴 것이며, 이와 함께 새깃을 꽂은 혜문관(惠文冠)과 대구(帶鉤)가 달린 혁대(革帶:일명 郭洛帶), 가죽신 등의 호풍(胡風)이 양식화되었다.

한(漢:BC 202∼AD 220)나라 때에 이르러 고습은 융복으로 더욱 유행하였으나 천복(賤服)으로 여긴 듯하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고습이 제도화되었다. 《진서(晋書)》에 따르면 옷의 색을 특별히 정하지는 않았으나, 검은 모자를 쓰고 허리에 낙대(洛帶)를 둘렀는데, 낙대의 표(褾)는 중관은 자색(紫色), 외관(外官)은 붉은색이다. 검은 모자 등은 서역풍의 반영으로 본다.

수(隋)나라에도 고습은 황제가 순유(巡遊)할 때의 복장으로, 무신과 서종관의 조복으로 계속해서 입었고, 당(唐)나라 때에는 더욱 성행하여 백관(百官)의 조현복(朝見服)·민서복(民庶服)으로 착용하였다. 《당서(唐書)》에 보인 고조(高祖) 때(624)의 의복령에 따르면, 고습은 군신복(群臣服) 21가지 가운데 하나로서 3품 이상은 자색, 5품 이상은 붉은색, 7품 이상은 녹색, 9품 이상은 푸른색[碧] 등 계급에 따라 색과 감의 구별이 있었다.

또 백관이 조참(朝參)할 때는 고습을 착용하도록 여러 차례 칙령을 내렸고, 이에 따르지 않은 자는 어사(御史)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정착한 고습은 중국 복식의 기저를 이루어, 송(宋)·원(元)·명(明)으로 전승되었다. 청(淸)나라 때에는 만주복(滿洲服)의 강제 착용과 그 전통이 굳어져 현대 중국복의 기본 양식을 규정지었다.

당대 고습의 성행은 신라 때의 당복습용(唐服襲用)을 통하여 한국 복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습은 고구려벽화 등에 나타나는 우리 고유의 복식과 기본적인 형식이 같은 옷으로, 한복은 고유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왔다고 할 수 있으며, 현대의 중국복은 상의하상(上衣下裳)의 한양식(漢樣式)이 대변혁을 거쳐서 다른 계통의 옷으로 전화(轉化)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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