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내공마이>

6.25전쟁..***<내공마이>

작성일 2009.10.19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6.25전쟁 59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

에 대해 알려주세여...

내공많아여...

급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한반도 주변 강대국 민족주의 동향과 한민족 평화통일 과제

 

정상모(문화방송 해설위원)

 

Ⅰ. 한반도 주변 강대국 민족주의 동향

 

 1. 미국 민족주의- 충성주의

 

 1) 역사적 전개

 외무부를 국무부로 부르는 미국의 글로벌 민족주의는 미국과 세계의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마치 중국이 한족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으로서 한족을 제외한 변방 민족을 오랑캐로 여기는 중화사상(中華思想)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미국 민족주의의 뿌리는 앵글로색슨이라는 인종적 민족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인들이 뿌리깊은 영국인 의식에서 벗어나 미국의 민족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게 한 데는 토머스 페인의 역할이 컸다. 그는 식민지인들에게 스스로 영국인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면서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미국 민족의 정체성이 영국이나 유럽과의 구별에서 비롯됐다는 미국 민족주의의 기원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와 결과를 낳게 된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미국의 바깥에 대해 미국이야말로 모범적이라는 미국 예외론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이 나오게 된 때문이다.

 아메리카는 다르다는 믿음은 이미 식민지시대부터 생겨나 민족의식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식민지시대부터 미국인들은 미국이 유럽보다 우월하다거나 적어도 다르다고 믿는 자의식을 가져왔다. 미국인을 새로운 인류로 본 2세기 전의 크레브꿰르와 토크빌 이후 미국의 특별성은 한결같이 유럽과 대비돼 강조됐다. 미국은 세계의 미래를 이끌 개방된 민족으로서 세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예외론적 역사관이 냉전시대 미국의 사회과학 전반을 지배하기도 했다.  미국을 신의 민족이라 믿는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은 19세기 중반 제임스 포크 대통령의 급격한 팽창이념에 따른 텍사스 합병으로 나타났다.

 1823년의 먼로 독트린에서부터 2002년의 부시 독트린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외교 관행이 돼 온 독트린의 남용은 미국 스스로를 국제정치의 보편적 기준으로 보는 선민의식의 표현이다. 하나의 적이 사라지면 또 다른 적을 만들어온 미국 외교의 역사적 패턴도 다른 무엇인가를 반대하고 부정하는 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미국 민족의식의 본질적 반영인 것이다.   

 미국 민족주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쟁을 통해 군사적 민족주의가 강화돼 왔다는 사실이다. 원주민들과의 전쟁과 1898년의 스페인 전쟁을 계기로 군사적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군사교육이 보급되고 군대의 애국적 이미지와 순국의 영예가 강조됐다. 특히 스페인전쟁은 남북전쟁의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고 미국 바깥의 적과 싸우는 용감한 미국 군대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였다. 스페인전쟁을 통해 북부의 양키 제국주의와 남부의 기사 백인주의가 결합돼 군사적 애국주의가 미국 민족주의의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말 이후 미국은 아시아 진출, 파나마 운하를 비롯한 중남미 적극 개입 등을 계속 추진하면서 전쟁과 무력을 통해 미국의 가치를 실현하고 강요하는 군사적 민족주의를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미국은 군사적 민족주의를 전개하면서 무력에 의한 불량정권 교체작업을 일상사처럼 벌였다. 멕시코(1916), 이란(1953), 쿠바(1961), 파나마(1989), 소말리아(1993), 아프가니스탄(2001), 이라크(2003)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미국의 강경한 신보수주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불량정권 교체론도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돼온 미국의 군사적 민족주의의 중요한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1차대전은 미국을 중앙집권적 치안국가로 만들고,비미국적인 것을 배척하는 호전적 애국주의가 강화되는 계기였다. 1차대전에서 미국 민족주의는 국가안보라는 특징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비미국적인 모든 것을 배척하는 미국 제1주의가 절정에 달했다.  배타적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는 미국 제1주의는 개입이데올로기, 십자군주의로 이어졌다. 냉전시대의 반공민족주의도 이미 이 때부터 나타났다. 윌슨은 1919년 11월부터 이듬 해 1월까지 파머 법무부 장관으로 하여금 볼셰비즘 동조자를 색출하고, 간첩법을 제정해 사회당의 유진 뎁스를 투옥하도록 했다.

 미국 민족주의는 2차대전을 거치며 글로벌 민족주의가 돼 버렸다. 얄타회담을 비롯해 UN 창설, 마샬플랜, 트루먼 독트린 등은 미국의 글로벌 민족주의의 표현이었다. 1949년 미국이 서유럽과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만든 것도 군사적 민족주의 세계화의 일환이었다. 세계정치에 적극 개입하는 것만이 미국과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적극적인 방법이라는 독선적 인식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미국 제1주의에 입각한 개입적 미국 민족주의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을 방치할 수 없는 일이었다. 냉전은 개입적 미국 민족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미국적인 것은 모두 자유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며, 공산주의 주도국인 소련의 모든 행위는 배척 타도해야 할 악이었다.

 미국의 군사적 반공민족주의는 소련 봉쇄정책을 위한 군사적 세계화로 나타났다. 이념적으로는 자유를 위한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한반도나 중남미, 제3세계 국가들에서 반공을 위한 군사독재가 일반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역설적인 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적을 전제로 한다. 미국인들을 집결하게 만들고 세계를 패권적으로 지배할 명분으로서 개입과 대결의 과녁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적을 세워야 한다. 독립혁명 당시에는 영국의 폭정, 1차대전에서는 유럽의 전제정치와 제국주의, 2차대전에서는 나치즘과 인종차별, 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와 제3세계 급진주의적 혁명이었다. 이제는 미국적 세계화를 반대하는 테러리즘과 이슬람원리주의로서 이라크와 북한 등 악의 축으로 꼽힌 국가들이 미국 민족주의의적으로 내세워지고 있다.

 

 2) 현대 미국민족주의의 동향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좌지우지하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주목를 끌고 있다. 이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현대 미국민족주의에는, 미국 자신은 미국 밖의 다른 나라들인 타자와 다르다는, 전통적 미국민족주의의 기본 흐름이 관통하고 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미국은 선이라는 예외주의적 시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선인 자신은 예외적인 존재로서 보존해야 할 뿐만 아니라 확장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미국 독립에서부터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팽창, 몬로주의, 서반구에서의 확장, 양차대전의 참전, 윌슨주의, 냉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있다.

 네오콘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울포위츠는 1992년 당시 체니 국방장관의 수석참모 리비와 함께 만든 보고서 「국방정책지침」에서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 군사적 측면에서 보다 공격적으로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잠재적 위협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첫째는 중국 등 잠재적 라이벌 국가들, 둘째는 대량살상무기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이다. 이 보고서는 4차대전론의 원본이라 할 수 있다.

 울포위츠는 지침서 초안에서 미국은 집단적 행동이 어려울 땐 독자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대량살상무기 보유 국가들에 대해서는 예방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9월 17일 나온 일방주의적 선제공격 전략을 핵심으로 한 부시 독트린의 내용이 울포위츠의 구상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도 군이 대비해야 할 전쟁시나리오로 제시됐다. 이라크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은 1997년 6월 3일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라는 조직을 창설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을 보면, 대표인 윌리엄 크리스톨을 비롯해 부시 행정부의 군사?외교 분야의 주요 인물들은 물론 교수, 언론인, 종교인, 기업가 등 다양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체의 목표는 군사력을 토대로 한 미국의 세계 패권 확립이다. 이 단체의 창립선언문은 울포위츠의 지침서 초안과 비슷할 정도로 그의 구상이 반영됐다.

 네오콘들은 중동지역의 석유 장악이 세계 지배의 선결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중동지역의 석유장악으로 유럽, 일본, 중국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본 때문이다. 2001년 초 미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의뢰로 좁슨 홉킨스 대학 폴 니츠 국제문제고등연구원의 중앙아시아-코카서스 연구소가 작성한 보고서 「중앙유라시아 전략분석」은 중동지역 장악으로, 러시아, 이란, 중국을 견제하고, 이 지역 국가들이 테러리스트들이나 과격 이슬람 세력과 연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CIA는 2002년의 한 보고서에서 2015년까지 이 지역 석유의 3분의 2가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으로 공급될 것이며, 이에 따라 중국의 이 지역 석유 의존도가 높아지고 이란과 이라크 등과 군사적 유대가 강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함으로써 중국의 목줄을 쥘 수 있게 된 셈이다.

