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공100] 충청도의 유적 및 답사코스 있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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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12.2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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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에 충청도 답사를 가게되었는데

제가 미리 루트랑 어디어디 갈지를 다 짜야되서 ㅜㅜ

3박4일 동안 답사를 가게되었는데 충청도의 유물 유적과 답사코스

가능하신분 . 아니라면 유물 유적만이라도 상세히 알려주세요 ㅜ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충청도의 그 많은 유적과 유물을 올려드리기가 힘듭니다. 충청도의 유적 중에서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인 사적을 올려드립니다.

 

(충청남도의 유적 - 사적)

 

1.가림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가림성(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2.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3.공산성

 

종 목 사적 제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시 대 삼국시대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4.송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5.능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시 대 백제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6.청마산성

 

종 목  사적  제3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1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능산리 월명산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

 

골짜기를 성안에 두고 산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전반적으로 성벽이 많이 무너져 있으나,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계곡의 물이 흐르는 서쪽 성벽에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성이라 남문이 없다. 현재 성안에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이 쌓은 망대와 각시우물이라 전하는 우물터, 경룡사터, 의열사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백제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석성산성·성흥산성·증산성과 함께 부여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서 의미가 크다.

 

7.군수리사지 

 

종 목  사적  제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 
시 대 백제


부여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이후 계속된 조사를 통해서 백제의 기본적인 가람배치로 알려졌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8.부여 나성

 

종 목  사적  제5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565 
시 대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4㎞의 성이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여시가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에 있는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의 하나이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하여 금강변까지 흙으로 쌓아만든 것으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안쪽 벽은 완만하여, 성위에서 말을 달릴 만한 길이 있고 곳곳에 초소가 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안에는 백제의 왕궁을 비롯하여 관청·민가·절·상가 및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남쪽과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또 물길도 파놓아서 자연적인 2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부여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수도보호를 위한 외곽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9.청산성

 

종 목  사적  제5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 
시 대 삼국시대


부소산 동쪽 500m 지점의 낮은 구릉 위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흙으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백제 무왕 6년(605)에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나성과 함께 쌓았다. 외성의 북쪽 성벽은 나성과 연결되어 있어, 나성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독립된 산성이라기보다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부소산성과 연결하여 쌓았던 보조산성으로 보인다.

 

약 300m 정도의 내성과 500m 정도의 외성으로 이루어진 2중구조의 산성으로 보이지만, 내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산봉우리를 빙 둘러쌓은 테뫼식산성으로, 동북쪽 성벽의 윤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안 서부와 북부에 당시의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있다. 

 

10.서천 건지산성


종 목  사적  제6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3 
시 대 삼국시대


건지산의 정상부근을 에워싼 말안장 모양의 내성과 그 서북쪽 경사면을 둘러싼 외성의 2중구조로 되어있는 산성이다.


성을 쌓은 시기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전기로 보고 있다.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으로, 내성은 흙으로 쌓았고 외성은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쌓았다. 이러한 2중구조의 산성은 특히 백제 말에 나타난 새로운 산성의 형식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산성의 남서쪽 낮은 봉우리에는 2개의 소규모 산성이 있는데, 이는 건지산성에 딸린 부속성으로 방어를 위한 보루로 볼 수 있다. 이 구조 역시 백제식 산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산성의 북쪽은 험준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성벽을 삼았고, 나머지 부분은 흙으로 쌓았으나 심하게 붕괴된 상태이다. 문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성안에 봉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봉서사 서쪽에 건물터로 보이는 계단 모양의 평지에서 불탄쌀과 백제의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산성은 금강 하류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를 통하여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 아닌 고려시대 산성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11.석성산성

 

종 목 사적 제8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 산83

시 대 삼국시대

 

연산의 황산성, 노성의 노성산성 및 금강 건너의 성흥산성, 뒤쪽의 금성산성과 연결되는 백제의 수도 사비 남쪽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안쪽에 성을 세운 후, 다시 성 밖에 2개의 골짜기를 따라 성을 쌓았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와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6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둘레 약 1,600m, 폭 약 5m, 높이 4m 정도로, 바깥쪽은 돌을 쌓아 올리고 안쪽은 흙을 파서 도랑(호)처럼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벽은 모두 무너졌고, 성벽이 통과하는 계곡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수구(水口)도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오른쪽의 수구에 해당하는 부분은 좌우로 성벽과 연결되도록 돌덩이들을 3∼4m정도의 높이로 쌓아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 안의 가운데 산등성이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많이 널려있어 건물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사비성이 함락된 뒤에도 당나라군과 신라 및 백제부흥군이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으로 유서 깊은 유적이다.

