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유명한 유적지 아니면 유명한 곳

경주 유명한 유적지 아니면 유명한 곳

작성일 2013.05.2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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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내일 ppt로 발표해야 하는데요..경주의 유명한 곳 아님 유적지좀 가능한 한 많이좀 올려 주세요. 애들이 많이 안할 만한 독특한걸루 올려주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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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유적지 34곳을 올려드립니다.

 

(경주의 유적지)

 

1.석굴암 석굴


종 목  국보  제2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 석굴암 
시 대 통일신라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2.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종 목  국보  제199호 
지 정 일 1979.05.22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89 
시 대 신라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단석산 중턱에 이르면 거대한 암벽이 ㄷ자 모양으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위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동북쪽의 독립된 바위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여래입상이 1구 서 있다. 둥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며, 머리 위로 2단으로 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작게 솟아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트인 가슴 사이로는 띠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이 보이게 하고 있다.


동쪽면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을 쥐고 있다.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남쪽면에도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서 앞의 두 불상과 함께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면에는 40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선사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북쪽 바위면에는 모두 7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얕게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동쪽으로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아래쪽에는 버선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한 공양상 2구와 스님 한분이 새겨졌는데,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3.포석정지


종 목  사적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454-3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4.황룡사지

 

종 목  사적  제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 
시 대 신라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5.망덕사지


종 목  사적  제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56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낭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 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반야경』을 베껴쓰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6.사천왕사지


종 목  사적  제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7.흥륜사지


종 목  사적  제1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사정동 281-1 
시 대 신라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신라 미추왕이 절을 짓도록 하였다고 하나,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며,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미추왕이 죽자 절은 곧 폐허가 되었고, 그 후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이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왕 자신도 만년에는 스스로 삭발하여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절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이 흥륜사이고, 김현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절도 이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당 안에는 선덕여왕 때 김양도가 만들었다는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져 있고, 동쪽 벽에는 아도·이차돈·혜숙·안함·의상의 상이, 서쪽 벽에는 표훈·원효·혜공·지장·사파의 상을 모셔 놓았다. 금당지 앞에는 8각탑지와 서쪽의 경루가 있고 이를 둘러싼 회랑지가 조사되었다. 흥륜사의 남문은 길달문이라고 불렀는데, 귀신인 길달이 지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말 반란군에 의해 불탄 것을 경명왕 5년(921)에 다시 지었으며, 조선시대에 화재로 불타 폐사되었다. 절터에는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와 배례석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미소로 일컫는 사람얼굴 모양의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지금은 1980년대에 새로 지은 흥륜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터로 보기도 한다.

 

 

8.경주 동궁과 월지

 

종 목  사적  제1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26 
시 대 통일신라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680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9.계림


종 목  사적  제1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교동 1 

시 대  신라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가 남아있다.

 

10.무열왕릉

 

종 목  사적  제2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시 대 삼국시대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1.김유신 묘

 

종 목  사적  제2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산7-10 
시 대 통일신라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비만 남아있다. 

 

12.남산성

 

종 목  사적  제2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탑동,남산동,배반동,배동 
시 대 신라


경주 남산의 북쪽에 있는 신라 산성으로 ‘신라 남산신성’이라고도 한다.

 

신라 진평왕 13년(591)에 쌓았다고 전하며,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성을 크게 고쳐 쌓았는데, 지금 성벽이 잘 남아있는 부분은 이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남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돌로 쌓았으며, 성 안에는 3개의 커다란 창고가 있어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성 부근에서 발견된 남산신성비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와 일정한 길이의 성벽을 맡아 쌓았으며, 만일 3년 이내에 성벽이 무너지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서약의 글과 함께 관계한 사람들의 벼슬·성명·출신지를 새겨져 있다.

 

경주평야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산성은 서쪽의 서형산성과 동쪽의 명활성, 그리고 북쪽의 북형산성과 함께 신라의 왕도를 호위했던 성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지금도 큰 창고 자리에서는 불에 탄 쌀이 나온다고 한다.

 

13.감은사지


종 목  사적  제3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시 대 통일신라


감은사는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지금은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있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강당·금당·중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금당 앞에는 동·서쪽에 두 탑을 대칭적으로 세웠음을 밝혔다. 이 건물들은 모두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금당의 지하에는 배수시설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죽은 문무왕이 바다용이 되어 이 시설을 통해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금당 앞의 탑 2기는 우리나라의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석탑의 모범이 되고 있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 절이 무너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4.장항리사지


종 목  사적  제4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1081 
시 대 통일신라


토함산 동남쪽 계곡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절터가 있는 계곡은 대종천의 상류로 감은사터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절을 지은 연대나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장항리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사지라 불러오고 있다.


