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 했고 장학금까지 받고 왔다보니 기대치가 엄청날 것 같습니다. 좀 사람들이 나를 몰라야 숨은 잠룡처럼 서서히 클 수 있는데 너무 빨리 정체를 들켜버렸네요. 이러면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합니다. 모르는 상황이라면 목표치를 소소하게 잡고 맘편히 시작할 수 있고 그러면 더 잘 할 수 있잖아요? 시험 잘보면 그 때부터 이미지를 쌓을 수 있고 성공을 해봤으니 안정감있게 이어갈 수 있죠. 그런데 장학금을 받고 왔다보니 다들 나를 다르게 보는거에요. 당연히 엄청난 결과를 보여주겠지? 당연히 알겠지? 말 안해도 잘하겠지? 이런거요. 근데 질문자님도 고등학교는 처음이잖아요? 학교도 새롭고 사람들도 낯설고 고등학교 공부도 처음인데 완성된 모습을 보여줘야만 하는거죠. 이러면 사람이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실제 실력이 충분할지라도 흔들릴 수 밖에 없어요. 계단을 차근차근 올라갈 순 있어도 날아오를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사람이 이렇게 몰리게 되면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어합니다. 음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 보호하는 거라니 뭔가 이상하죠? 자기가치이론에 따르면요.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나쁘다면 그로 인한 충격은 엄청납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내 전부를 보여준 셈인데 그 결과가 나쁘다면 내 최선, 나의 가치가 손상되는 거죠. 도전과 노력의 맹점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사람은 도저히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실패회피동작을 합니다. 실퍄 회피 동작은 말 그대로 실패할 상황을 피해버리는 거에요. 그것만 피하면 어쨌든 내 가치는 지킬 수 있으니까요. 실패회피동작에는 두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주 쉬운 도전만 반복해서 실패를 피하는 것. 항상 성공하니 만족감은 적어도 실패를 경험하진 않죠. 또 하나는 반대로 아주 어렵고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것 두가지가 있습니다. 상황이 불가능했기에, 문제가 너무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실패했다 이렇게 가는거죠.
사람들(혹은 질문자님의 걱정?)이 기대하는 것은 100점입니다. 장학금을 받고 온 우등생에 어울리는 완벽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그런 목표를 첫 시험부터 달성하긴 어려워요. 그래서 질문자님의 마음과는 달리 질문자님의 무의식에서는 저 위의 두가지 방법 중 후자를 택한 것 같습니다. 공부할 상황 자체를 없애버려서 공부 기회를 없애는 거죠. 그러면 질문자님은 잘 하고 싶었지만 이 마음이 따라주질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공부를 못하게 ㄷ힌거가. 그래서 성적이 나쁘더라도 질문자님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결론 내리고 싶은듯 합니다. 그렇게 해야 질문자님이 상처받지 않을테니까요.
잠을 자꾸만 자게 되는 건요. 질문자님이 현실에선 괴롭기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질문자님의 의식과 세포들이 잠 오는 상황을 만들어서 질문자님을 꿈 속으로 도피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질문자님이 버틸 수 있을테니까요. 그 친구들은 질문자님을 지킬 수만 있다면 세상의 인식이나 평판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답니다:) 참 눈물겹지 않나요.
이런 이유로 질문자님의 현재 상황은 그렇게 된 겁니다. 딱히 이해가 안가는 상황은 아니지요?
음 시험이 3주 남았는데 아무 것도 안하셨다고 적었네요. 정말 아무 것도 안해서 문제 하나 풀 수 없는 상태인가요? 아니면 이대로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기에 하신 말씀이신가요.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런 기대나 걱정 다 날려버리세요. 어차피 어떻게든 몰아세워서 기대치를 맞춘다고 해서 사람들이 내 노력을 알아주는 건 아닙니다. 내가 기대치에 맞추지 못했다 해서 내 슬픔을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제일 중요하지 타인의 인생까지 들여다 볼 여유가 없습니다. 뭐 들여다 볼 인생이 없어서 남의 인생을 기웃 거릴 수는 있는데 그것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겠죠. 엄청 기대하고 엄청 신경쓰는 것 같겠지만 질문자님의 성적보다 내일 점심 메뉴가 더 궁금하고 썸타는 친구의 표정과 말 뉘앙스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 그런 압박, 시선, 기대 다 던져버리세요. 지금 질문자님은 새내기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이제 막 학교에 와서 새로운 친구들 만나고 새로운 과목과 수업을 받으며 첫 시험을 치르는 거에요. 중학교는 지나갔고 고등학교에서의 새 시작입니다. 시험을 잘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으며 어정쩡한 결과를 받을 수도 있어요. 대학 다닐 때 이번 학기에 장학금 받고 다음 학기엔 학점을 망칠 수도 있답니다. 들쑥날쑥 정신이 없어서 그냥 휴학하고 등록금 모아놓고 학교 댕기자 하고 등록금을 모아뒀더니 맘이 편해져서 그 다음부터는 장학금을 쭉 받더라구요.. 공부를 안했으니 3주동안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요. 그래도 아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시험에서 걍 어려운 문제는 틀려도 어쩔 수 없다 넘어가는데요. 아 이건 공부 좀 했으면 풀었겠다 싶은 문제는 정말정말 두고두고 아쉽더라구요. 그런 문제들만 살려봅시다. 그런 문제들만 살려봐도 얼추 성적이 나올거에요. 100점이 아니면 의미없다 하더라도 70점과 0점은 다르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