 PNAC는 2000년 9월 △ 핵무기 선제사용, △ 미국을 적대시하는 국가의 정권 교체, △ 군사비 대폭 증액, △ 미 국익과 어긋나는 국제협약 폐기 또는 탈퇴, △ 중동, 중앙아시아 미군 주둔 등을 건의하는 미국 방위재건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전 지구 지배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주만 공습과 같은 파국적이고 자극적인 사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단체의 대표인 윌리엄 크리스톨이 로버트 케이건과 공동저술한 책, 『현재의 위험들』 서문에서 이라크와 북한은 미국의 중요한 이익이 침해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더라도 미국이 반드시 개입해야 할 국가라고 지적했다는 대목이 주목된다.   PNAC는 2002년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8차례나 정책의견을 발표했다. 윌리엄 크리스톨은 이 해 10월 18일 <위클리 스탠드> 사설에서 북한 핵위협의 항구적 해결책은 정권교체라고 주장했다. 

 네오콘은 미국의 국가안보전략 정책방향을 규정하기 위해 9,11 이후 국제상황과 군사정책, 전략목표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네오콘의 새로운 제국 전략 중 가장 중요한 점은 선제공격과 예방전쟁이다. 미국은 세계 어느 곳이라도 군사행동을 통해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단지 핵무기를 보유했거나 개발하려 한다는 의심이 드는 국가에 대해서도 핵무기를 예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지침까지 마련했다. 미국은 세계적 주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국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적 주권이란 동맹이나 국제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어떤 상황이 위기인가를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친구와 적을 구별해 무력사용을 결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오콘은 대테러 전쟁노선을 통해 군비확산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대자본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과거 냉전현상의 새로운 부활이며 이는 신냉전이 전개되고 있음을 뜻한다. 과거 냉전과 다른 것은 신냉전을 주도하는 네오콘이 훨씬 무모하고 급진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냉전시절의 억지전략처럼 군사력 사용의 한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애치슨은 유럽과의 확고한 동맹을 통해, 소련의 위협을 적당히 관리하되 상호 공멸의 전면전은 피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려고 했지만, 네오콘들은 유럽과의 동맹조차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미국 제국론적 입장이다.  

 

 2, 일본 민족주의론

 

 1) 역사적 전개

 일본의 민족구성은 북방의 아이누족을 제외하면 비교적 단일하다. 일본 민족의 조상은 아시아 북방의 몽골인종과 동남아시아의 말레인 등이 장기적인 융합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기원 1세기말 단일 부족국가를 세우고 그 수령을 천황이라 부르며 전 민족의 신으로 받들게 되었다.

 중세시대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축은 중국이었다. 조선이나 일본 모두 중국 문화를 숭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토쿠가와 시대 이후 일본 학자들은 전통적 세계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중국과 중국의 천자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고 나선 것이다. 안을 중국, 바깥을 일본으로 보는 화이(華夷)질서를 비판하고, 중국이나 조선, 네델란드에서 오는 물건들이 일본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우수하다는 통념을 깨버렸다.

 일본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보는 인식은 야마가 소코오(山鹿素行, 1622~1685)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일본 중심으로 크게 바뀐다.문명의 중심지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것이다. 야마가는 그 근거로 그의 자서전 <배소잔필(配所殘筆)>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들었다. 첫째, 중국의 황실은 단절이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아마테라우스의 신대(神代) 이후 그의 정통 후손들이 단절되지 않고 일본을 통치해왔다. 둘째, 일본은 무술과 장비가 우수하기 때문에 삼한(三韓)과 다른 모든 나라들이 그 우월성을 인정해왔다. 셋째, 일본은 중국보다 인성(人性)이나 용맹 등의 덕성을 잘 계승해 훨씬 뛰어나다. 야마가의 결론은 중조(中朝)라는 명칭이 중국보다는 오히려 일본에 훨씬 적합하다는 것이다. 일본이야말로 세계의 중심, 즉 중화(中華)라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사토오 노부히로(佐藤信淵, 1769~1850)는 조선, 만주, 몽골, 그리고 중국을 침략해 세계로 진출하자고 역설했다. 요시다 쇼오인은 이런 침략론을 집대성해 북으로는 만주를, 남으로는 대만, 필리핀을 침략하고 더 나아가 진취의 세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시다와 동문인 카츠 카이슈우(1823~1899)도 1863년 아시아 연대론에 따른, 조선 등의 아시아 침략론을 폈다. 세계와 일본을 재정의하고 나선 토쿠가와 막부시대의 일본 들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침략론은 학문적 이론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침략론을 실천하느냐는 정책의 문제로 발전했다.

 19세기는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확장을 꾀하던 시대로 일본도 확장대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초 영국, 러시아, 미국 등이 일본의 개항 통상을 요구했지만, 토쿠가와 막부는 이를 거절했다. 1825년 토쿠가와 막부는 일본 항구에 접근하는 모든 외국 선박들을 포격하고 일본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토쿠가와 막부를 반대하는 세력은 1868년 토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천황의 왕정을 선포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것이다. 이듬 해 토지개혁과 봉건신분제도 폐지 등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일련의 개혁이 단행됐다. 봉건징병제도도 폐지하여 서방 군대식으로 현대화된 군대를 건립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일본은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897년 말 유럽국가들과의 평등한 지위를 갖게 될 만큼 일본의 국력은 늘어났다. 대외확장을 위한 침략적 대륙정책도 본격화됐다. 대아시아주의의 기치아래 대외 침략이 시작됐다. 1874년 중국의 대만을 침입하여 은전 50만량의 배상비를 약탈하고, 이듬 해 9월에는 운양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게 불평등조약을 강요한 데 이어, 1879년에는 류구를 점령, 오키나와현으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1880년대 들어 일본에서는 아시아주의를 비롯해 연대론, 흥아론(興亞論), 제휴론 등의 논의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어느 논의든 일본 중심의 대전제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1882년 메이지 최고의 사상적?이념적 지도자로 메이지의 꿈이 곧 자신의 꿈일 정도로 스스로를 메이지와 동일시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조선과의 교제를 논하다에서 대외 전략과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대외 전략론으로는 동양맹주론(東洋盟主論), 구체적인 대외 정책으로는 일중결전론(日中決戰論)을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은 일본의 울타리라고 규정했다.

 1894년 7월 25일 일본은 전쟁 선포도 없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의 승리는 일본 민족주의가 일본 제국주의로 팽창하기 시작한 획기적인 계기였다. 1905년 일본과 러시아 전쟁의 승리로 일본인들이 아시아 공영권의 패권적 지위를 자처함으로써 일본의 군사적 민족주의는 더욱 기세를 올리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의 군사적 민족주의는 더욱 심화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주로 유럽에서 벌어짐에 따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은 아시아 쪽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일본으로서는 대륙 침략을 적극적으로 꾀할 기회였다. 일본은 전쟁이 발생하자 영?일동맹을 이용해 중국 진출을 본격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일본의 중국 침략과 태평양전쟁 도발로 일본의 군사적 민족주의는 파시즘으로 발전했다. 당시 일본 경제는 금융위기가 나타나고 국내시장도 악화돼 매우 나쁜 상황이었다. 일본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해결책을 대외침략에서 찾았다. 일본 경제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근본적 요인이 외국시장에의 의존이기 때문에 외국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한 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론이었다.

 1931년 일본은 9,18 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했다. 이듬 해 3월에는 만주국을 세우고 파쇼통치를 실시했다. 마침내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계기로 전면적인 대중국 침략전쟁을 개시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미국 진주만을 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대동아전쟁이었다.

