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정치와 사회제도에 대해서 아리켜 주세여

고려의 정치와 사회제도에 대해서 아리켜 주세여

작성일 2008.03.31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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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정치와 사회제도에 대해서 정확하고 빠르게 지금 빨리 바른 답을 해주세요 제발요


#고려의 정치와 사회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거쓸라고 했는데 너무길어서 그냥 퍼오겠음..

 

고구려의 정치 (근데 사회제도 정치나 거의 비슷한거 아님?)

고구려의 정치적 기반으로는 소노부·계루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

5부족 연맹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가 왕위를 대신하였다.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등장하였고

전 왕족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절노부의 대가에게는

고추가라는 특별 칭호를 주었다.

이는 신라의 갈문왕, 백제의 길사와 같이 귀인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초기의 관제는 왕 아래에 상가·대로·패자, 이하 주부·우태·승 등의 관리가 있었고,

왕과 제가는 사자·조의·선인 등의 가신을 거느렸다.

평양 천도 이후 행정조직과 관등조직이 정비되어

수상인 대대로·태대형 등 10여 관등이 정비되었고,

수상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수상인 대대로는 대막리지 ·태대막리지라는 별칭이 있었다.

관등명을 보면 형 ·사자가 붙은 것이 많았는데,

형은 연장자라는 뜻으로 족장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며,

사자는 지방의 조세징수자의 뜻을 의미하는 것이다.

행정구역은 중앙을 동 ·서 ·남 ·북 ·중(내)의 5부로 나누어 대가가 통치하였다.

지방행정구역은 5부의 연맹체가 5부의 행정구역으로 전환되었다.

각 부 밑에는 여러 성이 딸려 있었다. 각 부의 장을 욕살, 성의 장을

처려근지 또는 도사라고 불렀다. 이 지방장관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겸직하였다.

특수행정구역으로 평양성·국내성 ·한성을 삼경이라고 하였다

 

동북공정에 관련해서는 태왕이라는 명칭과 연호를 들 수 있지요

 

태왕은 왕중에 왕이라는 뜻으로 광개토대왕도 대왕이 아닌

 

광개토태왕이셨구요 정식시호는 국강(광)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입니다

 

연호는 영락이라는 중국과 다른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정치제도에서는 저는 찾아보기 힘드니 다른 분들의 대답을 기다리십시오오.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은 많지만 다른 분의 지식in 답변을 참고 하겠습니다아

 

(1)우선 고구려의 영역이 현 중국 영토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고구려가 활동한 당시 중국 즉, 중원은 섬서성, 산서성,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 일대였지, 고구려가 위치했던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골, 연해주 등지는 아니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그들 지역은 변방이었을 뿐이었다. 중국은 명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만주지역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만주지역을 차지한 명나라 시대 조차 만주지방에는 한족(漢族)계통이 아닌 동이족 계통인 만주족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동북 3성에 한족 인구가 급증한 것은 청나라 말기로 채 몇 백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청나라는 만주지역을 자신들의 발상지라 여겨 한족의 이주를 금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오히려 단군조선시대부터 대원국(대발해국, 고영창이 거란 말기 세운 발해유민국가)이 멸망할 때까지 3천년 이상 만주의 주인은 한족이 아닌 우리민족이었다. 역사적으로 따져보아도 고구려사는 중국측보다는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중국측의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2)고구려가 중국 역대왕조에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쳤다고 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 또는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측의 주장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살펴보면 조공과 책봉은 동아시아 외교 관례의 하나일 뿐 이었다. 고구려가 중국 왕조로부터 낙랑군공.요동개국공'이라는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보면 안된다. 만약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라면 당시 중원보다 강했던 돌궐, 토번 또한 중국의 책봉을 받았으니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라는 말도 안되는 얘기가 성립된다.중국 왕조 중 한나라는 초원의 패자 흉노에 수없이 조공을 바쳤는데 그들 역사서에는 오히려 흉노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혹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도 거꾸로 중국 왕족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로 바꾸어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3) 중국은 "왕건은 신라 장군이었고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를 건립했다. 왕건은 신라 김씨 계통으로 고구려 고씨의 위를 계승한게 아니었다. 왕씨 고려는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고 수도 개성은 신라의 옛 땅이지 고구려의 옛 땅이 아니다"는 식으로 고구려를 계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중국측의 역사 왜곡이다. 분명히 사서에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나와있다. 왕건이 고려라고 국호를 정한 것도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에서였고, 발해 세자 대광현이 고려에 귀순하자, 그에게 동족의 예를 베푼 것을 보면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식이 뚜렷하다고 볼 수 있다. 거란의 침입 때 서희는 거란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벌일 때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정했고, 원래 고구려의 경계를 따지자면 도리어 요가 고려의 땅을 침식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중국측 기록인 송사에 기록되어 있다. 송사 고려열전을 보면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측의 주장은 자신들의 정사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4)한반도와 만주 대륙을 하나의 구획으로 했던 한민족의 역사 무대가 한반도로 좁혀진 것은 고려 이후이며, 한반도 유사 이래 변함없이 만주는 한민족의 터전이었다. 북한 지역이 중국 역사에 귀속된다는 중국 측의 주장은 정도를 넘어서는 억지이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 신라지리적인 의미에서 중국의 범위는 만리장성 이남일 뿐이다. 현재 중국 국경선 자체가 만주족의 정복왕조인 청(淸)나라가 개척한 것으로, 만주족의 역사 또한 한족 중심의 중국사로 편입될 수 없다.

