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선비들

우리나라 선비들

작성일 2009.08.06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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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가 선비정신학교 거든요... 그래서 방학숙제로 선비보고서 작성해야 되는데..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서.......님들의 지식을 저에게도 나누어 주세요!!!!

 

우리나라 선비들 대해서요!

 

이렇게여...

 

문익점

한일: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지고 왔다

때: ????

 

이렇게요

이름만 적지 마세요! ㅠ.ㅠ

 

 

 

 

*그리고 욕설 저주글, 내공냠냠 등은 신고합니다 ~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선비정신

단재 신채호는 소도의 제단 앞에서 맹세를 올리는 젊은이를 선비라고 불렀다고 조선오천년대의 제일문사에서 밝히고 있다.
이들 젊은이는 그 씨족을 보호하고 그 씨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맹세하는 씨족의 정예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조의선인:고구려 태종 때에는 국중행사에서 수두교도들의 무술, 가무, 사냥 등에서 우수한 자를 선인이라 했으며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학문과 기술로 그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선인은 조의를 입고, 수두교도들은 허리에 조백을 두루고 다녔다고 하여 조의 또는 조의선인이라고 한다.
태백일사에 을지문덕은 조의 20만으로 100만 수나라 대군을 격파하였고 욘개소문은 9세에 조의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밭갈이 하다가 재상으로 발탁된 을파소는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인의 떳떳한 일이라고 하였고, 을밀대를 세웠다는 을밀선인 때에는 그 무리가 삼천이나 되었으며 이들은 독서, 습사, 삼신노래, 다물흥방의 노래를 불렀다고 하니 분명히 이들은 그 시대의 젊은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라 하겠다.

-신라의 화랑도: 최치원은 난랑비 서문에 '우리 나라에는 현모한 도가 있으니 풍류도라 이른다. 교의 기원이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이는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한다. \' 고 적고 있다.
현묘한 삶의 원리로 진리를 탐구하고 심성을 도야하고 자연에 접화하는 도덕교육, 직관교육, 예술교육을 주된 교육내용으로 하는 화랑도는 고구려의 선인과 함께 고조선의 조의선인의 맥을 이어온 선비의 맥으로 볼 수 있다.

-고려의 신랑:고려의 성종 때 이지백은 선랑을 실시해야 한다는 진언을 하였으며, 예종은 국선을 대관의 자제로서 행하라고 하였다. 또 의종은 선풍의 쇠퇴를 걱정하였으며 충렬왕 때 미소년의 무리인 선랑을 ·의 무리로 육성하였다. 선랑 중에 민정은 10세에 되었으며 국선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고려 또한 선비의 맥을 잇기 위해 힘썼음을 알 수 있다

1) 선비의 어원

-선비란 어질고 지식있는 사람

선비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어질고 지식있는 사람'을 뜻하는 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선비의 '션'은 몽고어의 '어질다'는 말인'sait'가 변형된 'sain'관련되고 는 몽고어 및 만주어에서 '지식 있는 사랑'을 뜻하는 '박사'의 변형인에서 온 말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또 선이 선비의 음역을 한자로 나타내었다고 보는 견해로 '은'은 '山과 人'으로 된 글자로써 산에 사는 사람이란 글자이다. 따라서 이는 황하유역의 중국문화에서 나온 것이 라기 보다는 장백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선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문무를 겸비한 이상적인 사람

단재 신채호는 '소도의 제단 앞에서 맹세를 올리는 젊은이'를 선비라고 한다고 소개한 바 있다. 소도라는 곳은 우리 민족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제례의식 장소였는데 이러한 의식을 주재하는 선비는 문무를 겸비한 이상적인 사람임을 추측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조선시대에 선비라는 말을 한자어로 표기함에 있어 '士'와' '를 사용하였다.
'士'는 벼슬한다는 뜻인 와 관련된 말로써 지식과 기능을 갖추어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설문해자에서 '사(士)' '일한다' '섬긴다'는 뜻이 있으며 사(士)는 열(十)과 하나(一)의 결합으로 된 회의문자로 보고 있다. 곧 열을 미루어 하나에 합한다고 풀이하면 박문약레와 통하고 하나를 미루어 열에 통한다고 풀이하면 하나의 도리를 꿰뚫는다는 오도일이관지의 뜻과 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는 설문해자와 예기에서 유, 윤이라 설명하고 있다. 유는 사람의 도리를 익혀 자기 몸에 젖게 한 뒤 부드러운 모습으로 남을 가르쳐서 마치 하얀 종이 위에 물이 스며들 듯이 상대방의 마음 속에 가르침이 젖어 들 게 하는 사람을 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선비란 상고시대에 고신도를 배경으로 내려온 문무를 겸전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말하며 시대의 변천에따라 유교를 배경으로 한 문무를 함께 갖춘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바뀌어 왔다고 하겟다.