 일본 당국은 전쟁 시기 국민사상을 통제하고 일체화하기 위하여 의무교육에서부터 군국주의화를 철저하게 강화했다. 9,18 사변을 계기로 군국주의, 대외배척운동이 학교에서 시작됐다. 국민학교에 천황사진을 발급하여 예배하도록 하고 교육칙어(敎育勅語)를 의무로 규정했으며, 1933년부터는 국정교과서를 군국주의의 내용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군사적 민족주의는 절정에 달해 일본 국민 전체가 천황의 이름아래 전쟁에 휩싸였으며, 전쟁 말기에는 천황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옥쇄(玉碎)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인 민족주의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패배의 현실을 인정하고 국가건설에 나섰다. 1980년대 들어 일본은 경제대국에 걸맞는 정치대국의 지위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본의 정치적 민족주의 움직임은 교과서 수정문제로 나타났다. 1985년에는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을 비롯해 전 각료가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신사를 참배했다. 나카소네 내각은 국내정치 총결산을 통해 정치대국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민족주의 현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86년 일본 쇼화 천황재위 60주년 기념식에는 일본 정부 요인은 물론 자민당, 재계 인사, 심지어는 노동조합의 핵심 간부들까지 참석했다. 일본의 정치적 민족주의 움직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보였으나 일본의 경제적 국력을 바탕으로 199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2) 동향

 최근 들어 새로운 양상을 보이는 일본 민족주의 동향에 대해 미국에서도 이를 주시해야 한다는 경고성 주장이 나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대외정책 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포린 어페어즈』(2003, 11-12)에 전 미 외교문제평의회 선임연구원인 유진 메튜스가 게재한 일본의 신민족주의가 문제의 글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일본에서는 신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민족주의의 종착역이 일본의 핵무장이고 대외적으로 무모한 자세를 취하는 일본의 출현이라면 그것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에게는 악몽이라는 것이다. 논문은 미국이 북한 문제로 급부상한 일본의 신민족주의 현상에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미국에게도 악몽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금기처럼 여겼던  일본 핵무장론도 정치가들의 입을 통해서 당당하게 나오고 있다. 오자와 이치로 자유당 당수와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의 핵보유 용인 발언에 자유주의적 언론도 과거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일본 민족주의가 보다 강화되는 추세임이 분명하며 이 추세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현상은 일본의 자본과 군사력의 결합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일본 경제가 1980년대까지 민수중심에서 군수경제로 변화해 왔다고 한다면, 1990년대에는 군사전략에 종속된 전략경제로 재편 중심이 바뀌었다. 그 특징은 첨단과학 기술을 기초로 군수산업의 발전과 군비확산을 추구하며, 기술이나 자원, 제반 사회시설까지 유사시 언제라도 군사용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냉전 시대 이후 자민당 장기집권의 붕괴와 함께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신보수세력은 국제사회에서의 일본 역할 증대론을 주장해 왔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모색이다. 일본은 2004년 8월 2일부터 외무성에 유엔 강화본부를 설치하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일본은 2005년 1월부터 2년간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 되는데, 이 시기에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5개국에서 10개국으로 확대해 이 중 한자리를 차지한다는 복안이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자문기관인 하이레벨 위원회가 안보리 개혁 구체안을 낼 때까지가 매우 중요한 기간으로 보는 일본은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지난 2004년 3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자문기관인 하이레벨 위원회 활동자금으로 100만 달러를 지원하고, 7월에도 교토에서 하이레벨 위원회 관계자들을 초청해 회합을 가졌다. 

 미?일 신안보 공동선언에 의한 미?일 신방위협력지침에 따라 미?일 양국의 군사협력 범위는 기존의 필리핀 이북의 극동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대되고, 일본의 군사적 역할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상황에 따라 탄력성을 갖고 증대되고 있다. 미?일 양국의 협력이 옛 소련의 위협에 대한 대응에서 중국 위협이나 대만 유사, 한반도 유사로 대응 초점을 바꾸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대하겠다는 전략적 의도인 것이다. 일본 자위대의 활동은 9,11 테러사건 이후 미국의 테러전 지원과 더불어 인도양, 중동까지 확대됐다.

 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변화는 어느 정도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1세기의 정치대국을 지향하는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군사적 역할을 늘리기 위해 법적, 제도적 정비를 추진해 왔으며, 2001년 9,11 테러사건을 계기로 이를 더욱 서둘렀다. 유사시에 대비한 유사법제 정비와 입법 작업을 마무리한 고이즈미 연립정부는 이제 마음놓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일본 사회 및 여론의 보수화 추세로 볼 때, 일본의 헌법 개정에 따른 일본의 전후정치 총결산과 일본의 본격적인 군사대국 등장은 이제 시간 문제로 보인다. 이와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2003년 방위백서에서 보듯이, 일본의 새로운 방위정책이 기존의 억지 중심에서 새로운 실질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방위태세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방위정책 방향이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추진된다는 점에서 미국처럼 예방적 선제공격 전략으로의 변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이런 변화 추세에 따라 일본과 중국의 경쟁도 더욱 치열하게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3, 중국 민족주의

 

 1) 역사적 전개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중화(中華)가 세상의 중심이며, 변방은 모두 저등한 오랑캐(夷人)라는 천하(天下)의 관념이 뿌리깊게 이어져 왔다. 그 천하의 중심은 한족이었다. 따라서 한족주의가 중국 역사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작용을 해 왔으며, 현대 중국의 민족주의인 중화민족주의(中華民族主義)의 형성과정에서도 주체 혹은 주도적인 기능을 발휘해 왔다.  

 19세기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망국(亡國)과 혁명의 문제가 결합된 중국의 민족주의 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1907년 『중화민국해(中華民國解)』에서 용맹스런 중국의 역사를 서술하며 한족이 주도하는 현대국가를 건설하자고 역설한  장타이옌(章太炎)은 중화민족이 우선 개혁을 통해 일등 강국이 되고 그 후 실력으로 세계를 태평성세로 이끌고 간다는 두걸음(兩步走)구상을 제시했다. 그의 두 걸음구상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서방식 강국의 길을 걷는다. 유럽과 일본을 모방하여 중국을 신속하게 부강한 국가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둘째, 세계에서 일등국가가 되어야 한다. 현재의 국력으로는 열강들에 대적하지 못할지라도 이는 잠시일 뿐이며, 개혁에 힘쓴다면 아주 빨리 그들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셋째, 서방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 질서를 다시 건설해야 한다. 중국 자신의 보법(步法)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일단 세계 제1의 강국이 되면 전체 인류를 구원하고 해방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중국식 인정(仁政)을 세계에 펼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실력으로 굴복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전 지구를 대동(大同)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 세계 대동의 실현이 장타이옌의 원대한 목표였다.

  마오쩌둥(毛擇東)의 전 인류의 해방구상도 두 걸음구조를 가지고 있다. 제1보는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서방식으로 국력에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국가를 압도하겠다는 것이다. 제2보는 전지구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한다는 세계혁명이다. 1950년대 마오쩌둥이 구상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소련식이었다.

 1960년대부터 그의 구상은 중국식으로 빠르게 변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서는 베이징이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논조가 각종 매체에서 공공연하게 등장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中華主義)가 다시 나온 것이다. 장타이옌의 민족주의 이상이 표현된 것이었다.

 중국의 민족주의가 한족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도 다른 소수 민족도 포함하는 중화민족주의 움직임이 생겨난 것은 1912년의 일이다. 이 해 반포된 『중화민국임시약법(中華民國臨時約法)』에서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 중화민국 인민은 모두 평등하며 종족?계급?종교의 차별이 없다고 민족의 평등권과 자결권을 주장했다. 이 때 탄생한 중화민국은 중화민족의 기초를 세운 최초의 계기였다. 중국 민족의 대명사인 중화민족은 중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는 한족을 의미했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이르러 중국의 다른 민족까지도 포함하는 총체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1924년 쑨중산은 삼민주의의 민족 항목에서 한족 중심론을 강조하면서도 중국 내 각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했다. 국제적으로는 각 민족이 독립과 평화를 쟁취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각 민족이 자결권을 바탕으로 호혜 평등의 조건에서 연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국 내 각 민족은 제국주의와 군벌에 반대하는 혁명에서 승리한 후 자결권에 기초한 각 민족의 자유연합으로 중화민족을 조직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역대 한족의 정부가 다른 피지배 민족인 번속(藩屬)을 다루는 회유 전통과는 전혀 다르게 평등에 기반을 둔 새로운 표방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56개 민족의 공화로 사회주의 가정을 구성한다는 기본 국책이 설정되고, 이에 따른 헌법이 만들어졌다. 1950년대 중기부터 1980년대 초까지 민족 동화 작업이 추진됐다. 중화민족주의의 형성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한족 지역의 저항이 있었으나 중화민족주의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화민족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원(多元)의 다민족(多民族) 개념이며, 중화민족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이 주체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민족을 족군(族群)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족군(ethnic group)이란, 인종적 의미도 있지만, 종교?언어?습관 등 문화적인 차이로 형성된 인류집단을 말한다. 족군이 민족으로 될 수도 있으며 광의로는 민족의 일종이다.