 

12.임존성 


종 목  사적  제9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시 대 삼국시대


백제 때 수도 경비의 외곽기지 역할을 한 성이다. 봉수산의 꼭대기에 있는 둘레 약 3㎞의 산성으로,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고 안쪽으로는 흙을 파서 도랑처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성의 네 모퉁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다른 곳보다 약 2m정도 두껍게 쌓았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주류성과 더불어 백제 부흥군이 활동했던 곳으로, 사비성을 되찾기 위한 부흥군의 마지막 근거지이다. 이 성에서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실패했다. 또한 후삼국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이 이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도 전해지는 유서깊은 곳이다. 

 

13.쌍북리 요지 

 

종 목  사적  제9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시 대 백제


충남 부여군 쌍북리에 있는 백제 때 토기 및 기와를 굽던 가마터로, 1941년 5월에 부여 시가지 계획도로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가마는 땅에 묻힌 상태여서 분명하진 않지만, 폭 135㎝, 높이 90㎝ 정도의 크기였다. 굴뚝 부분에서 아래로 3㎝ 정도가 남아 있고 아궁이 부분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완성되면서 가마의 앞부분이 잘려져 낭떠러지로 되어 있으며, 시멘트로 석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이 부근에서는 토기조각이나 가마에서 버린 물건들이 발견되지 않지만, 산등성이 너머의 경작지에서는 많은 수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널려져 있다.

 

지금은 가마의 일부만 남아있지만 부여읍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토기 및 기와 가마터로서 그 의의가 크다.

 

14.칠백의총

 

종 목  사적  제10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52-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였다. 1963년,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0년에 기념관·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15.맹씨행단

 

종 목 사적 제10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1360∼1438)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맹사성은 고려말 · 조선초의 문신으로, 최영 장군의 손주사위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등을 지내고 조선 태조 때에는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대제학, 우의정의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행단’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집의 마당에는 600년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고, 뒷동산에는 느티나무 ·전나무·감나무 들이 넓은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의 개울가에도 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이 많이 자라고 있으며, 담장 안 마당에는 채소밭도 만들어져 있다.

 

이 집을 통해 조선 전기 민가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16.이충무공 묘

 

종 목 사적 제1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2-1

시 대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무덤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직책을 거쳤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전라좌수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충무공은 일본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노량·당포·한산도 등 여러 곳에서 적을 무찌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을 맞고 숨졌으나, 사실을 숨기고 조카인 완이 대신 지휘하여 왜적은 큰 피해를 입고 도망을 갔다.

 

아산군 금성산에 무덤를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위에는 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는 상석과 혼이 놀다간다는 혼유석·향로석이 있으며, 동자상 1쌍·망주석 1쌍·석상 1쌍·문인석 1쌍·광명등·묘비석이 있다. 무덤 앞에는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의 비각이 있다.

 

17.해미읍성

 

종 목 사적 제11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시 대 조선시대

 

이 성은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으로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에 옮겨져서 해미읍성으로 이용되었고, 1914년까지 겸영장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 및 작청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18.궁남지 

 

종 목  사적  제135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19.이충무공 유허

 

종 목 사적 제155호

지 정 일 1967.03.18

소 재 지 충남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산57

시 대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본전을 비롯하여 이순신이 자란 옛 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유물관에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나 모조품이며, 진품은 통영에 위치한 충렬사에 전시되어 있다.

 

20.증산성 

 

종 목  사적  제156호 
지 정 일 1967.03.2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 산86 
시 대 백제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성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 듯 하다고 하여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백제 산성이다.

 

성왕 16년(538)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나서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2∼3m 정도로 거의 무너진 상태이지만, 성의 남쪽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쪽·남쪽·북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지만 다른 성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한 편이다. 성 안에는 백제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동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바라 보면서 연결 되어있다.

 

증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정월에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고성성으로도 여겨지이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한 거점으로도 여겨지는 중요한 산성이다.

 

21.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종 목  사적  제229호 
지 정 일 1972.10.14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산40-1 
시 대 조선시대


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이라 한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문화의 습득에 주력하면서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다. 또한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서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는 농촌발전을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승리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4·29의거였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윤의사의 생가, 성장가 등이 복원되고 유물전시관과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이 세워진 것은 1970년 이후이다.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으로서 초상를 모시고 있으며,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유품들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충의관을 세워 윤의사의 농촌 계몽운동과 4·29의거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11경도를 전시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를 추모하는 매헌 문화재가 열린다. 