절터에는 서탑인 5층석탑과 파괴된 동탑의 석재, 그리고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으로 보이는 건물터에 있는 석조불대좌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이 대좌 위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으며,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서탑은 일제시대에 도굴범이 탑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을 훔치기 위해 폭파시켜 파괴한 것을 수습하여 다시 세웠다. 동탑은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절터에 모아두고 있다.


장항리사지는 계곡 사이의 좁은 공간을 이용하여 쌍탑을 세우고 그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을 보이나, 아직 강당과 회랑의 자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5.원원사지


종 목  사적  제4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2 
시 대 신라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원원사는 밀교의 후계자들인 안혜·낭융 들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들이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절터에는 금당이 있던 자리와 2기의 3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가 남아 있다. 탑은 동쪽과 서쪽에 있는데 규모와 형태가 거의 같으며, 일제시대에 복원된 것이다. 탑에는 12지신상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는데, 그 수준이 매우 높아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우수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두 석탑 사이에는 석등이 있고 4기의 부도가 동쪽과 서쪽 계곡에 나누어져 있으며, 모두 고려시대 이후 것으로 보인다.


원원사는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전기까지 밀교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고, 조선 후기까지 명맥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탑의 조각수준으로 보아 당시 품격있는 절이었음을 알게 한다. 

 

 

16.천군리사지


종 목  사적  제8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천군동 548-1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보문단지 경주월드 맞은편 논 한가운데 있으며, 보물 제168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 2기가 서 있다. 절의 이름과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석탑이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2기의 탑은 규모와 형식이 같으며, 서쪽에 있는 탑의 보존상태가 좀 더 양호하다.


발굴결과 확인이 된 건물자리는 금당(법당)·강당·중문 들이며, 기둥과 기둥사이를 1칸으로 볼 때 금당은 앞면·옆면 모두 5칸, 강당은 앞면 8칸·옆면 3칸, 중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전체 절터의 규모는 중문에서 강당까지 남북 79m, 동서 61m이다.


발굴당시에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이 기와 종류로서, 지붕 맨 윗부분의 양쪽 끝에 장식하였던 큰 치미(높이 58㎝)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인 쌍탑식의 가람배치를 따르지만 금당 좌우에 회랑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감은사터와 보문리사터의 석탑보다 양식상 늦은 시기로 보아 창건 연대를 8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17.서출지

 

종 목  사적  제138호 
지 정 일 1964.07.1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남산동 973 
시 대 신라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공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18.경주 동부 사적지대


종 목  사적  제161호  
지 정 일 1968.07.24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황남동 104-1 
시 대 삼국시대


신라의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정한 것이다.


동서는 안압지부터 교동까지, 남북은 월성남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가 동부사적지대에 해당한다. 월성, 안압지, 첨성대, 계림 등이 각각 하나의 사적으로 지정 되어있으나, 이들 유적 사이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지하유적과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신라 도성의 중심지역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적지를 연결하여 확대 지정한 것이다.


안압지, 경주월성, 첨성대, 계림, 나물왕릉 등 외에도 수십기에 달하는 신라 무덤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19.경주 오릉


종 목  사적  제172호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탑동 67 
시 대 신라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 또는 사릉이라 했다고 한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20.경주 일성왕릉

 

종 목  사적  제173호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탑동 산23 
시 대 신라


신라 7대 일성왕(재위 134∼154)의 무덤이다.

 

왕은 북쪽 변방에 침입하는 말갈인을 막고, 농토를 넓혀 제방을 쌓는 등 농업을 권장했으며, 백성들에게 금·은·보석의 사용을 금지하여 사치풍조를 멀리하게 했다.

 

왕릉은 높이 5.3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둘렀으며,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다. 무덤 앞 2단 축대는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21.경주 미추왕릉

 

종 목  사적  제175호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황남동 89-2 
시 대 신라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 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왕릉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유례왕 14년(297) 이서고국 사람이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 누군가 미추왕릉에 댓잎을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미추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도와주었다하여 미추왕릉을 죽장릉, 죽현릉이라 부른다고 한다.

 

경주 황남동 무덤들 중 가장 잘 정비된 대릉원 내에 높이 12.4m,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이 있고, 담장을 돌려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무덤 앞쪽에는 숭혜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22.경주 정강왕릉

 

종 목  사적  제186호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53 
시 대 통일신라


경문왕의 둘째 아들인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의 무덤이다. 정강왕은 형인 헌강왕에 이어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았다.