 중화민족은 중국의 각 족군들이 역사적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객관적 산물이며, 각 족군의 공통성을 실현한 것이다. 중화민족은 국내 각 족군들이 상호융화로 일체화된 과정이며, 중화민족의 아이덴티티를 공유하는 것이다. 중화아이덴티티는 몇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아이덴티티와 다르다. 또한 장래에 출현할 초민족국가로서의 연합된 유럽아이덴티티와도 다르다.

 냉전 후 주목되는 것은 서로 다른 민족주의 현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족군의 아이덴티티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족군 분리주의형의 분열적 민족주의다. 다른 하나는 연합된 유럽처럼 각 민족국가가 연합하여 더욱 큰 일체화로 향하는 민족주의다. 전자는 중화민족과 국가통일을 와해시키고 파괴하는 힘이며, 후자는 중화민족의 일체화와 응집력을 촉진시켜 주는 힘이다.

 중화민족주의가 직면한 도전은 민족국가 내부의 족군이 민족으로 상승하려고 하면서, 주체민족으로부터 탈퇴하려는 움직임이다. 어떤 족군세력이 자신의 언어, 종교, 그리고 경제이익을 강화하며 중화민족에서 탈퇴를 요구하고 나설 경우, 국가와 중화민족의 통일을 유지하려는 중화민족주의와 첨예하게 충돌하게 될 것이다. 

 

 2) 동향

 중화민족주의는 중국의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더욱 강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개혁개방으로 인해 중국 변경지역의 소수 민족인 족군의 이탈 움직임이 심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민족적 대단결과 국가통일을 강조하는 민족지상주의적 중화민족주의는 1996년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든다. 이 해에 하상주(夏商周) 단대공정(斷代工程)과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시작됐다. 국가적인 차원의 거대한 중화민족만들기이다.

 1996년 시작돼 2000년 11월 9일 완료된 단대공정은 전한시대의 사가 사마천도 연대를 모르겠다고 포기해버린 하?상?주의 역사적 연대를 확정하는 작업이었다.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모든 문명을 중국 문명으로 포섭하려는 의도였다. 중국이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을 확대하려는 팽창주의적 속셈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하왕조는 BC 2070년, 상왕조는 BC 1600년, 주왕조는 BC 1460년 시작된 것으로 설정됐다. 전설의 시대가 역사의 시대로 등장함으로써 중국 상고사가 확대된 것이다.  

 거대한 중화민족만들기는 단대공정으로 그치지 않는다. 2000년 이후 단대공정을 계승하여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 맹렬한 기세로 추진되고 있다. 이 사업은 중국 문명의 시원을 캐는 작업으로서 신화의 시대까지도 역사의 시대로 편입시켜 중화민족이 지배하는 역사적 공간을 무려 1만년 전까지로 넓히겠다는 것이다.

 이 야심의 사업은 벌써 현실로 나타났다. 전설의 제왕 가운데 하나인 요(堯) 임금의 도읍지로 알려진 산시성 타오스향에서 4천1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가 발견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건립 연대가 500년이나 빠른 것이다. 2002년 중국 후난성 용초우시 닝유안현에서는 순(舜) 임금의 무덤인 1만년 전의 대형 고분이 발굴됐다는 발표도 나왔다. 심지어는 전설의 제왕 요, 순보다도 앞서 중국을 다스렸다는 황제(黃帝)와 염제(炎帝)의 역사화 작업의 일환으로 그들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 구전 등을 집대성한 염황자료집(炎黃資料集)까지 10권으로 완간됐다.

 단대공정이나 중화문명탐원공정이 거대한 중화민족을 만들기 위한 과거의 역사적 지배 공간을 확대하려는 시도라면, 동북공정은 미래의 지배공간, 즉 영토문제에 대비한 팽창주의적 중화민족주의의 표현이다.동북공정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서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실의 관계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말한다.

 동북공정은 2002년 2월 28일 약 23억원의 연구비를 들여 중국 정부와 사회과학원, 동북 3성(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륭장성) 공동의 5년간 연구프로젝트로 시작됐다. 동북공정의 원초적 움직임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1970년대 말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인한 소수 민족의 이탈 가능성을 우려한 중국 정부는 1983년 사회과학원 직속 연구기관으로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 硏究中心)을 설립했다. 변경의 역사, 지리, 영토에 대한 연구와 이를 바탕으로 소수 민족과 변경의 영토문제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려는 취지였다. 동북공정의 결과 중 역사 부분은 밝히고 있으나 현실에 적용할 전략 부분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중국인들의 역사관은 전통적으로 화이론(華夷論)이었다. 중국사의 범주는 중원 왕조에 국한하고 주변민족은 제외했다. 그러나 중국은 1949년 정화인민공화국 수립과 더불어 중국은 현재 뿐만 아니라 자고 이래로 통일적다민족국가였다는 중화민족주의 논리를 세우고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중국의 모든 민족, 나아가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설정했다. 전통사관에서 제외됐던 수많은 소수 민족의 역사가 중국사로 둔갑하게 되는 영토지상주의의 중화민족주의 역사관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1950~60년대만 해도 중국은 고구려의 독립을 인정하여 고구려사를 한국 역사로 보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쑨찐지(孫進己)등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이러한 종래의 연구를 비판하면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견해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현재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직접적인 목표가 국가통일, 민족단결, 변경안정의 대목표에서 출발한다는 선언에서 보듯이, 중국의 국가안보 전략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동북공정이 동북변경은 통일적 다민족국가에서 분할할 수 없는 구성부분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안보와 직결돼 있다. 이러한 동북공정의 핵심이 고구려 역사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동북공정이 한반도 통일 이후 조선족 사회의 동요 가능성에 대비하여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수세적 차원의 전략적 의도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과의 불법적인 간도협약(1909)에 따라 중국 영토가 돼 버린 북간도 영유권 유지의 근거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머물지 않을 것임을 드러내는 주장도 나온다. 중국 광명일보에 실린 볜중(邊衆) 논문은 한국의 역사는 삼한-신라와 백제-고려-조선으로 이어졌으며,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왕씨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며, 반도 남부에서 신라를 대신하여 일어난 정권이라고 한국의 역사를 한반도 남쪽으로 한정했다. 고조선-고구려, 부여-발해로 이어지는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킴으로써 한반도 북부까지 장악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56개 민족들이 중화민족으로 일체화됐으므로 북한을 도와주지 말고 붕괴시켜 북한 지역을 중국 자치구로 만들자. 역사적으로 북조선의 전신인 고구려,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 중국 땅이 아니었느냐는 글들이 올라오는 현실이다.중세시대까지 동양, 세계의 중심을 자처한 중화주의가 현대적 패권주의인 중화민족주의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4, 러시아 민족주의

 

 1) 역사적 전개

 러시아 민족주의는 다양한 사고와 정향을 포괄하는 다면적인 하나의 독특한 이념체계이다. 러시아 민족주의가 러시아적인 것(Russianess)의 상실에 대한 우려에서 강력한 사회적 비판, 때로는 체제비판적인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대체로 현대 소비에트의 생활 속에서 잃어가고 있는 러시아적인 것의 강조로 일관해 온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러시아 민족주의는 그 흐름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대체로 문화주의적인 경향을 띄면서 복고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민족주의의 흐름이다. 이들은 러시아 고유의 가치, 문화, 전통들이 사라져 가기 때문에 심대한 정신적, 인구통계학적 위기를 느낀다. 그래서 이의 극복을 위해 러시아 문화와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적 가치, 혁명 이전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복원하려 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벌어진 흙으로 돌아가기 운동이 그 대표적 사례다. 농촌이야말로 러시아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최후의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산업화 결과 내부 식민지가 된 농촌이 죽어가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국가주의적 경향의 민족볼셰비즘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애국주의적이고, 지정학적으로는 유라시아주의의 견해를 보인다. 이들은 소련 내의 다른 민족들, 나아가서는 세계의 다른 민족들에 맞서서 러시아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선호한다. 이러한 러시아 민족주의의 두 흐름은 서로 혼재하기도 한다.