 

(5)고구려를 세운 민족은 맥족으로 흔히 예맥족으로 알려진 족속이다. 후한서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는 일명 맥이이다. 따로 별종이 있어 작은 물가에 의지하여 살아 소수맥이라 불린다. 좋은 활을 생산하는데 맥궁이 바로 이것이다" 후한서를 보면 알 수 있듯 고구려를 세운 종족은 맥족임을 알 수 있다. 예맥족은 고대 동이족의 일파로 화하족(현 중국민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이었다. 동이족은 '동방의 큰 활을 쏘는 민족'이라는 뜻으로 고대 중국인들은 동이족을 두려워하고 군자의 나라라고 경외해왔다. 동이족의 일파 중 고이라는 종족이 있는데 혹자는 이 고이가 고구려의 전신이라고 주장한다.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으로 구성된 종족인데, 예족은 고조선과 신라를 세운 종족이고, 맥족은 부여와 고구려, 백제를 세운 종족으로 이들이 한민족의 직계조상이라고 한다. 중국인을 형성한 종족인 화하족과 고구려 아니 한민족을 형성한 동이족 좁게는 예맥족은 본래 근본이 다른 민족이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6)고구려와 백제 또는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서로 통역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고구려 장수왕 때 백제 개로왕의 신하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 투항했다는 것과 도림이 쉽게 개로왕에 접근했다는 점, 신라 거칠부가 고구려를 염탐하러 갔을 때 아무 꺼리낌 없이 의사소통을 했다는 점에서 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비슷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우리나라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는 걸로 보아 삼국의 언어는 지금보다 복잡한 사투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주정된다.

 

"후한서 권 85 고구려"

동이족들은 서로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삼국지 권30 고구려"

동이의 옛 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같다.

 

후한서 권85 동옥저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

 

중국 사서들을 보면 예, 맥, 부여, 고구려, 옥저, 진한, 변한, 백제, 신라의 언어가 같다고 나오고, 물길, 읍루가 상이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사서들을 종합해 볼 때 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그 뿌리가 비슷하므로 의사소통에 별 지장이 없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7)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면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113만 대군, 50만 대군 등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와 수, 당이 싸운 것, 그것도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여 싸웠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 아닌 당당한 자주국가, 중국과 대등한 제국이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만약 중국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수와 당은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일개 지방정권에게 철저하게 패배하는 중앙정부가 있었는가? 결국 수와 당이 엄청난 대군을 거느리고 몇 번이나 고구려를 쳤다는 것은 고구려가 그들의 지방정권이 아닌 그들을 위협하는 대제국임을 말한다. 일찍이 당 태종은 고구려를 자기(당)들과 비슷한 수준의 학문을 지닌 문명국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에 뒤지지 않는 대국임을 말해준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을 구사할 수 있었을까? 영류왕 때 당의 사신으로 고구려에 파견된 이의침이 고구려왕이 부르자 엎드려 기어가서 절하고 다시 엎드려 국서를 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록은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 아닌 중원을 통일한 수, 당 조차 두려워 한 대제국이었음을 알려준다.