 

22.유관순열사 유적

 

종 목 사적 제230호

지 정 일 1972.10.14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338-1

시 대 일제강점기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천안시에서는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2년에 사당을 세우고 열사의 초상을 모셨다.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여 매년 3월 마지막날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23.홍주읍성

 

종 목 사적 제231호

지 정 일 1972.10.14

소 재 지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

시 대 삼국시대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24.부여 송국리 유적


종 목  사적  제249호 
지 정 일 1976.12.3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산24-1외 
시 대 선사시대


부여 송국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이다. 하천과 평지에 인접한 낮은 구릉과 대지 위에 100여 기 이상의 집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터는 평면 형태에 따라 둥근 것과 긴 네모꼴인 것이 있다. 둥근 집터는 30∼150cm 깊이로 땅을 파서(수혈식주거지) 만들었으며, 한쪽 벽을 얕게 파서 문을 만든 듯하다. 화덕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바닥 중앙에 1m 내외의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 안에 몇 개의 둥근 구덩이를 만들었다. 네모꼴 집터는 30㎝ 미만으로 땅을 판 반움집이나 지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주춧돌이 있는 발달된 집 형태를 하고 있다.


집터 안에서는 토기와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무문토기와 붉은 토기(홍도), 검은 간토기(흑도)가 나왔다. 무문토기는 납작한 밑, 긴 달걀형의 몸체, 목이 없이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꺾인 모습을 하여 이전의 무문토기와 달라 송국리식토기라 불린다.


돌칼, 돌화살촉, 방추차, 돌도끼를 비롯하여 다양한 석기들도 출토되었다. 그 밖에 많은 양의 불탄쌀과 벽체에 세웠던 판자가 불탄채로 나오기도 하였고, 청동도끼 거푸집(동부용범)이 출토되었다. 청동도끼 거푸집은 부채날형 청동도끼의 틀로서 요령지역의 것과 닮은 것이다. 집터 서쪽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문토기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송국리 집터는 유물을 토대로 기원전 7∼6세기 전에 농경과 수렵에 기반을 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5.정림사지 

 

종 목  사적  제301호 
지 정 일 1983.03.26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26.성주사지

 

종 목  사적  제307호 
지 정 일 1984.08.13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시 대 통일신라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27.보원사지


종 목  사적  제316호 
지 정 일 1987.07.18
소 재 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05 
시 대 통일신라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가까이에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28.보령 죽도 해저유물 매장해역

 

종 목  사적  제321호 
지 정 일 1987.09.18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주포면 송학리 죽도앞바다 
시 대 고려시대


죽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바다 밑에 고려청자가 묻혀 있는 곳이다.

 

1987년 수중고고학 발굴 작업을 통해 상감청자 32점을 비롯해 많은 유물을 건졌다. 이곳에서 나온 청자류들은 약 100여 점에 이르며, 불법으로 흘러 들어간 것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기사(己巳)’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어 청자의 연대를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는데, 기사년을 1269년으로 보는 설과 1329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이나 전북 부안군 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보인다.

 

29.학봉리 도요지

 

종 목 사적 제333호

지 정 일 1990.08.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22-1외

시 대 조선시대

 

요지란 도자기, 기와, 그릇 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유성에서 동학사쪽으로 들어가면 신도안과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일대 계룡산 기슭에 여러 곳의 가마터가 분포한다. 그 중 이 학봉리 도요지가 중심이 되며,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에 조사된 보고서에 의하면 가마는 산록의 경사면에 여러 개를 축조하였고, 구조는 땅을 약간 파 길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천장과 벽을 진흙으로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라고 한다. 철화분청자·귀얄청자·백자 등이 출토되었고 그 가운데 철화분청자가 대표적이다. 그릇의 종류로는 대접·접시·술병·주전자 등 다양하며, 새겨진 무늬는 국화무늬·연꽃무늬·물고기무늬·새무늬 등 다양하다.

 

철화분청자의 대표적인 생산지로서 그 의미가 크며,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무늬를 새긴 것으로 유명한 가마터이다.