 러시아 민족주의는 정교 민족주의들, 반유대주의자들, 군주론자들, 심지어 파시스트들까지 포함하고 있어 하나의 범주화가 어렵다. 그러나 공통적인 특성은 서구적인 민주주의와 유럽적인 휴머니즘을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신슬라브 우월주의와 파시즘, 스탈린주의의 연계를 공공연히 선언하고, 민족주의적이고 전통주의적인 동기들을 보강하여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를 재정립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러시아가 무한한 잠재성을 지닌 하나의 대륙이나 다름없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나라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러시아를 명실상부하게 강대한 국가로 만들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이들의 고민은 러시아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이기 때문에 하나의 특별한 세계를 형성하고 그에 걸맞는 지위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타 민족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민족적 관념을 전제로 한 것이다. 러시아 민족주의는 근대화 과정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혼돈을 바로잡고, 러시아의 정신성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인 러시아적 가치체계를 세우려는 미래 전망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러시아민족주의가 다민족국가에서 최대 민족인 러시아민족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인종적 해결방식을 보임으로써 소련 내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 반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고르바초프 이후 개혁과 함께 소수민족공화국들에서 민족감정이 확산됨에 따라 러시아 혐오증(Russophobia)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 공화국에서 러시아인들은 이방인들, 이주민들, 점령자들로 경멸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소련과학아카데미 법률연구소의 저명한 학자인, 갈리나 리트비노바는 러시아인들이 소수 민족 형제들보다 훨씬 뒤쳐져 있으며, 소련의 주인이 아니라 실제로는 가장 공민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인종그룹이라고 반박했다. 1917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레닌 지침에 의거 러시아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면서, 소수 민족들에게는 러시아인과 동등한 평등을 누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인들은 후진적인 민족으로 급속하게 하락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러시아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1980년대 이전까지의 소극적인 표현방식을 벗어나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주장을 폈다. 이들은 1985년 3월과 1986년 여름 사이에 반부패 캠페인을 벌였다. 1986년 가을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진로와 방향을 비판했다. 비판의 골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급진적인 시장경제 개혁이 인민들의 궁핍화, 사회적 양극화를 가져와 궁극적으로는 러시아민족 고유의 공동체정신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였다.          유럽과 구별되는 러시아인의 특성을 부각시키려 노력한 디미트리 발라쇼프는 우리가 서구를 모방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으로 우리 자신을 파괴했다고 코스모폴리탄적 입장을 비난하면서 19세기 슬라브주의자들의 전통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세 가지 목적을 제시했다. 첫째는 생태 환경의 회복, 둘째는 민족의 농업적 전통의 회복, 셋째는 러시아 민족문화의 회복 등이었다. 그는 다민족적인 조국의 다른 민족들,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러시아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정체성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상황 인식에서 러시아의 전통문화를 중시했다. 러시아민족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재탄생해야 하며, 러시아민족의 생활문화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문화의 중심적 근거로 민중과 함께 해온 문학과 러시아 정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소비에트 시대에 러시아 정신의 모체인 러시아의 자연과 대지가 파괴돼 환경적 재난이 생겼다고 환경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들은 민족 위기의 타개책을 러시아의 가치에서 발견해야 한다며 다가올 시대를 염려했다.

 

 2), 동향 

 소련 크렘린 당국은 공식적으로는 러시아민족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 체제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당국이 배타적인 러시아의 이익을 거론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러시아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전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서구지향적 자유주의 세력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1989년 3월 소비에트연방 인민대의원 선거 과정에서 러시아민족주의 세력들이 선거연합을 하면서 최초의 정치적 결속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급진적인 서구적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을 반대하며 러시아의 정신성을 잃지 않는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의 궁핍화를 막을 대안 제시에는 미흡했다. 대중적 지지를 끌어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러시아민족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소연방을 가장 우선해야 할 가치로 여기는 소비에트민족주의 노선과 러시아인의 이익과 권리를 중시하는 러시아공화국민족주의 노선의 두 갈래 흐름이 맞섰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8월 실패로 끝난 쿠데타는 소비에트민족주의가 러시아공화국민족주의에 패퇴하는 계기였다. 옐친 세력의 연방 권력 장악으로 자민족 중심의 러시아공화국민족주의가 강력하게 대두하게 됐다.

  개혁과정에서 나타난 러시아 대중들의 궁핍화, 사회 전반에 만연한 범죄, 정치적 불안정, 러시아의 대국 지위 상실 등은 러시아민족주의자들로서는 충격적인 위기였다. 보수 민족주의자들은 옐친의 친서방 외교노선이 서방국가들에게 일방적인 양보만을 제공한 굴욕적인 것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러시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됐다.

 러시아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식과 역사의 위대성을 재발견하려고 했다. 이들의 자민족 중심의 사고는 일리야 글라주노프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나는 온 세계가 러시아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나는 세계의 운명이 여러 면에서 러시아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러시아 문제를 정확하고 현명하게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러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러시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소연방이 해체된 이듬 해인 1992년 이래 신제국주의라는 용어가 자주 나타났다. 신제국주의적 사고에는 강력한 지위 복원과 영토회복의 염원이 담겨 있다. 러시아인들은 신제국주의적 관념의 주제로서 자신들의 지리적 공간을 설명하는 데 유라시아라는 말을 사용한다. 유라시아는 옛 소련이 지배했던 정치적 공간을 언급하는 것으로, 강력한 반서구주의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러시아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주장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

 러시아민족주의자들의 신제국주의적 사고는 1992년 8월 최고 소비에트의 외교 분과위원회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러시아판 몬로 독트린으로 불리는 이 보고서는 옛 소련의 전체 지정학적 공간은 러시아 연방의 사활적인 이익이 걸려 있다고 강조했다. 1993년 2월 옐친은 국제연합을 포함한 국제기구들은 옛 소련의 영토에서 평화와 안정의 보장자로서 러시아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처럼 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보는 시각은 러시아 민족의식의 본질적 요소다.

 신제국주의적 사고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1993년 11월 2일 러시아연방의회가 답변확정한 러시아연방의 군사독트린과 이 해 4월에 나온 러시아외교정책 개념이다. 신 군사독트린은 러시아민족주의를 반영하여 러시아 안보에 대한 위협을 매우 광범위하게 규정함으로써 러시아의 이익에 대한 대외적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 군사독트린은 러시아인들의 정치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 시민의 권리, 자유, 정당한 이익에 대한 탄압을 러시아에 대한 실질적 및 잠재적 위협의 원천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옐친은 신 군사독트린의 발표와 함께 러시아 연방의 방어선은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의 외부 경계와 일치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Ⅱ,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과제

 

 1, 미?일동맹의 강화와 중?러의 대응

 

 1) 미?일동맹의 강화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미국의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면서 이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강화된 패권주의 의도는 미국 국방부가 2002년 1월 8일 의회에 제출한 핵태세보고서와 2002년 9월 20일 미 백악관이 발표한 미국의 국가안전보장전략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선제공격 전략이 21세기 미국의 패권을 지키기 위한 국가안보의 핵심전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적이 군사력 사용 의도를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억지가 핵심전략 개념이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안보환경이 크게 변해 전통적인 억지전략으로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적들에게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깡패국가들이나 테러리스트들의 적대적 행동을 방지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미국으로서는 선제적 군사행동을 해야한다는 논리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과 패권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적의 공격이 없더라도 어느 때든 반테러리즘을 구실로 군사적 행동을 벌이겠다는 의도다.

 이러한 미국의 선제공격을 뒷받침하는 패권주의 전략이 미사일방어체제이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미사일방어체제 추진을 한층 가속화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불량국가들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빌미로 미사일방어체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잠재적 패권 도전 가능성이 있는 국가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패권전략인 것이다.  미국은 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하면 한반도, 대만해협 등 자국의 중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역에서 보다 자유롭게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미국이 핵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핵태세보고서에서도 핵공격 대상에 중국과 러시아가 포함돼 있다.

 이처럼 중국을 사실상 제1의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군사전략적 의미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되고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가속되는 이유이다. 이같은 배경에서 1996년 미?일 신안보 공동선언과 이에 따른 미?일 방위협력 지침개정, 전쟁 대비 법안들의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미?일 동맹관계를 미?영 동맹관계 수준으로 격상시키겠다는 의도다.

 일본이 자유롭게 국제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집단자위권을 갖도록 일본 헌법을 개정하는 문제도 미국이 더 적극적이다.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은 전쟁 포기를 규정한 일본 헌법 제9조를 미?일 동맹관계의 저해요인으로 꼽으면서 개헌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의사표시를 했다. 그는 일본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강력하게 지지하지만, 국제적 이익을 위해 군대를 보낼 수 없으면 상임이사국 진출은 곤란하다며 일본의 헌법 9조 개정이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전제조건임을 내비쳤다.