 

무덤의 외형은 흙으로 덮은 둥근 형태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밑둘레에 3단으로 돌을 쌓았다. 그 중 제일 밑단만이 밖으로 약간 나왔으며, 무덤 앞에는 돌단이 있는데, 그 위에 돌로 만든 작은 제삿상이 있다.

 

무덤의 구조는 헌강왕릉과 같다. 그러나 1993년 헌강왕릉의 내부조사 결과, 그 구조와 나온 유물들이 8세기 이전의 형식이어서 이 왕들이 왕위에 있던 9세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23.경주 헌강왕릉

 

종 목  사적  제187호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55 
시 대 통일신라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무덤이다.

 

헌강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높이 4.2m, 지름 15.3m의 둥근형태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밑둘레에 돌을 4단으로 쌓았다. 일찌기 도굴되었으며 비에 의한 피해로 긴급조사를 하였다. 관이 놓여 있는 방은 네모 형태로 천장은 둥글게 모아져 있는 활천장(궁륭상천장)이고, 이 방과 연결된 통로인 널길(연도)은 동쪽에 있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이다. 여기서 꽃무늬 토기도 나왔다.

 

무덤 보호를 위해 다듬은 돌을 4단으로 쌓은 형태는 신라 왕릉에서는 특이한 형식으로 정강왕(886∼887)릉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내부구조나 출토된 토기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헌강왕의 재위기간이었던 9세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24.경주 내물왕릉

 

종 목  사적  제188호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교동 14 
시 대 신라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내물왕릉을 황남대총(98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5.배동 삼릉

 

종 목  사적  제219호 
지 정 일 1971.04.28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73-1 
시 대 신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26.경주 지마왕릉

 

종 목  사적  제221호 
지 정 일 1971.04.28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30 
시 대 신라


신라 지마왕(112∼134)의 무덤으로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성은 박씨로서 파사왕의 아들이다. 무덤의 모양은 비교적 규모가 큰 둥근무덤으로 남산에 뻗은 경사면의 높은 곳에 만들었으며 별다른 특징은 없다. 무덤의 위치와 규모 및 형태로 보아 신라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무덤 앞에 최근에 설치한 작은 석상이 놓여있다. 

 

 

27.경주 경애왕릉

 

종 목  사적  제222호  
지 정 일 1971.04.28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산73-1 
시 대 통일신라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으로,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4년이 되던 해에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이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일반무덤와 같아서 별다른 특징은 없다. 신라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며 발굴된 적은 없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되어있다. 해목령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28.나정


종 목  사적  제245호 
지 정 일 1975.11.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탑동 700-1 
시 대 신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이다.

 

신라가 세워지기 전의 경주지역 일대는 진한의 땅으로 6명의 촌장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그 중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양산 기슭 우물가에서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곳으로 가보니 빛이 나는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 속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자 하늘에서 보내준 아이라고 생각하여 잘 길렀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라고 하였다.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서라벌이라고 이름지었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조선 순조 2년(1802)에 박혁거세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29.경주 재매정


종 목  사적  제246호 
지 정 일 1976.01.0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교동 89-7 
시 대 신라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이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30.천관사지


종 목  사적  제340호 
지 정 일 1991.01.09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교동 244 
시 대 통일신라

 
도당산 서쪽 기슭 논 가운데에 있는 절터로서 현재 석재와 기와조각들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전기에 있던 절로, 김유신과 천관이라는 기생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년시절에 김유신은 천관이라는 기생과 사랑에 빠져 지내다가,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어느날 말이 술에 취한 유신을 천관의 집 앞으로 데려가자, 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냉정하게 천관을 뿌리친다. 이를 슬퍼한 천관이 자살을 하고, 후에 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31.보문리사지


종 목  사적  제390호 
지 정 일 1994.12.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848-6외 
시 대 통일신라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시대 절터를 가리킨다.


유적은 보문부락의 앞들판에 있으며 멀리 서쪽에는 경주 낭산(사적 제163호), 북쪽에는 명활산성(사적 제47호)이 있다.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 경문왕 11년(871)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절터의 대부분은 넓은 논으로 이용하고 있으나, 발견되는 석재들로 미루어 당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때 ‘보문사’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쪽에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123호)와 석조(보물 제64호)를 비롯해 당시 탑 따위의 석물들이 남아 있다. 