 

(8)고구려는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면 고구려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가졌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종속국이 아닌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뜻한다. 고구려 천하관 내에서 고구려는 북연, 백제, 신라, 가야, 부여, 동부여, 거란, 말갈, 실위, 지두우, 왜 등에게 조공을 받고, 이들에게 분봉을 내려주는 황제국(=태왕국, 고구려는 황제라는 호칭 대신 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과 같다. 고구려와 수, 당의 대결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과 중국 중심의 천하관 간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광개토대왕: 영락, 장수태왕: 건흥)을 보면 고구려가 자주국임을 증명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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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정치와 사회에는.....

 

---귀족이 아닌 양인도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될수있었다.

 

---세금이 신라 때보다 크게 줄었고,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는 기관도 생겼다.

 

---지방에 관리가 파견되어 왕명을 지방에까지 전하였고, 지방의 호족은 향리가 되어 지방관을 도왔다.

 

---고을마다 학교가 세워져 유학의 정신이 널리 보급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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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강> 고려의 정치와 사회

 (1) 고려의 정치 변천과 대외 관계

고려의 건국

&

호족 연합 정권

 (10C전반)

  <태조의 정책>

 1) 민생 안정 : 취민유도(取民有度)

                     불교, 풍수지리설 존중(훈요10조)

 2) 호족 세력 통합 : 정략 결혼, 사성(賜姓) 정책

    ○ 호족 → 중앙관리나 향리로 임명

                  (지방관 파견 못함)

    ○ 사심관, 기인 제도 : 향리 세력 견제

 3) 북진 정책 : 영토 확장, 거란 배격, 서경 중시

   * 서경을 중시한 이유?

      북진 정책 추진, 왕실의 독자적 세력 형성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고구려의 계승자

 ○발해유민 흡수

 ○영토 확장

  (청천강∼영흥만)

 ○거란 배격

     (만부교 사건)

 ○송과 통교(광종)

왕권의 안정

&

유교 정치

사상의  답변확정

(10C 후반)

  <광종의 왕권 강화책>

 1) 노비 안검법

    ○ 국가의 재정 기반 확대

    ○ 구세력을 누르고 왕권 강화

 2) 과거 제도 : 신구 세력의 교체

 3) 공복 제정,  주현 공부법,  칭제 건원

  <유교 정치 사상의 채택> - 성종의 정치 -

 1) 최승로 시무28조 건의

 2) 중앙집권화 : 12목에 지방관 파견

 3) 중앙관제 (3성 6부)

 4) 국자감 설치, 문신월과법 실시

 <거란(요)의 침입>

 ○ 침입 격퇴

 ○ 강동6주 차지

 ○ 천리장성 축조

    (압록강 어귀

   ∼동해안 도련포)

 ○ 고려, 송, 요

   삼국의 세력 균형

   → 평화유지

거란 침입 격퇴

&

문벌  귀족

사회의  전개

  (11C)

  <문벌 귀족 사회 성립>

  ○ 유교 정치 사상의 답변확정으로 중앙 집권 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 형성

  ○ 호족, 6두품계열 유학자 → 중앙 관리

     → 대를 이어 정치를 주도하면서 문벌 형성

     → 과거, 음서의 특권을 통한 관직 독점

     → 문벌 귀족 사회 형성

문벌 귀족의

보수화

&

금의 압력

   (12C)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

 1) 관직 독점(권력 장악)

 2) 경제적 특권 확대 (과전, 공음전, 토지 겸병)

 3) 귀족 사회의  분열 :

     이자겸의 난,  묘청-서경 천도 운동

                ★ 서경 천도 운동 ★

 <여진(금)의 압력>

 ○ 별무반 편성

    → 9성 축조

        (1107 윤관)

    → 1년만에 환부

 ○ 여진 성장

    → 사대관계 요구

 ○ 보수적 문벌

    귀족 세력은 정권

    유지를 위해 금의

    압력에 굴복 

    →사대 관계

 ○ 북송 멸망

    → 남송 성립

개 경 파 (김부식)

서 경 파 (묘 청)

 보수적 문벌 귀족

 신진 관료 세력

 정권 유지를 위해

 금의 사대 요구에 굴복

 자주적 혁신 정치 추구

 칭제건원, 금국 정벌 주장

 보수적 유교 정치 사상

 풍수지리설과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

 신라 계승 이념

 고구려 계승 이념

무신 정권 성립 &

몽고의 침입

 (1170∼1270)

  <무신정권의 성립과 고려 사회의 변화>

 1) 정치

     ○ 무신 중심의 권력기구

         (중방, 교정도감, 도방, 정방)