 이는 미국이 일본의 정치대국화, 군사대국화를 강력하게 밀어부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속셈은 중국 포위전략이다. 미국과 일본은 1998년 미사일방어체제를 위한 공동연구에 착수하고, 탄도미사일 요격시험을 2004-2005년 2년에 걸쳐 하와이에서 실시하게 된다. 일본은 2007년까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를 도입해 배치할 계획이다.

 미국은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에 따라 일본의 미 군사기지의 역할과 기능을 크게 강화하고 있다. 주일미군을 아시아?태평양 지역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미국이 일본 자위대와의 일원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일 협력이 과거에는 해상 부문에 중점이 두어졌으나, 앞으로는 육상?항공 부문으로까지 확대돼 육?해?공군 전 부문에서의 연대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11일 일본 이바라키현 태평양 상공에서는 미공군 KC135 공중급유기가 히노마루(일장기)를 부착한 F15 전투기에 공중급유를 실시했다.

 미국의 대이라크전을 3개월 여 전에 전황까지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히다까요시끼는 세계 대변동의 시작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미국의 다음 목표는 북한이고 그 다음 목표는 중국이라고 예언했다. 예측 근거는 부시 행정부가 현존하는 위협세력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적대세력에 대해서도 강력한 대응전략을 모색하고 있음을 들었다.

 미국이 9,11테러 이후 선제공격전략으로 전환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안보 일체화 단계까지 미?일 방위협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필리핀과도 군사협력 관계를 확대하는 움직임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포위해 들어오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중국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추진을 중국에 대한 심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이를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가 전지구적인 차원의 전략적 균형과 안정을 파괴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전에 이롭지 않으며, 중국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에 대해 더욱 완강한 반대입장을 보여 왔다. 중국은 전역미사일방어체제가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균형을 깨려는 시도이며, 자국의 영토 일부분인 대만에 무기를 판매해 하나의 중국정책에 쐐기를 박으려는 대중국 위협책으로서 상당히 위험스러운 구상이라고 본다. 주롱지 중국 총리는 1999년 3월 15일 전인대 폐막 기자회견에서 대만이 참가하는 전역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은 중국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이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중국은 미사일방어체제가 중국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든다. 첫째, 일본이 미?일동맹을 통해 미사일방어체제를 추진하는 것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촉진시켜 중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되며, 둘째, 미국이 대만을 미사일방어체제에 합류시킴으로써 보호우산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대만의 독립을 조장하게 되어 결국 중국의 숙원인 통일을 요원하게 만들며, 셋째, 한국까지 이 체제에 편입되면 극동지역의 군비경쟁과 군사적 긴장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점 등이다.

 

 2) 중국?러시아의 대응 

 중국은 90년대 중반 이후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세 가지 변화가 있었다고 본다. 즉 패권주의와 강권정치의 증가, 군사적 개입주의의 증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발전격차 심화 등이다. 이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은 1997년 4월 신안보 개념을 발표했다. 이 개념의 핵심은 상호신뢰, 상호이익, 평등, 협력등 네 가지로 구성된다. 이러한 신안보관도 국방력 증강과 군의 현대화를 바탕으로 관철될 수 있다는 게 중국의 입장이다.

 중국은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경제 현대화에 치중했다. 그러나 미 패권주의가 점차 강화됨에 따라 경제중심적 발전 지상주의에서 군사안보 영역을 동시에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중국의 안보정책이 경제중심 군사력 보조라는 기존 전략에서 양자 균형발전론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신안전보장의 물질적 기초인 양자 균형발전을 바탕으로 중국의 국방력 강화가 국책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 중국의 국방력 강화는 국방비의 증액, 국방 현대화의 적극 추진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에 맞서기 위한 확증적 최소 핵억지 전략에 따라 소형이지만 최첨단의 무기 개발에 나섰다. 2000년에는 10~100㎏ 정도의 극소형 위성으로 적국의 위성에 붙어다니다 필요할 때 자폭하는 기생 위성을 개발해 미국을 긴장시켰다. 국방 현대화 노력의 가장 획기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는 2003년 10월 16일 세계에서 세 번째로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 발사에 성공한 것으로 이는 세계가 놀란 사건이었다.

 중국은 자국 영해의 경제권 보호와 해역 영유권 분쟁에 대한 대비를 위해 10년 내에 자국 연안에서 500㎞까지의 해역 제해권 장악을 추진할 움직임이다. 제2단계로 2020년까지 제해권 장악 해역을 2500㎞까지 확대하고, 2005년에는 전세계 해양을 누빌 계획이라는 것이다. 중국 해군은 미국이 대만에 최신 구축함과 잠수함 등 판매에 동의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로부터 군함과 전투기를 도입, 해군 전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을 제어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전략적 관계를 강화해왔다. 1996년 두 나라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은 이후 최근 2~3년 사이에 양국 교류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가장 주목되는 중?러 협력관계의 진전은 2001년 중?러 선린우호협력조약의 체결이다. 두 나라는 8개 조항의 공동성명에서 미국의 패권주의적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추진과 이를 위한 미국의 일방적 ABM조약 파기, 전역미사일방어체제의 대만 내 구축 등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하고, 유사시 안보위협에 공동대응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함으로써 군사적 유대를 한층 강화했다. 2001년 5월 상하이 5개국(중?러?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 정상회담에서도 중국과 러시아는 공동전선을 폈다.

 중국은 오는 11월 베이징에서 ARF(아시아 지역안보포럼)와 별도로 동남아국가연합 10개 회원국 등이 참여하는 신안보 포럼 회의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아세안 국가들과의 공동 해상감시 순찰활동과 해군 합동 군사훈련 실시도 공공연하게 주장한다. 태평양 지역 중소 국가에 대한 중국의 우군(友軍) 확보노력도 활발하다.

 중국은 미얀마를 거쳐 인도양으로 나가는 운송로를 확보했다. 미얀마의 동의를 얻어 인도양으로 통하는 출해권(出海權)을 획득한 것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톈진(天津)?상하이(上海) 등 동부 해안 도시를 통해 태평양으로 나가는 운송로밖에 갖지 못했다. 중국의 인도양 확보는 중국의 전략이 태평양 위주의 일양(一洋)전략에서 태평양과 인도양 이양(二洋)전략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2004년 7월 미얀마와 군사기지 건설 등의 협력방안에 합의함으로써 준동맹관계를 맺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0년 5월 취임과 더불어 강력한 러시아, 굳건한 경제건설을 내걸고 국제무대에서 미국에 의한 1극체제를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면서 동북아 외교 강화에 나섰다. 그는 11월 브루나이 APEC 정상회담 참석에 앞선 출국성명에서 러시아가 유라시아 국가임을 강조하고, 러시아와 중국은 평등과 신뢰의 동반자 관계를 바탕으로 지구적 안정을 추구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2000년 7월 북?러 공동성명과 2001년 2월 한?러 공동성명에서도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에 반대하면서 미국의 패권주의를 저지하려는 러시아의 의지가 드러난다.

 미국의 패권주의와 미?일 군사동맹 강화에 맞선 중국, 러시아 등의 대응으로 태평양지역에서는 신냉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홍콩의 경제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2004년 7월 29일 태평양 지역이 미국과 중국의 신 냉전지로 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단기적으로는 대만의 고립화, 중장기적으로는 미국에 대한 도전 등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며 태평양에서 미국과의 이익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3) 대만 문제를 둘러싼 긴장

 중국은 대만이 본토로부터 영구 분리될 경우 미국의 전략적 교두보가 될 것으로 본다. 반면에 중국이 대만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다면, 중국은 해상 방어선을 보다 확장할 수 있게 된다. 대만문제는 중국의 영토 통일 문제에 그치지 않고 동북아 지역의 전략 구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사활적인 이익이 걸려있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은 대만이 분리독립을 공식화할 경우 무력사용도 불사할 것이라는 입장을 천명해왔다.

 중국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대만문제에 강경책을 펴왔다. 1996년 대만에 대한 미사일 실험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2000년 대만 총통 선거 결과 강경정책이 대만에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켰다는 인식에서 온건정책으로 선회했다. 미국의 압력으로 대만의 독립을 저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대만과의 교류가 대만 독립 기류를 막고 통일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했다.