2) 선비의 개념

우리는 흔히 선비라는 말을 떠올리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선비의 바른 모습을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선비의 바른 모습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부를 탐하지 않는 고결한 인품의 사람(삼성국어사전), 학문과 덕행을 갖춘인격체 등으로 선비를 정의하기도 한다. 또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양반이나 지식층의 사람들, 벼슬을 하지 않고 재야에 있는 상위 신분층을 가리켜 선비라고 하지만 이들을 몯 선비라고는 볼 수 없다.

-선비는 실천 철학자

선비는 철저한 윤리 교육을 거쳐 실천 철학을 익혀야 하며 유교 경전에도 밝아야 했다. 비록 양반의 신분으로 태어났더라도 선비의 학문을 터득하지 못하면 선비의 행세를 할 수 없었으며, 비록 농사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선비의 학문을 익혀서 선비로서의 자격 요건을 갖추면 떳떳한 선비로 행세할 수 있었다.
조광조가 갓바치를 선비로 대접하면서 교유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선비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의해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덕행을 고루 갖춘 하나의 인격체로 규정한 것이다.

-선비의 가치는 德

선비는 그 가치 기준을 재주보다 덕에 두었다. 송의 사마광은 '대저 총명하여 사물에 밝고 굳센 것을 재라하고, 정직하게 한쪽으로 편벽되지 않은 것을 덕이라 하며, 재는 덕의 자요, 덕은 재에 앞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재와 덕을 함께 갖추면 성인이 되는 것이며, 재와 덕을 함께 잃으면 우인이 되고, 덕이 재를 앞지르면 군자라 하고 재가 덕을 앞지르면 소인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선비의 덕을 옥에 비긴 것은 그만큼 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유교가 성행한 조선시대에 재보다 덕을 수선한 것은 덕치주의의 실현을 최상의 정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인격 형성에 있어서도 재보다 덕을 우위에 두었음은 당연하다하겠다.

-선비는 학덕 겸비인

선비는 또한 학문을 닦고 행실을 깨끗이 하여야 하며 구차하게 이득을 구해서는 안되었다. 정을 다하고 실을 다하며 남을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되고 의가 아닌 일을 해서도 안되었다.

-선비의 개념

선비는 학덕을 겸비한 인격자요, 단아한 문사이며 수양된 능력인인 동시에 겸손한 예술인으로 직업여하를 막론하고 멋있는 사람이라 하게다.

3)선비정신의 개념

-입지

선비정신의 근저는 입지에 있다. 대의를 위하여 봉사하겠다는 뜻을 세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했다.

이황은 '선비가 병폐를 일으키는 것은 입지 즉 뜻을 세우지 못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선비가 세운 뜻이 확고하면 하는 일이 정의 롭고 공론을 그르칠 열려가 없다.

-선비는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침

선비는 국난을 당하면 목숨도 바치며, 득을 보면 취하기 전에 먼저 그 의를 생각한다. 자기를 알아주면 자기 몸을 버릴 수 있는 정신,정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을을 당할지언정 구차하게 살기 위해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예의와 염치를 지킴

비록, 빈궁한 생활을 하더라도 도덕을 숭상하고 실천했으며 반드시 예의와 염치를 지켜 자신의 책무를 다 하였다.

-선비정신의 개념

이와 같이 선비정신은 뜻을 세워, 경건한 마음으로, 학문과 덕을 쌓아, 올바른 길로 지조를 지켜 살아가려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현대선비의 모습

이기주의를 탈피하기 위해 옛 선비들의 공동체를 위한 의의 정신을 ㄱ{승 발전시키고, 청렴의 실천으로 물질편증 사상을 바로잡아 2세들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맑고 밝은 사회에서 살아가게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올바른 가치과 교육을 통하여 도덕적인 심성과 태도를 길러 도덕적인 사회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현재의 교육과정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보다 더 적극적인 교육활동을 통하여 인성 교육에 비중을 두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가꾸고자 하는 선비의 모습은
따뜻한 심성에 예의와 염치로 의리와 지조를 지키는 수행의 수법 인격체라고 말할 수 있다.