 

 

32.불국사


종 목  사적 제502호
지 정 일 2009.12.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시 대 통일신라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33.경주 대릉원 일원


종 목  사적  제512호 
지 정 일 2011.07.28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노동동 261 등 1,944필지 
시 대 신라

 
경북 경주시에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이다. 본래 사적 38호 경주노동리고분군, 사적 39호  경주노서리고분군, 사적 40호 경주황남리고분군, 사적 41호 경주황오리고분군, 사적 42호 경주인왕리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경주 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경주 노동리에는 고분군이 현재 4기(125∼127호)가 남아 있다. 봉황대는 황남동 98호분보다 낮으나, 봉토의 지름 82m, 높이 22m의 거대한 고분이다. 그 남쪽 15m 지점에는 1924년에 발굴한 금령총(金鈴塚)이 있고, 그 동쪽에는 같은 해에 발굴한 식리총이 있으며, 그 서쪽에 노서리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군은 노서리 고분군과 같이 황남리 고분군보다는 조성연대가 조금 뒤인 6세기경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구조는 모두가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이고, 금령총을 예로 하여 내부를 설명하면, 지하에 판 구덩이에 동서 4.8m, 남북 3.6m, 높이 1.5m의 덧널을 넣고, 덧널 안에 나무널과 껴묻거리를 넣어 수장하였으며, 그 덧널 위에 돌을 쌓아 봉토를 덮었다. 여기에서 금관 ·금과대 등과 함께 기마상토우 1쌍이 출토되었다.


경주 노서리에 있는 고분군은 표형분 1기(134호분)를 포함하여 14기(128∼141호)의 고분이 있다. 이 중에는 서봉황대 고분을 비롯하여, 1921년에 발굴된 금관총, 1926년에 발굴된 서봉총과 같은 유명한 고분과 1946년에 발굴된 호우총(140호분)도 있다. 또 1953년에 발굴된 133호분 마총과 1963년에 발굴된 137호분 쌍상총이 있다. 쌍상총은 석실 넓이 3m2, 높이 4m로 남쪽 벽에 두 쪽 돌문이 달린 널길과 통하고, 실내에는 2.3m×2m, 높이 1m의 관대를 중앙에 만들고 인형을 음각한 석제 시대와 돌베개 ·족좌가 나란히 놓여 있어 부부 합장 분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총은 완전히 도굴당한 분묘이지만 내부에서 말 뼈가 발견되어 그렇게 명명하였고, 현실과 널길 사이에는 돌문이 아니라 나무문 또는 나무판자가 끼어 있던 흔적이 있다. 이들 석실분은 경주의 평지 대지에 나타난 가장 초기의 새 형식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며, 연대는 신라~통일신라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경주 황남리 고분군에는 미추왕릉이라 전하는 고분을 비롯하여 이미 지정된 고분과 그 후 새로 소재가 파악된 173기를 더하여 250여 기의 파손된 고분들이 있다. 이 중에 미추왕릉군을 1973∼1974년 미추왕릉 고분공원으로 조성하여 돌담을 둘러쳐 보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화문옻칠그릇 등과, 부인띠로서 침각명이 있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 꾸미개 등 많은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1973년에 발굴된 155호분 천마총에서도 화려한 금관 등의 금꾸미개가 많이 나왔다.


경주 황오리 고분군은 경주의 팔우정 로터리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48기(1∼18호, 30∼58호)의 고분들이다. 이 지대에서 발굴된 고분에는 1935년에 발굴된 제16호분, 1934년의 제14호분, 1965년의 제1 ·33 ·151호분과 1963년의 제4 ·5호분이 있다. 이 고분들도 황남동의 고분과 마찬가지로 대개 다곽분이고, 제14호분에서 출토된 철제 등자는 고신라의 등자 중에서도 고식에 속한다. 특히, 제151호분은 한 봉토 안에 남북방으로 돌무지덧널무덤이 동서쪽으로 직사각형 돌방과 함께 들어 있어, 보문리 부부총과 더불어 특이한 구조를 취하였다.


경주 인왕리 고분군은 경주역 동쪽의 대부분이 도굴되거나 파괴된 고분 23기(19∼27호분, 147∼150호분 및 새로 발견한 10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고분 중에서 1969년 제19 ·20호분은 경희대학 박물관팀이 발굴하였고, 1973년에 제149 ·156호분을 이화여자대학 박물관팀이 발굴했다. 제19호분은 13개의 석곽이 드러나서, 5∼6세기의 약 2세기에 걸친 가족공동묘지로 추정되었다. 이것은 신라 때의 일반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껴묻거리로는, 토기 ·장신구 ·마구류와 은제환두대도 ·투겁창 등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34.경주양동마을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시 대 조선시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양동마을은 안동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Historic Villages of Korea : Hahoe and Yangdo ng)’이라는 이름으로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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