 그러나 대만 민중의 독립 정서가 오히려 확산되고, 국민당 내에서도 대만화, 혹은 대만 독립 경향이 더욱 커졌다. 하나의 중국정책에 대한 미국의 태도도 한계를 보였다. 미국 정부 내에서 하나의 중국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중국은 미국의 압력으로 대만 독립을 저지하겠다는 중국 정책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됨에 따라 다시 강경책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은 1979년 대만과의 관계 재설정을 위해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제정했다. 미국은 이 법에서 대만해협의 현상을 비평화적으로 변경하려는 모든 시도를 미국의 관심사로 규정함으로써 유사시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것이다. 대만 안보를 위한 무기 공급도 명시했다. 중국은 대만관계법이 중?미 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라며 미국이 이 법을 통해 대만 독립을 사실상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미국의 대만정책 기조는 현상 유지이다. 미국은 중국이 대만과 대화로 문제의 해결에 나설 것을 종용해왔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가 전략적 모호성원칙을 유지한 것과 달리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백히 함으로써 중국을 안심시키는 한편, 대만에 대한 방위를 공언하는 등 대만 개입을 분명히 했다. 2003년 12월 중국 원자바오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부시 미 대통령은 하나의 중국정책을 지지하고 대만 독립을 반대한다면서도 대만에 대해 강압이나 무력을 사용할 경우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중국이든 대만이든 현상을 변경하려는 어떠한 일방주의도 반대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대만의 독립 추진세력은 문화적 대만 독립론을 바탕으로 대만 독립을 부르짖어 왔다. 문화적 대만 독립론은 일제의 대만 점령 때 발생해 반일단계, 반서구화단계, 반중국단계로 3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 문화의 대만본토화운동이 정치적 차원의 목적을 갖고 정치의 대만본토화운동의 성격을 띄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당시 국민당 당국은 대만 본토 출신의 영웅인물들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본토화의 기치를 내건 당외활동도 적극 전개했다. 대만은 최근 수년동안에는 교육개혁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문화적 대만 독립론의 자료들을 종합해 향토언어교육을 통한 대만본토화운동을 전개해왔다. 중국은 이에 대해 대만 본토문화와 중화문화의 대립을 조장하는 행위라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입장이다.

 대만문제는 2004년 5월 재선된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이  2006년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강행 의사를 밝힘으로써 긴장국면으로 들어섰다. 이 해 7월 17일 미 하원이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를 허용하는 대만관계법 승인을 재천명하자 중국이 내정간섭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섬으로써 대만문제를 둘러싼 긴장은 더욱 높아졌다. 중국과 미국은 각각 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을 벌였다. 대만해협 등 남중국해의 군사적 긴장은 1996년 3월의 위기를 연상할 정도의 수위에 이르렀다.

 중국이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한 육?해?공 합동훈련의 목적은 대만해협 제공권 장악, 대만 상륙작전 등 한마디로 대만침공이었다. 중국은 유사시 50만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을 투입해 대만의 동서부 해안에 기습 상륙, 대만을 남북으로 2분한 뒤, 2주만에 섬 전체를 점령한다는 작전계획이다. 중국에서는 심지어 핵선제 공격론까지 대두했다. 일부 전인대 대표와 정치협상회의 위원들이 중국 공산당 중앙에 대만에 대한 선제 핵공격 금지정책 폐기를 건의한 것이다. 이런 핵선제 공격론은 대만의 중국 싼샤(三峽)댐 기습공격 시나리오에 대한 대응 및 보복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대만도 26년만에 군사훈련을 재개했다. 대만은 중국의 침공 조짐이 있으면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와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소 싼샤(三峽)댐 등 주요목표를 선제공격해 중국의 반격능력을 마비시키는 독전갈 작전계획으로 대응할 태세다. 미국은 양안충돌에 대비하기 위한 위기 가상훈련인 드래곤 선더작전에 이어 서태평양에서 항공모함 7척과 전함 50척, 항공기 600대를 동원한 서머 펄스 2004대규모 해상훈련을 실시했다.또한 각기 다른 두 가지 군사훈련이 대만과 미?일간에 동시에 진행됨으로써 미?일 합동 군사훈련에 대만도 참가하게 될지 주목된다.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긴장은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가장 위험한 수위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천수이볜 대만 총통이 제시한 새 헌법 제정과 대만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중국 국무원 산업경제연구부 핑페이 주임도 이 시기에 양안관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2,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과제

 

 1) 신냉전의 징후와 냉전의 교훈

 미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경향이 심상치 않은 단계로 접어들었다. 열강들의 민족주의 경향이 침탈의도까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침탈도 서슴지 않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한반도 주변에서 기승을 부릴 때가 바로 한민족의 수난기라는 과거 역사의 뼈아픈 교훈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한민족의 생존의 평화에 대한 침탈 위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한민족은 근본적이면서도 시급한 과제에 직면하고 있는 셈이다.

 동북아시아는 전쟁중이라고 표현할 만큼 배타적 민족주의로 인한 분쟁과 갈등이 갈수록 첨예하게 빚어지고 있다. 한?중 역사전쟁, 중?일 에너지 전쟁이 이미 벌어졌고, 한?일간 동해 표기를 둘러싼 갈등과 일본의 독도 침탈 의도에 따른 분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3국간 갈등은 겉으로는 역사 인식과 배타적 경제수역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동북아에서 패권적 의도를 드러낸 중국의 중화민족주의와 일본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가 본질적 요인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이 일본 쪽 편을 드는 현상이다. 2004년 3월 중?일 간에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댜오위다오(尖閣?일본명 셴카쿠) 열도에 중국인 시위대가 상륙했을 때, 미국은 셴카쿠 열도는 일본의 행정 하에 있으므로 미?일 안보조약이 적용된다며 중국에 경고했다. 이는 일체화 단계로 접어든 미?일간의 긴밀한 군사동맹관계의 반영으로 보인다. 문제는 한?중 역사전쟁이나 한?일 역사 및 독도 영유권 갈등에서 미국이나 일본, 중국 모두 한국 쪽 입장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이 광개토대왕 비문이 중국의 글이라고 소개했다가 항의를 받고 철거하는가 하면, 적지 않은 일본 학자들이 고구려사가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에 일본의 한국 고대사 왜곡인 임라본부설이 오르고, 미국 정보기관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미 한민족의 침탈 수난이 시작된 셈이다. 한반도의 일본 지배를 용인한 20세기 초 미?영?일 우호?동맹체제가 부시?블레어?고이즈미로 이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만약 독도 분쟁이 터졌을 경우 미국은 어느 쪽 편을 들지, 냉철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시급한 문제는 점차 심화되는 신냉전 움직임이다. 미국의 중장기 대외정책을 대변하는 하스 미 국무부 정책국장은 2002년 4월 외교정책 방향을 설명하는 연설에서 냉전, 탈냉전, 탈탈냉전으로 시대 구분을 하고, 탈탈냉전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시대 구분에 따른 탈냉전기는 1995년에 끝나고, 1996년부터 탈탈냉전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96년은, 앞으로 신냉전 시대가 올 경우, 그 태동 시점이 될 것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인 네오콘의 군사전략가 엘리옷 코언도 탈냉전에 이은 제4차 세계대전이 이미 시작됐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1996년 미국은 세계전략의 핵심인 미사일방어체제를 주요 방어전략으로 규정했다. 가장 주목되는 사건은 이 해 4월 미?일 안보공동선언의 발표이다. 중국에서는 신안보 개념이 발표됐다. 대만의 미사일 위기가 터진 것도 이 해이다. 이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반도에서는 1998년 북한의 금창리 핵위기가 발생했다.

 이처럼 심화되는 신냉전의 움직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신냉전의 전개에 따라 한반도에 밀어닥칠 전쟁과 재앙의 위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이 1945년에 태동해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플랜에 의한 제도화 과정을 거쳐 1948년 민족이 분단되고, 급기야는 1950년 한반도 전쟁이 터져 냉전 정착의 희생물이 되고만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칫 한민족이 다시 신냉전의 제물 신세가 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2007-2008년 위기설을 예의 주시하며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한민족의 위기는 이보다 앞당겨 올 수도 있다. 중국의 고위 관리가 예상한 2006-2007년의 대만위기가 한반도로 번질 수도 있다. 주한미군의 제2사단이 북한의 포격 사정권을 벗어나는 한강 이남 이전으로 배치되는 것도 2007년에 완료될 계획이다. 북한의 미사일방어에 목표를 둔 미사일방어체제도 2007년부터 배치될 전망이다. 북한은 주한미군의 피해 위험성이 줄어드는 만큼 미국의 북한 공격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우려한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로 앞으로 닥칠 한반도 위기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시급한 한반도 평화의 과제다.