내용출처 : [기타] http://www.gunam.hs.kr/korea/file/main2-12.htm


조의선인

내용출처 : [기타]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한단고기(桓檀古記)- 임승국 역(譯) 조선상고사- 신채호 상식 밖의 한국사- 남경태, 새길(1995)


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十또는 七임>服) 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 선배는 머리를 박박 깍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킨다. 선배는 화랑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

화랑은 원화(源花)라는 여성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좋은 가문의 청년 중에 덕행 있는 자를 곱게 치장하여 화랑으로 만든 것에서 보듯이 외모와 몸치장을 중시하여 여성적인 반면 선배는 매우 남성적이다. 선배의 독특한 외양 때문에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의 병사들은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숭상(崇尙)한 고려의 최영 장군조차 \'당이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나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라고 선배를 찬양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보고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에 나오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은 선배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조의선인의 눈부신 활약이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 안시성 전투였다.
단태종의 당군(唐軍)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많은 공성기구(攻城機具)를 사용해 안시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을 치는 바람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해 버리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기록은 이 장면을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뛰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검은 옷의 용사(勇士)들을 조의선인이라 부른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한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된다. 을파고나 명령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었고, 우리 문화전통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구려 제22대 안장왕(安臧王)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多勿邦之歌)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일본의 사무라이(武士)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신라의 화랑제도가 시작되기 2,500여 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며 심신을 단련하던 미혼의 자제들을 국자랑(國子郞) 이라 했으며(11대 단군인 도해단제 재위 57년 -단기 3891년, 서기 전 1891년), 그들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했다한다..(13대 홀달단제 20년- 단기 3763년, 서기 전 1763년).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 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이요 인은 '선배'의 배를 빌려 쓴 이두문이며, 백의 (帛衣), 조의(早衣)는 우두머리 <上首>의 옷과 빛깔, 예속은 무사 모의 깃 절풍(折風)에서 유래한 것이다.

학자들간의 선인(先人, 仙人)을 관직으로만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발해사에 선인을 '사 정병(士正兵)'이라 하고, 삼국 사기에 '선비는 싸움에 당(當)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한 것을 보아도 선인이 '선배'라 부르던 무사단(武士團)에서 유래한 이름을 알 수 있다. '선배'는 원래 신수두(臣蘇塗)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臣蘇塗: 신수두는 하느님(天帝,天神)을 모신 대신단(大神壇)이 있는 가장 신성한 숲(樹林)인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마니산 참성단이 이에 해당한다.

수두(蘇塗)는 신수두(臣蘇塗)의 대신단(大神壇) 을 본받아 각지방에 만든 신단(神壇)으로 마을마다 남아있던 당산(堂山)의 당집, 신목(神木)등은 그 유물들이다.》
대제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 활도 쏘며, 혹은 깨금질도 하고, 혹은 택권(택견)이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으로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가무(歌舞)를 연(演)하여 아름다움과 추함<美惡>을 보며, 대수렵을 행하여 그 잡은 양<射獲>의 많고 적음을 보아 그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一者>를 ' 선배'라 칭하고 선배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녹(祿)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가실(家室)에 누(累)가 없게 하였다.

(온달과 평강공주에 보면 온달은 3월3일 낙랑언덕에서의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함으로써 선배로 뽑힌다.)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講>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講習)하거나 일신(一身)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困苦>을 사양치 않았다.