  

 

30.석장리 구석기유적

 

종 목 사적 제334호

지 정 일 1990.10.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장기면 장암리 98외

시 대 석기시대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금강가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하고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식물채집을 통해 생활한 문화단계를 말하는데, 인류가 태어나 1만년 전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찍개·긁개·주먹도끼·새기개 등의 석기류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후기 구석기층의 집자리에서는 숯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연대측정을 한 결과 약 2만 5천년에서 3만년전으 집터임이 확인되어, 당시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았고 전후 시기에도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꽃가루를 조사한 결과 이 일대에 소나무·전나무·목련·백합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처음으로 알게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31.부여 정암리 와요지


종 목  사적  제373호 
지 정 일 1992.05.04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양길면 정암리 47외 
시 대 백제


부여 백마강 건너 야산 남쪽 비탈에 있는 백제 가마터이다.


백제 가마 11기와 고려시대의 가마 1기가 조사되었다. 가마는 풍화된 화강암반을 파고 들어가 만든 지하식 가마이며 천장을 제외하고는 완전하게 남아있다. 출토 유물은 연꽃무늬 수막새, 상자형 전돌, 토기, 각종 기와 등이 있다. 연꽃무늬 와당은 군수리와 동남리에서 나온 와당과 비슷해, 이곳에서 기와를 구워 부여의 주요 건물에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6세기 후반∼7세기전반) 가마터로서 그 모습이 잘 남아 있어 백제 가마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32.돈암서원

 

종 목 사적 제383호

지 정 일 1993.10.18

소 재 지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외 5필지

시 대 조선시대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1년(1633)에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이곳에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썼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시었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있는 곳이다.

 

33.우금치 전적지

 

종 목 사적 제387호  

지 정 일 1994.03.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학동 산78-1외

시 대 조선시대

 

우금치 고개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일단 우금치를 장악하면 중부지역의 거점인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공주를 중심으로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에 이 고개의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졌으며, 동학농민전쟁 100년이 지난 1994년 이르러 우금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역사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이다.

  

 

34.노성산성

 

종 목 사적 제393호  

지 정 일 1995.08.02

소 재 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산1-1외 13필지

시 대 백제

 

백제 때 산 정상부분을 돌로 둘러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산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거의 완벽하게 쌓았고 동쪽면, 북쪽면, 서쪽면은 돌을 네모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 둘레는 590m, 높이 2.4m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장대지)가 있으며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 기와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35.능안골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20호 
지 정 일 2000.07.22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7외 
시 대 백제


백제 능산리 무덤 동쪽에 있는 백제나성(사적 제58호)이나 청마산성(사적 제34호)과 함께 있는 백제 무덤이다.

1995∼1996년 사이에 조사되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30여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0여기, 독무덤(옹관묘) 4기 등을 발견하였다. 홑무덤(단장묘)이나 합장묘, 어린아이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주·사 등의 옷감 및 금귀고리, 은제관장식과 띠드리개장식(요대장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 후기 무덤형식과 의복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36.부여 화지산 유적


종 목  사적  제425호 
지 정 일 2001.01.04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05번지 외 
시 대 백제


부여 궁남지(사적 제135호) 동쪽에 위치한 화지산(花枝山 : 해발 10∼48m인 야산)은 백제 이궁지인 망해정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서, 지난 '86년에 충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초석과 와편들이 다량 출토된 유적지이다.


2000. 5월부터 8월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추가 발굴조사한 결과에서도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건물지, 분묘, 목책시설 등 다양한 유구 및 유물(건물지5, 석곽묘11기, 토광묘<민묘>18기, 석축시설, 출토유물 50점 등)이 확인되어 이 일대가 백제시대 이후 계속적으로 거주지 또는 묘역으로 활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37.왕흥사지


종 목  사적  제427호 
지 정 일 2001.02.0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37-2번지외 
시 대 백제


부여군 규암면 신구리 속칭 왕은리 마을 일대 부소산성과 낙화암, 고란사, 그리고 구드래 나룻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아주 빼어난 곳에 위치한 이 절터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 등 백제시대 유물들이 많이 흩어져 있고, '왕흥'이라는 이름의 명문와편이 발견되었다.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 등의 문헌기록과 함께 절터에 남아있는 네모난 초석 등의 석물, 쇳떼배기의 구전 등으로 왕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가 그 후 훼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38.관북리 유적


종 목  사적  제428호 
지 정 일 2001.02.0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외 
시 대 백제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로 지정되어 있다.

