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었던 책중에 고려대학교 김호진 교수가 쓴 <한국의 대통령과 리더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리더십을 포함한 인품과 정치적 업적 등 다양한 방면으로 대통령을 탐구한데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도서라 할 것입니다. 역시 저 또한 답변하는데 있어서 이 도서를 참고해서 말씀드리도록 하죠.
책에 보면 장면 편에서 저자는 이렇게 평합니다. "인간 장면은 지성 있는 신사였고, 종교인 장면은 독실한 신자였다. 한편 정치인 장면은 불의를 거부하는 지사형이었다. 그러나 국가경영자 장면은 정권을 도난당한 무능력한 지도자였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저도 학생신분이고 특별하게 근대사에 관하여 깊이 있게 공부한 바가 없어서 역사적 배경이라든지 여타 상황을 짜임새 있게 설명하기는 좀 힘듭니다만 모르는 사람이니 모르는 사람에게 더 쉽게 알려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좀 써내려가 보겠습니다.
실제로 장면은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던 당시로서는 중산층 이상의 유복한 사람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처럼 맨해튼 카톨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땄던 엘리트였구요. 이후 교직에 진출했지만 곧 교직과는 전혀 풍토가 다른 정치계에 입문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가톨릭계에서 대표자 자격으로 어찌보면 징발되었다 이렇게 평하는 것이 옳을 텐데요. 말하자면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타의에 의한 정치입문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이후 장면과 관련한 대소사와 모두 밀접한 연관관계를 지니는데요. 일반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대부분의 위인들이 모종의 콤플렉스나 목숨을 걸만한 대의명분이나 계기를 통한 것과는 다르게 단순한 학자로서 운명적인 입문 때문에 정치적 신념이랄 수 있는 특별한 정체성이 없었고 단순히 현실 순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일제 때 다마오카 쓰도무라 창씨개명했던 것이 대표적으로 그러한 그의 신념이나 인품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장면은 가톨릭을 배경으로 제헌의원이 되면서 종교인을 포괄하는 것을 기반으로 상당한 정치적 입지를 지니게 됩니다. 무엇보다 영어가 능했고 미군정 때 입법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이승만처럼 흔하지 않은 미국통이었기때문에 그의 정치적 입지나 신망은 당시 미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 자연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 부통령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승만과는 당적이 달랐었기 때문에 사실상 부통령이지만 아무런 정책결정권한이나 실권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빈자리에 앉아있는 허울뿐인 부통령임과 동시에 이승만의 눈엣가시로서 국정에서는 소외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에 대해서는 아시지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도록 압박하는 과정에서 장면은 스스로 물러났고 어찌보면 정권을 승계했어야할 입장에서 국정은 완전히 파탄해버렸고 바야흐로 내각책임제로의 개헌(3차 개정헌법안)이 가결되면서 나라는 완전하게 뒤바뀝니다.
실제로 이후 총선에서 장면이 속해있던 민주당이 압승하는데 그 과정에서 신파와 구파의 계파 대립이 심화되고 여러가지 갈등 끝에 장면은 다시한번 신파 몫의 총리로서 장면의 내각이 출범하게 됩니다. 한편, 구파 몫으로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추대되구요. [이것은 정치와 관련된 것인데 권력집단을 구성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단순한 대통령제가 아니라 이원적이면서 내각제의 성격을 띠는 형태의 한국적인 특수한 통치형태를 지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장면은 특별한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 이역시 계파간 갈등 상황에서 순전히 자리 싸움을 이기기 위한 출범이었기 때문에 매우 불안한 출범일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현실로 이루어져 나라를 소용돌이에 빠지도록 하는데 이릅니다.
뭐 여타 장면 정부는 이러한 출범 자체의 성격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말하자면 계파단 극렬한 갈등 속에서 통치력과 리더십 있는 국정 운영을 해나갈 수 없는 형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호진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장면을 또 이렇게 평가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한 민주론자" 지극히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실제로 장면 정부내내 지금 보다 더 많은 시위와 집회 국민의 민주적인 발언권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보면 우스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진짜로 너무도 많은 시위가 일어나서 시위하지 말자는 시위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그의 집권으로 잠시나마 자유와 민주라는 것을 맞볼 수 있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통치력의 부재나 확고한 정국운영의 비전이 없었기에 힘겹게 잡은 민주화의 기회를 이후 수십년 이후로 놓쳐버렸다는 것은 쓰라린 결과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장면에게는 실권자로서 컴플렉스나 강력한 동기가 없는 상황에서 우유부단한 군주로서 거듭날 수 밖에 없었고 곧 이것은 그를 파멸에 이르게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