 

 2)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북한 핵문제로 전쟁 위기에 노출된 한민족의 긴급한 과제는 무엇보다도 전쟁을 막아 생존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비록 전쟁이 터지진 않더라도 북한 핵위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북한 위협론을 빌미로 한 신냉전이 펼쳐지게 되는 상황이다. 북한 핵문제는 이미 1994년 제네바 핵위기, 1998년 금창리 핵위기, 2002년 우라늄 핵위기등 4년에 한 번 꼴로 터져 왔다. 이 때마다 남북간 화해?협력과 교류사업도 차단됐다.

 북한 핵문제의 진정한 평화적 해결은 냉전의 해소와 함께 남북 교류를 통한 민족공동체 지향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한 북한 핵문제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는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로 이어지는 계기이기도 하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곧 한반도 평화체제, 나아가서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의 토대인 셈이다. 한민족의 평화와 통일은 물론 동북아의 공존?공영의 평화를 위해서도 북한 핵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국제적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6자회담의 틀을 통한 북한 핵문제의 해결 모색에서 보듯이, 북한 핵문제는 이미 북한과 미국, 남한이라는 한반도 차원을 넘어 국제적 차원의 문제가 돼버렸다. 이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냉전 구조와도 연관됨을 뜻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동북아의 냉전의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6자회담 참가국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심한 만큼, 다시 말해 신냉전 현상이 가속될수록, 북한 핵문제의 해결 가능성은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 핵문제 해결의 핵심적 관건인 북미간의 불가침조약 체결을 일본의 고위 관리가 반대하고 나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대 이유는 일본에 미칠 영향 때문이다. 북미간의 불가침조약 체결은 미?일 동맹관계를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이른 바 북한 위협론을 빌미로 한 미사일방어체제 도입, 일본의 유사사태 법제 정비 등  미?일 군사적 동맹관계를 강화해온 명분의 약화에 대한 우려다. 미?일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한 일본의 정치?군사 대국화 노력에도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본 것이다. 

 이는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동북아의 냉전형 동맹체제가 역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냉전형 한?미 군사동맹 관계가 북한 핵문제는 물론 남북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같은 맥락의 요인으로 분석된다. 이는 동북아에서 강화되는 신냉전형 동맹체제가 북한 핵문제 해결, 나아가서는 한반도 평화체제나 동북아 평화공동체 건설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토대가 될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해서는 한반도 및 동북아의 구조를 냉전형에서 평화형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동맹의 미래를 위한 조정회의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 의미가 막중한 이유이다. 이 회의를 통해 한?미 동맹이 신냉전이 아니라 평화지향의 관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과제-평화민족주의

 동북아에서 점차 치열해지는 신냉전 현상의 배경에는 이 지역 패권을 겨냥한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의 자국 중심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냉전의 결과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패권 유지에 세계전략의 초점을 두고, 동북아에서는 미?일 군사동맹관계의 강화를 통해 이를 관철하려 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표현이 중국과 북한 봉쇄전략이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이후 일본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인 중화(中華)라는 자국 중심적 민족주의를 발전시켜온 일본도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며 정치?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는 추세다. 중국은 동북공정등으로 역사침탈의 배타적 팽창 의도를 드러낸 중화민족주의를 부쩍 강화하는 현실이다. 공산권의 맹주였던 러시아 민족주의의 지향도 유라시아를 표방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와 역할 강화다.

 이들 국가들의 민족주의가 보이는 공통점은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는 자민족 위주의 배타적 성향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한민족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적인 존재로 인식하여 배타적으로 이익을 주장하며 다른 민족의 이익을 침탈한 일이 역사상 별로 없다. 한민족의 민족주의는 외세 침략에 맞선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북한이 1980년대 이후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주장하며 주체의식을 강조하지만, 이념적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배타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인 성격이 짙다. 세계화의 기류 속에서 민족주의, 심지어는 역사 교과서 폐기론까지 나올 정도로 한민족의 민족주의 기반은 오히려 취약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반도 주변의 배타적 민족주의의 제1의 침탈 대상이 한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일제 지배, 제2차대전 이후 미?소의 한반도 점령, 냉전으로 인한 분단과 전쟁, 권위주의적 냉전체제 등이 최근의 침탈 역사였다. 최근 배타적 민족주의가 부활해 일본의 영토침탈, 중국의 역사침탈현상까지 나타나는 현실이다. 자칫 북한 핵문제를 빌미로 열강들의 민족주의가 한반도에서 충돌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사의 진실은 외세로부터의 한민족의 생존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민족의 사활이 걸린 북한 핵문제에서 한민족의주도적 해결원칙강조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북한 핵문제가, 한민족의, 한민족에 의한, 한민족을 위한 해결이 되어야 비로소 한민족 평화체제의 실현이 가능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한민족 침탈로 귀결될 위험성이 높다. 배타적 민족주의의 문제점과 폐단을 모두 인정하더라도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민족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민족자존과 자주의식마저 부정돼서는 안 된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나아가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체제를 위한 근본적 과제는 자국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차지하려는 열강들의 민족주의의 극복이다. 이들 민족주의가 나름대로의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힘에 의한 평화로서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특히 힘으로 강제된 평화는 더욱 그렇다. 우선 평화의 개념부터 억압과 착취가 없고, 인권과 사회정의가 보장된 상태에서 사람마다 자신의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이나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진정한 평화여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도 폐단과 문제점을 극복하여 각 개별 민족 문화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인정하면서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이익을 도모할 민족주의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유럽공동체도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려는 신민족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의 움직임이다. 진정한 평화의 실현을 위해 평화민족을 정치적 주체로 한 평화민족주의는 모든 민족이 지향할 범민족적, 범국가적 완성형 민족주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평화민족주의의 구현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의 본질적 표현이다. 또한 동북아 국가들의 상이한 역사와 전통, 이념, 종교, 문화, 관습을 초월하는 동북아의 평화적 통합에도 기여할 것이다. 평화적 통합이 한반도에서 동북아로 확대될 때, 한반도의 분단으로 막혀있는 동북아 국가들의 발전전략이 원할하게 소통함으로써 동북아 공영의 평화도 기대될 수 있다. 평화민족주의는 세계의 분쟁과 갈등을 넘어선 세계의 평화적 통합에도 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세계평화주의 이념이다.  끝

6.25전쟁..***<내공마이>

6.25전쟁 59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 에 대해 알려주세여... 내공많아여... 급합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 민족주의 동향과 한민족 평화통일 과제 정상모(문화방송...

6.25전쟁 포스터

제가 내일 포스터 그리기 대회를 하거든여 그림이나 그리는 특징좀 자세하게 좀 알려주세여.... 채택 되시면 내공 20이요... 마이 없어도 좋은 답변 기다리겠슴돠!!! .....

6.25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싶이 6.25전쟁은 북한과 우리나라 남한의 전쟁입니다. 사실 1950 대에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광복을 마이하고... (내공 처먹고 있는 중..;;) 그러면 전 물러갑니다. 답글안주면...

6.25전쟁 관련웹툰,영화,드라마,광고

6.25전쟁 관련웹툰,영화,드라마,광고 쫌가르쳐주세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공겁나마이걸테이까 진짜빨리빨리빨리 빛의속도보다빠르게 지금필요한건 스피드...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생긴거 맞죠?...

... 전쟁 후 미국에 '마이지나악' 이라는 조약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소련과 미국의 대립으로 북한과 남한은 나눠 졌죠 그걸 경계로 휴전선이 생긴 것입니다.

영어번역해주세요~수행평가임 내공100

... 1950년대 6.25 전쟁이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인트로디우스 마이 셀프 이런식으로써주시면감사^^영어를못해서..잘해주시면 내공드리고...

영화 탑10

... 1.마이파더 요거 정말슬펐죠 .. ㅠㅠ 영화끝나고나서 집에서 도 울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6.25전쟁 하 ...... 정말 스릴굿! 약간슬펏죠 내공걸어요 4. 실미도...

호국보훈 글짓기!!내공팍팍!!!

... 하지만 지금은 두개의 땅으로 나누어져있다 6.25전쟁은 많은사람들에게 씻겨나갈수... 체택 마이마이해드릴께요 내공 팍팍 몇줄더 써주시길 바랍니다.. 더이상 생각이 안나요...

재외동포좀 알려주세요.

... 대신 내공마이마이 드릴꼐요.내일 새벽5시까지 부탇드려엽^^ 이름:라면왕 이철호... 6.25전쟁 때,노르웨이 2.무슨 까닭으로 그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까? 포탄 파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