 

'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가 발견되었고, '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39.홍성 의사총

 

종 목 사적 제431호

지 정 일 2001.08.17

소 재 지 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124-2 외

시 대 대한제국시대

 

 한말 홍성군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가운데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이다.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충청남도 홍성지방에서는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1906년 고종 황제의 명을 얻어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3월 20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다가 1949년에 항일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져 이곳에 모셔졌다. 홍주의병의 핵심적 연구자료인 <홍양일기>. <홍양기사>, <조선최근사> 등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 전사자는 최소한 98인, 많게는 수백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40.장선리 유적


종 목  사적  제433호 
지 정 일 2001.09.1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탄천면 장선리 151-6외 
시 대 청동시대


충남 공주시 탄천면 장선리 및 안영리 일대에 위치한 토실유적으로, 천안 - 논산간 고속도로 휴게소부지 조성을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 원형유구 30여기, 석관묘 1기, 옹관묘 1기, 적색마연토기 등을 비롯한 다수의 송국리형토기와 다양한 석기류, 마한시대 주거지로 추정되는 토실유구 39기, 장방형 주거지 5기, 장방형 수혈유구 15기, 횡혈묘 1기가 확인되었고, 장란형토기·심발형토기·시루·대접 등 다양한 생활용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모두 구릉 위 평탄한 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조는 타원형 구덩이와 그 주변에 기둥 구멍이 배치되어 있다. 이 주거지들은 송국리형 주거지의 형태로 시기적으로 송국리형 주거지의 중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원삼국시대 유구로는 토실유구, 수혈주거지, 저장공 등 다양한 생활유적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토실 유구는 새롭게 확인된 유구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개 생활용 토기로 이곳이 생활유적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공주 장선리 토실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조사된 유적으로 문화사적·고고학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삼국시대 초기 주거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청동기 시대 유구와 철기시대 유구가 중첩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의 주민 및 생활상의 역사적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41.능산리사지


종 목  사적  제434호 
지 정 일 2001.09.29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 외 
시 대 백제


능산리 절터는 부여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과 부여나성(사적 제58호)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유적으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3년 이 절터 내의 공방으로 생각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 수준과 예술 역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공양자 및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창건연대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건축공학, 고고학, 미술사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42.금강사지


종 목  사적  제435호 
지 정 일 2001.09.29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 13-1외 
시 대 백제


금강사 터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이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까지 계속하여 법등이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절로, 1964년과 1966년 두 차례 발굴조사 결과 초창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중건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금강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금강사로 불리던 절의 폐사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초창의 가람은 백제시대의 것으로 목탑을 갖춘 일탑일금당식의 가람 형식인데 남북을 축으로 한 남북방향이 아니고, 동서를 축으로 한 점이 특징이다. 동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이어지고 중문에서 강당에 걸쳐 회랑이 돌려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건축에 있어서 기단은 건물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금당의 경우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추고 네 귀퉁이에는 동자주를 세운 형식이고, 강당과 승방은 지대석이 없이 판석을 세워 축조하고 있다. 목탑지 기단은 2층 기단이었다고 추정되었으며, 그 지하 6척(尺) 깊이에서 발견된 심초는 자연의 풍화암반을 이용한 특이한 것이었다.

 

탑·금당·중문의 기단 축토가 판축법에 의해 축성되었음이 처음 확인된 절터 유적으로 역사적, 미술사학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43.수촌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60호

지 정 일 2005.03.03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201 외 일원

시 대 백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공주시에서 계획한 의당농공단지 조성 예정부지에 대한 지표조사 후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어 해당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각종유물이 발견되었다.

 

공주수촌리고분군 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백제시대 부묘(대형토광목곽묘, 횡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곽묘)등이 조사되었다.

 

초기철기시대 토광묘는 세형동검과 검파두식(검자루끝장식) 등 다양한 청동제품과 점토대토기(점토띠토기), 흑고장경호 등 토기가 매장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초기철기시대 묘제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시대 분묘는 공주지역 백제고분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이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조영된 것으로 짐작되어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제이식,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 중국제 흑유도기, 흑유 계수호(닭머리모양 주전자)등 위세품으로 판단되는 유물들이 함께 부장되어 있어 피장자의 신분이 당시 공주지역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한성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관련성을 보여주는 백제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44.서천 봉선리 유적


종 목  사적  제473호 
지 정 일 2006.11.06
소 재 지 충남 서천군  시초면 봉선리581외 
시 대  청동기~조선시대


서천 봉선리 유적은 2003년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청동기시대부터 마한 · 백제 · 조선시대에 이르는 360여기의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으며, 500여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마한시대에는 분묘만이 집중적으로 조영되다가 다시 백제시대에는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이 자리잡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와서 다시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이 조영되고 있어 시기를 달리하면서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되어 당시 사람들의 문화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45.정지산 유적


종 목  사적  제474호 
지 정 일 2006.11.06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1 외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 정지산의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유적으로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국가적 차원의 제의시설로 추정된다.