     ○ 문벌 귀족 몰락  → 문신 관료 등장

 2) 경제 : 전시과 체제 붕괴 → 농장 확대

 3) 사회 : 반무신란(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농민, 천민 봉기

 4) 문화 :

     ○ 조계종 발달             ○ 사대부 문학 발달

     ○ 팔만 대장경 조판       ○ 금속 활자 발명

 <몽고(원)의 침입>

 ○최우 : 강화 천도 

 ○민중의 대몽항전

   …충주, 관악산

 ○개경 환도

   → 삼별초의 항전

  (강화→진도→제주)

 ○자주성 손상

 ○남송 멸망

원의 내정 간섭 &

권문 세족 성장

(13C말∼

  14C전반)

  <자주성의 시련>

  ○ 원의 내정 간섭        ○ 일본 정벌 (정동행성)

  ○ 관제 격하               ○ 몽고풍 유행

  ○ 쌍성총관부 설치(화주) → 공민왕때 무력 탈환

  ○ 동녕부(서경),  탐라총관부  설치

      → 충렬왕 때 회복

  원의 내정 간섭

 속에서 권문세족

 성장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

신진 사대부의

성  장

(14C 후반)

  <반원 개혁 정치>

 1) 반원 자주 정치 : 

      친원파 제거, 관제 복구, 정동 행성 폐지

      몽고풍 제거, 쌍성 총관부 탈환

 2) 개혁 정치 : 

      정방 폐지, 전민변정도감 설치(신돈 기용)

      교육, 과거제 정비 → 신진사대부의 성장

 3) 실패 원인

    안) 권문세족의 반발, 신진 세력의 미성숙

    밖) 원의 계속된 압력

 ○ 원, 명 교체

 

 ○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 신흥 무인 세력

     성장(이성계)

 

  (2) 고려 중앙 정치 조직에 나타난 귀족 정치의 모습

정 치

기 구

중서문하성

 재부(백관 통솔) + 낭사(간쟁, 서경)

상서 6부

 吏 兵 戶 刑 禮 工 (실제 행정 업무 담당)

중추원

 추밀(군국기무) + 승선(왕명출납)

삼   사

 화폐와 곡식의 출납 회계

어사대

 감찰 기구 낭사와 더불어 언관의 역할 수행

귀 족

정 치

특 징

 1) 권력이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신과 추밀에 집중되어 있다.

 2) 고려의 독창적 기관으로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최고 회의 기구 2가지는?

도병마사

재부 + 추밀

외교, 국방

 → 도평의사사(국정전반의 중요 사항 결정)

식목도감

내정

 도병마사에 흡수됨

 

 3) 서경 제도

    ○ 담당 : 대간(대성) = 어사대 + 중서문하성의 낭사

    ○ 역할 : 관리의 임명, 법제의 개폐시 이를 인준하는 제도로서 왕권 견제

 

  (3) 고려 시대의 사회

 1) 고려 지배 세력의 변화 :

                          호족 → 문벌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

 2) 라말 여초의 지방 세력의 유형과 역할

    ① 지방세력 : 호족 세력, 해상(海商)세력, 군진세력

    ② 호족 세력의 유형

        ㄱ. 진골, 6두품 출신의 중앙 귀족이 낙향하여 토착 세력화한 자

        ㄴ. 촌주층에서 성장하여 성주(城主), 장군(將軍)을 자칭한 자

        ㄷ.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있던 관리가 독립하여 세력화한 자

    ③ 세력 기반 :  농장과 사병 보유 → 지방의 행정, 군사권 장악, 경제적 지배력 행사

    ④ 역할 : 골품제 해체, 중세 사회로의 진입 주도

 3) 문벌 귀족의 성격

    ① 성격

        ㄱ. 정치 : 과거, 음서를 통한 권력 독점

        ㄴ. 경제 : 과전, 공음전 등 막대한 토지 소유

        ㄷ. 사회 : 신분 유지를 위해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 (특히, 왕실과의 통혼을 열망)

    ② 대표적 가문 : 경원 이씨, 해주 최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③ 문벌 귀족의 개방성과 폐쇄성

        ㄱ. 혈연에 바탕을 둔 신라의 골품제(진골 귀족)에 비해서는 개방적 존재

             → 과거 제도(유교 정치 이념에 바탕한 능력 중심의 관리선발)