선배중에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早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두대형 혹은 태대형-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대형-이라 일컫고, 맨 아래는 소형이라 일컬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스스로 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사람과 같이 영광스런 일로 보고,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선배'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명문)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오직 '선배'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해상잡록(海上雜錄)에서도 '명립답부(明臨答夫), 연개소문( 淵蓋蘇文)은 조의 선인 출신이다.' 라고 하였고 또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총명하여 9세에 선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니 그 사실로도 선인(先人)이 단순한 관직명이 아니고 무사단 '선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함경북도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의 선배의 유종(遺種)이니 고려도경에 "재가화상은 화상(和尙:중)이 아니라 형(刑:형벌)을 받고 난 사람으로 중과 같이 머리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徐兢)이 다만 지나(支那 china:중국) 한대(漢代)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노(奴:노비)라 일컫는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 받은 사람이라 억지 판단을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遺風)을 유지하여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 왔는데 선배란 명칭은 유교도(儒敎徒 -글읽는 사대부를 선비라함)들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재가화상이라는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송도(고려수도 개경)의 수박(手搏)이 곧 선배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支那)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져 나라에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외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등 여러 장군들과 그 외 크고 작은 의병들을 이끌고 왜병을 공격했던 의병장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평소에 학문과 무예를 부지런히 갈고 닦아 국난에 대비했던 것이다. 흔히 권율 장군은 문과에 급제했으니 문관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항상 병법을 연구하고 나라안의 여러 지역들을 두루 유람하며 지형과 지세를 면밀히 살폈으며 검술에도 아주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행주대첩에 앞서 1592년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義兵)들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배고개(梨峙)에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왜군 정예부대를 맞아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1진을 용감하게 지휘하던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격전 중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져 사기가 떨어지고 1진의 전열이 무너지자 2진에 있던 권율장군이 벽력같이 호령하며 도망치던 군사들을 베면서 독전(督戰)을 계속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호남을 보존하였다.

권율장군의 군영(軍營)은 군기(軍紀)가 매우 엄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투 중에는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제대로 싸우지 않는 비겁한 병사들은 벙거지에 칼끝으로 표시해 두었다가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 즉시 끌어내 즉결처형을 했다 한다.

선비정신은 일제하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말타기와 사격을 잘 했는데 뛰어난 명사수였다고 한다.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김좌진장군은 어려서부터 병법서를 즐겨 읽고 말타기와 칼쓰기를 부지런히 익혔는데 나라가 망해가자 15세에 종들을 해방시키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 준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주에서 그를 만나본 독립운동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동서양의 군사학에 통달해 있었다고 한다. 청산리 야간전투 때 독립군이 산정에 먼저 올라가서 양쪽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 후 일본군이 거의 올라왔을 때 살짝 빠져나감으로써 일본군들끼리 싸워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이를 두고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에서 김좌진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선비정신을 지킨 선비들 ...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등사육신 ...임금을 위하여 끝까지 충성 하며 절개를 지키고 죽음을 선택했다..(조선 세종 ~세조)

 

이황,이율곡 서경덕 ...성리학의 대가로 유교사상에 입각한 엄격한 생활을 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조선 중종~선조)

 

정약용...실학자,목민심서 흠흠심서등 많은 저술...(조선정조)

김정희...학자로서 추사체라는 독보적인 서체를 개발 ..(조선순조)

 

 

 

우리나라 선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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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선비들 너무 많다

... 세상이 선비들이 왜이리 많을까요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우리나라도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그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코로나부터...

우리나라 선비들이 공부하던 사서삼경은...

... 우리나라 선비들이 공부하던 사서삼경은 어떤책들인가요? 답변부탁드립니다. 사서(四書)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이고 삼경(三經)...

우리나라 선비

우리나라 선비이름과 그시대를 5-10개정도만.. 3개쯤.. 내공 10걸어요. 삼국시대 박제상 관창 백결 선생 고려시대 백운 이규보 조충 조선시대 방촌 황희 최치운 화담 서경덕...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비

...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비와 그 선비의 관련된 일화 쫌 ;; 빨리요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비면 저는 퇴계이황과 이이(5000원에 새겨진 얼굴)이 날것같습니다 퇴계 이황과 이이는...

[급]우리나라의 '청렴의 대표적인 선비'

우리나라의 '청렴의 대표적인 선비'에 대해서 많은글 부탁드립니다ㅠ.ㅠ 찾아보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서 못찾겠어요! 조사수 [趙士秀, 1502 ~ 1558] (조선 전기) 왜 청렴인물인가?...

우리나라의 청렴의 대표적인 선비 및...

... 그래서 정말 급한데..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렴한 선비와 그 선비에 대해 자세한 내용 좀 부탁드립니다ㅎㅎ 아!내용이 자세하되 A4용지 한바닥정도로 요약해 주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