유적지 내에서는 국가의 중요시설에만 사용된 8잎의 연꽃잎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견되었고, 이외에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 국가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매지권에 기록된 신지(申地), 유지(酉地)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왕비의 시신이 사후 무령왕릉에 안치되기까지 2~3여 년간 수습되어 보관된 곳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건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초석이 없는 건물로 제작되어 영구적인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과 유적지 내의 대벽건물지에서는 얼음을 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도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46.부장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75호  
지 정 일 2006.11.06
소 재 지 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219-2 
시 대 백제


서산 부장리 고분군은 2004년 ~ 2005년 충남역사문화원에서 임대아파트 조성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3기의 분구묘를 비롯한 260여기의 유구들이 조사된 유적으로서 서해안에 위치한 서산지역에서 크고 높게 남아있는 분구와 더불어 금동관, 환두대도, 철제초두 등 화려한 출토유물들은 백제시대 서산지역의 위상과 문화적 성격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정상부의 1호분은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역사교육자료로서의 활용도가 높다고 할 수 있어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사적으로 지정하여 유적의 훼손을 방지하고 역사의 교육장으로 보존 · 활용하고자 한다. 

 

47.부여 홍산현관아


종 목  사적  제481호 
지 정 일 2007.07.3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 187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홍산현 관아와 관련된 중요 기록은 여지도서(1757~1765), 홍산읍지(영조이후), 호서읍지(1892~1895), 서울대 규장각 소장 홍산현지도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옛 고을의 핵심시설인 객사와 동헌이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매우 드문 예라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48.보령 충청수영성


종 목  사적  제501호 
지 정 일 2009.08.24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일대 
시 대 조선시대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 142척에 수군 수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충청북도의 유적 - 사적)

 

1.임충민공 충렬사

 

종 목 사적 제189호

지 정 일 1969.11.2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단월동 385-1

시 대 조선시대

 

 충민공 임경업(1594∼1646)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숙종 23년(1679)에 사당을 세웠고, 1706년에 장군에게 충민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영조 3년(1727)에는 사당 이름을 충렬사라 했다.

 

임경업 장군은 선조 27년(1594) 충주에서 태어나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아 국방을 강화하는 등 나라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명나라를 숭상하던 장군은 인조 30년(1642)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위협을 받게되자 명군과 협력해 청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계획이 탄로나 청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나라는 장군에게 여러 제의를 하면서 포섭하려 했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후 1646년 국내의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관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피살되었다.

 

현재 충렬사에는 장군이 사용했던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사당 앞 왼쪽에는 장군 부인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가 있다.

 

2.상당산성


종 목  사적  제212호 
지 정 일 1970.10.0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시 대 조선시대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3.삼년산성 

 

종 목  사적  제235호 
지 정 일 1973.05.25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시 대 삼국시대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4.온달산성

 

종 목 사적 제264호

지 정 일 1979.07.26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

시 대 신라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우물터가 남아있고, 성벽 바깥부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5.단양적성

 

종 목 사적 제265호

지 정 일 1979.07.26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 산3-1

시 대 신라

 

단양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6.흥덕사지


종 목  사적  제315호 
지 정 일 1986.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시 대 통일신라


청주 운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1985년 발굴조사 때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금구)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중 3년명’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미·기와조각·그릇 들과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직지심체요절』을 찍은 곳으로서 그 가치가 중요한 유적이다. 

 

7.충주 미륵대원지


종 목  사적  제317호 
지 정 일 1987.07.18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58 
시 대 통일신라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사원터이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석불입상(보물 제96호)·5층석탑(보물 제95호)·석등·당간지주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8.청주 신봉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319호 
지 정 일 1987.07.1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 산7 
시 대 삼국시대


청주시내를 남동에서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 서북쪽 기슭의 동쪽 비탈진 곳에 분포하고 있다.

 

107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106기는 흙을 판 후 무덤을 쓴 널무덤(토광묘)이고, 1기는 널방과 널길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널무덤은 야산 전체에 걸쳐 분포하며, 봉분은 거의 깎여 나가 남아있지 않다. 출토 유물로는 여러가지 토기류·옥과 같은 장신구류·철로 만든 칼이나 도끼같은 무기류·말갖춤(마구류)과 그 밖의 숟가락 등이 나왔다. 90-1호 널무덤에서는 갑옷이 출토되어 백제철갑의 실물을 볼 수 있어 주목되고 있다.