        ㄴ. 폐쇄성 : 음서제와 공음전 등을 통한 특권의 독점적 세습

 4)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

권문세족

신진 사대부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권력 독점

하급 관리, 지방 향리 출신

학문적 소양 부족

음서를 통한 지위 세습

 학문 실력을 바탕으로

과거 제도를 통해 관직 진출

대농장과 노비 소유

 중소 지주 출신 → 사전 개혁 주장

친불교적

불교 비판, 성리학 수용

원을 배경으로 성장 → 친원 세력

친명 외교 주장

 5) 백정과 노비

    ① 백정(白丁) : 국가로부터 일정한 직역(職役)을 부여받지 못한 농민으로 양인의 대부분을 차지

    ② 노비(奴婢) :

        ㄱ. 매매, 상속, 증여 가능

        ㄴ. 부모 중 한쪽만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됨

        ㄷ. 노비 간의 소생은 어머니쪽 소유주에 귀속됨

        ㄹ. 노비의 종류

           ○ 솔거(率居)노비(立役노비) -- 주인집 잡역에 종사

           ○ 외거(外居)노비(納貢노비) -- 주인에게 신공(身貢) 납부

    ☞ 외거 노비는 독립된 가계(家計)를 유지 하며 토지와 가옥 등을  소유할 수 있었으므로 양인 농민과 거의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6) 무신 정권 시기에 일어난 농민, 천민의 봉기

   ① 배경 : 무신들의 가혹한 수탈,  하극상의 풍조
   ② 봉기 : 망이 망소이의 난(공주 명학소)(1176),  전주 관노(官奴)의 난(1172)

                김사미의 난, 효심의 난(1193),  만적의 난(1198)

   ③ 의의 : 봉건적 지배 세력의 수탈에 대한 민중의 저항으로서 신분 해방 운동의 성격도 띠고 있다.
   ④ 영향 : 무신정권은 무력 토벌과 회유를 겸하게 되는데, 이로써 향, 소, 부곡등 천민 집단이

               일반 군현으로 승격하는 계기가 됨

                 ※ 망이 망소이의 난 : (명학소 → 충순현)

 7) 고려 사회에 있어서 신분 상승의 가능성

 신라의 골품제 사회는 신분의 상승 이동이 불가능한 폐쇄적 사회였으나 고려 사회는 이에 비해 개방적 사회로 발전하였고, 사회 계층의 변동이 부단히 일어나고 있었다

     ① 지방 향리     ---(과거)--------------->   문반 관리

     ② 군인            ---(군공)--------------->   무신

     ③ 향, 소, 부곡  ---(신분 해방 운동)-------->   일반 군현

     ④ 외거 노비     ---(재산의 축적)---------->   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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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행정제도의 정비 2008.02.09 하자. Ⅱ. 조선의 건국과 지방통치체제 여말선초의 사회변화는 단순한 왕조교체가 아니라 고려말기의 정치 사회적 경제적...

고려의 정치와 사회

고려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 짧게 아주 짧게 요약해서 5가지만 알려주세요~~ 죄송한데 되도록이면 빨리 알려주셨으면... 2일~~ 고려의 사회, 경제 ▶ 신분제도는 어떤 사람의...

고려시대 정치, 문화, 사회, 경제

... ### 정치 - 왕족 - 관료제도 - 성리학 - 과거법 ### 문화 - 불교 - 석굴암 - 고려 시조 시집 - 고려 성자상 ### 사회...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질문해주세요!...

고려의 정치와 사회좀 알려주세요

6학년 1학기 사회인데요,, 고려의 정치와 사회 좀 알려주세요 ㅠ_ㅜ 되도록이면 빨리... 새로운 정치, 사회적 질서가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과거제도를 도입하고 유교정치...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질문요ㅋㅋ

학교 숙제인대요 ㅋㅋ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좀 알려 주세요정치같은 경우는... 중앙 정치 조직, 지방 행정, 군사조직, 관리등용 제도 같은거욬ㅋ 고려의 정치는 일단...

6-1 고려의 정치,사회 알려주셈.

6-1 고려의정치, 사회 알려주셈 6-1 숙제 월요일 까지 예요... - 신분제도를 확립하여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을것을... - 여진 여진족에 대해서는 공격을 하거나 귀화하는 사람들은...

통일 신라와 고려의 사회 제도에 관해...

... 통일 신라와 고려의 사회 제도에 관해 자세히 알고... 제가 국사에대해서 그리잘아는편은아니지만 그래도... 여러제도가 정비되엇습니다 중앙정치는 왕의직속기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