 

신봉동 고분군은 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동안 만들어진 고분군으로, 대체로 4∼5세기경의 백제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신봉동은 백제의 동쪽 변방지역으로 다른 유적에서 볼 수 없는 마구류·무기류가 많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돌방무덤은 서울지역의 백제 초의 것과 공주지역의 돌방무덤과 비교되는 자료로서 평가된다. 

 

9.단양 수양개 유적

 

종 목 사적 제398호  

지 정 일 1997.10.10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182-1

시 대 선사시대

 

단양 적성면 수양개에 있는 후기구석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친 유적이다. 남한강가 충적대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강을 끼고 있는 주위의 환경이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발견된 석기들은 다양하고 당시 만들었던 기술도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후기구석기시대에서 볼 수 있는 돌날몸돌과 자루를 끼울 수 있도록 슴베가 달린 찌르개는 중국 화북지방, 시베리아 남부지방, 일본 열도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석기들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연구자료가 된다.

 

구석기시대 유적 주변에서 초기철기시대 집터가 발견되었는데, 집터의 생김새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 중원지역 철기시대 생활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수양개 유적은 우리나라 선사문화와 동아시아 선사문화의 교류를 밝히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10.충주 장미산성

 

종 목  사적  제400호 
지 정 일 1997.11.1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외 
시 대 고구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11.미륵산성

 

종 목 사적 제401호

지 정 일 1997.12.16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 산8-37외

시 대 고려시대

 

화양동 남쪽에 있는 낙영산과 성암부락 동쪽에 있는 도명산 중턱을 둘러싼 성터로 ‘도명산성’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무너져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남아있는 벽은 길이 700m에 높이가 약 2m이다.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과 고려 전기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또 건물터를 중심으로 도기조각, 자기조각, 돌로 만든 절구, 숫돌이 발견되었는데, 유물들의 성격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쌓은 성으로 보인다. 이 성은 4가지 공법을 사용하여 쌓은 점이 특징이다. 현재는 중심성과 바깥성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안의 정상부근 바위에 도명산 마애불이 음각되어 있고 문터, 건물터 8곳, 성 안팎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장치인 수문터, 우물터 4곳이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12.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종 목  사적  제414호 
지 정 일 1999.06.11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18번지 외 129필지 
시 대 신라 

이곳은 흥무왕 김유신 장군이 탄생한 곳으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김유신 장군은 만노군 태수(만노: 진천의 옛이름) 김서현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흥무대왕 으로 추봉되었다.

지금의 계양 마을 입구에 장군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라 불리워지는 곳에 1983년에 유허비를 건립하였으며, 이곳에서 북서 방향 2㎞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연보정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술 연습을 했다고 전해오는 투구바위와 치마대가 있다.

 

13.정북동 토성


종 목  사적  제415호 
지 정 일 1999.10.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351-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미호천변 평야의 중심에 있는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쟁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과 성의 위치, 주변 여건이 초기 성곽시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의 길이는 675m이고 높이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안에서는 주거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확인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를 확인했다.

 

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들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토성이다.

 

14.괴산 송시열 유적

 

종 목 사적 제417호

지 정 일 1999.12.29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375-3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성리학 중심지 중 한 곳인 우암 송시열 유적이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시대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 ‘충효절의’·‘비례부동’이란 글을 새긴 곳이 많이 있다.

 

송시열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든 곳일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한때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던 곳이다. 민족 정기회복을 위한 교육 장소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곳이다.

  

 

15.충주 숭선사지

 

종 목  사적  제445호  
지 정 일 2003.04.25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862-2외 
시 대 고려시대


숭선사는 고려 광종 5년(954)에 광종이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절터 부근에서 발견된 '숭선사'라고 씌여진 기와를 토대로 이곳이 '숭선사'였음을 알 수 있다.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3차(2000∼2002)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금당 외 탑지, 회랑지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초창 이후 3차례에 걸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배치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남문지·탑지·금당지·영당지·회랑지·동문지 등의 건물지가 확연하며, 건물의 세부적인 유구는 건물 기단부의 화강암 석축기단·주초석·적심석·석축배수로·전돌포장, 답도, 탑의 적심, 우물, 온돌 등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어 고려시대의 건축유적으로서의 보존이 필요하며 한국건축사사료로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누암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63호 
지 정 일 2005.03.25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산41 외 일원 
시 대 신라


신라말기에 조성된 이 고분군은 신라 진흥왕이 충주지방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 후 중원소경을 설치하고자 귀척들을 이주시켜 한강유적을 경영하고자 하였던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으로서, 누암리 일대에만 230여기의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발굴된 26기의 고분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것은 굴식돌방무덤이고 앞트기식돌덧널무덤 2기, 소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 3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외방무덤임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짧은굽다리접시, 바리, 합, 항아리 등의 후기신라양식 토기류와 쇠손칼, 덩이쇠 등의 철기루, 청동제띠끝장식, 금동제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가락바퀴 등의 토제품이 있다.

 

17.법주사


종 목  사적  제503호 
지 정 일 2009.12.21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번지 등 
시 대 신라


법주사의 개조로 알려진 의신이 일찍이 불법을 구하러 천축(인도)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경전을 얻어 귀국하여 나귀에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553년(신라 진흥왕 14)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법이 안주할 수 있는 탈속의 절이라 하여 법주사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법주사의 정신적 지주가 된 미륵신앙이나 법상종의 유식사상은, 혜공왕 때 이 절의 중흥에 크게 기여한 진표와 그의 제자 영심에 의하여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덕왕 때 중수하였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석물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경내에는 유명한 법주사팔상전(국보 55)을 비롯하여 쌍사자석등(국보 5), 석련지(국보 64), 사천왕석등(보물 15), 마애여래의상(보물 216) 등의 국보와 보물을 비롯하여 법주사세존사리탑(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6호), 법주사사천왕문(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 순조대왕태실(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1호)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이 밖에 대웅보전·조사각·일주문·홍전문·대종각·능인전·석조·수정암·중사자암 및 여러 대사의 비, 암지 등 많은 유물이 있다. 또 조선 후기까지 35칸에 2층으로 된 이 사찰의 중심 법당인 용화보전이 있었고, 이 전각 안에 금색의 육장상이 있었다. 그러나 1872년 당백전 주조 명목으로 대원군에 의해 육장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도 헐리게 되었다. 1989년 사월 초파일에 옛 용화보전 자리에는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이 점안되어 법주사의 새로운 상징물이 되었다. 법주사는 진표·영심 이후 도생·자정·신미·수미·일선·각성·희언 등 고승들이 그 법통을 이어 왔다.

 

18.진천 산수리와 삼용리 요지


종 목  사적  제511호 
지 정 일 2011.07.28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196-3 등 9필지 
시 대 백제


충청북도 진천군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가마터이다. 본래 사적 제325호의 진천산수리백제요지와 사적 344호의 진천삼용리백제토기요지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인접 지역에 있는 두 요지를 통합하고 사적 제511호로 재지정하였다.


진천산수리백제요지는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에 있는 백제의 토기 가마터이다. 1987년 2월 한남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마을 뒤 야산 남쪽 경사면을 발굴조사하여, 가마터 9기와 작업장 2곳을 확인하였다. 그 중 길이 약 3m, 너비 1∼1.5m의 작은 가마들은 능선에 가까운 경사면 위쪽에, 길이 7∼8m, 너비 3∼3.5m의 대형 가마는 경사면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작은 가마들은 소성실 앞쪽에 지하실 아궁이가 달려 있으며, 가마 바닥의 경사면이 약 15° 내외인 반지하식 등요였다. 대형 가마들은 앞쪽이 넓고 뒤로 가면서 점차 좁아지며, 지하에 굴을 판 지하굴식 등요로, 바닥은 20° 내외의 경사면으로 최대 높이는 2m 정도이다. 출토 유물은 모두 물레로 성형된 토기들이며 회청색 경질토기·적갈색 연질토기·회백색 연질토기로 구분된다. 모양은 승석 무늬가 찍힌 난형호 및 구형호가 가장 많고, 그 외에 심발형 토기와 완배, 화분형 토기도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들로 미루어 보아 가마에 따라 약간의 시기적인 차이가 있으나, 이 가마터는 대체로 4세기 무렵 백제의 것으로 본다.


진천삼용리백제토기요지는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에 있는 백제의 토기 가마터이다. 우리나라에서 원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3세기 이전의 것으로 알려진 두드림무늬토기, 즉 타날문토기를 만들어 냈다. 당시 가마 6기를 두고 도자기를 구워냈는데 비슷한 시기에 있던 인근 덕산면의 산수리 요지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고식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주로 고운 태토로 만들어진 타날문토기로, 몸통이 둥근 단경호와 바닥이 납작하고 주둥이가 넓은 심발형토기가 대부분이다. 타날문토기를 만들던 대형 요지군 중 대표적 도요지이다.


두 요지는 당시 토기 제작 수법에 관한 연구와 한국 토기의 제작기술과 변천과정 연구에 중요한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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