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 대하여 5분정도 설명해야 되는데 가르쳐주세요ㅠㅠ(내공100)

프랑스혁명에 대하여 5분정도 설명해야 되는데 가르쳐주세요ㅠㅠ(내공100)

작성일 2003.03.06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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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동안 애들한테 설명하래여 ㅠㅠ

고등학교 꺼거덩여


프랑스 혁명에 대하여

간단하고 잼나게 좀 해주세요

100점 드릴께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프랑스 대혁명

1. 혁명의 배경

18세기 중기의 프랑스는 사회적으로는 중세 이래의 봉건적 잔재와 사회적 모순이 여전히 일소되지 않은 형편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의 전 인구 2600만 중 1%를 조금 웃도는 수의 사람들만이 특권층인 제1신분(성직자계급) 및 제2신분(귀족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특권층은 국가의 반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며, 교회, 군대 및 정부의 가장 좋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1신분인 성직자들은 가끔 왕에 대한 기부금을 내는 것 이외에는 거의 모든 세금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다. 더구나 교회 고위직은 종교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는 귀족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또한 제2신분인 귀족들은 타이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요한 과세에서 면세되었으며, 부재지주로서 토지를 관리인들에게 맡기고는 궁정생활에 참여하였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특권층인 제3신분에 포함된 사람들은 직업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변화의 폭이 넓은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부유한 은행가, 유명한 문인에서부터 극빈한 농민이나 노상의 걸인에 이르기까지 실로 비동질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 신분의 사람들을 크게 1)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 계급, 2) 도시의 하층에 속하는 공인계급, 3) 농민층 등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인구의 80%정도인 농민은 여전히 봉건적 부담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농민들은 토지세인 타이유, 교회에 내는 십일세, 인두세, 소득세 등과 같은 직접세와 염세(鹽稅) 등과 같은 간접세로 그 수입의 절반을 빼앗겼다. 특히 염세는 프랑스 혁명 전의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된 세금이었다. 정부는 7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도록 강요하였다. 소금의 부정매매를 단속하여 엄벌에 처했는데, 염세 때문에 매년 3만 명 이상이 투옥되고 500명 이상이 사형에 처해졌다. 염세는 관리가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회사에게 청부를 주어 징수하는 것으로 이런 업자들의 횡포는 아주 심하였다. 영주는 여전히 봉건적 공납을 요구했으며, 농민으로부터 노역을 제공받거나 노역 대신 면역세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소상인과 공인 등 도시의 하층 계급은 농민보다는 비교적 형편이 나았지만,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한 편이 되지 못하였다.
반면에 법률가, 의사, 교사, 문인, 상인, 수공업자들이 포함된 부르주아 계층은 교육수준이 높았으며, 따라서 그만큼 자기들의 사회적 지위향상과 정치적 참여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적인 관점에서 국가 행정의 비효율성을 비판하였으며, 문벌보다 능력과 업적에 의한 출세의 원칙을 바라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부르주아 계급은 국가의 부채를 주로 담당하면서도 정치적 권리가 박탈당한 현실을 개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구체제에 대한 비판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재정의 파탄에 있었다. 이제 프랑스 왕이나 정부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재정 위기는 이미 루이 14세 시대의 거듭된 전쟁으로부터 유래하였으나, 미국독립전쟁에 프랑스가 개입함으로써 더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1763년에 비해 1789년에 정부부채는 배로 증가되었다. 1789년의 적자는 2700만 리브르였으며, 국가수입의 반 가량이 정부의 경상수지를 메우는 데 지출되었다.
루이 16세는 이러한 국가재정의 위기를 깨닫고 일찍이 1774년에 튀르고를 임용하여 사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튀르고는 상공업의 제한을 철폐하여 자유방임원칙을 답변확정하는 한편 재정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세율을 낮추고 제1신분 및 제2신분에 과세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1776년에 파면 당하고 말았다. 그 뒤 여러 번 재무대신이 경질되었으나, 개혁작업은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787년 8월에는 국고가 텅 빈 최악의 상황이 초래되었다. 귀족층이 과세의 부담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한편, 궁중 안의 반동적인 세력은 모든 개혁시도를 반대하고 나섰다.
1787년 루이 16세는 절망적인 가운데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였다. 145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이게 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마지막 남은 길은 1302년에 창설되고 1614년 이래로 1세기 반 이상이나 소집된 일이 없는 신분회를 개최하는 것뿐이었다. 왕이나 귀족들이 신분회를 소집하고자 한 의도는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을 얻고자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그것을 기화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신분회 소집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2. 삼부회와 국민의회의 소집

제3신분에 속한 프랑스 국민의 절대다수는 1789년 5월의 신분회 소집을 계기로 하여 사회개혁을 요구하였다. 이 당시에 불평불만, 시정사항, 건의 등을 적은 진정서인 까이에는 구체제하의 프랑스가 당면한 어려움과 향후의 해결방향을 제시하였다. 까이에에서 지적된 공통된 결론은 1) 특권계급인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면세특권을 버리고 공평한 과세에 응해야 한다는 것과, 2) 프랑스는 명문화된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국민의 자유와 제 권리를 성문화한 헌법은 정부의 무책임한 권리남용을 방지하고 자의적 체포에 대한 인신 보장을 기할 수 있으며, 정당한 재판 및 생명과 재산보호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까이에는 광범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대체로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 한도 내에 머무른 온건한 것이었다. 5월 5일에 개회된 신분회는 관례에 따라 별실에서 따로 신분별 회의를 하고 신분별 투표를 할 예정이었다. 중세에는 각 신분의 대표 수가 거의 비슷했으나, 1789년에는 1, 2신분이 각각 300명 가량이었으며, 제3신분은 그 2배로 늘려 600명이었다. 따라서 모두 1,200명 정도로 구성된 신분회에서는 특권층과 비특권층이 거의 비슷했으나, 표결 방법이 1인 1표가 아닌 신분별로 행해진다면 2대 1로 제3신분이 패배할 것이 분명하였다.
투표 방법을 둘러싼 논란이 복잡해지자, 1789년 6월 20일에 제3신분 대표들은 제1 및 제2신분의 일부대표들의 합세한 가운데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하였다. 이 "구회장의 선서"는 절대왕권의 종말과 주권재민의 출발을 선언한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이 국민제헌의회를 승인하기는 했으나, 의회가 개인의 자유, 사회적 평등, 민주적 민족주의 등을 목적으로 헌법제정에 착수하자 반동 귀족들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네케르를 해임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 활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의 시민들이 직접적인 행동에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7월 14일에 파리 시민들은 파리의 동쪽 끝에 있는 바스티유를 습격하였다. 이 습격 사건은 군중심리에 의한 난동행위였으나, 그 이래로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신화가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이후에 파리 시내에는 곧 자치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시 정부는 민병을 모집하여 4만 8천의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이 때 3색기가 처음 나왔는데 수도를 의미하는 적청색과 부르봉 왕가의 색인 백색을 합친 것이었다. 이렇듯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귀족들 가운데 국외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소식은 지방에 퍼져서 여름 내내 농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농민들은 오랜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기를 갈망하였으며, 영주 측이 보관중인 장원문서를 불태우고 장원과 성곽을 소각, 약탈하였다. 농촌은 대혼란에 빠지고 강도의 무리가 횡행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농민들은 밤에 문을 잠그고 또는 무장하여 자기방위를 하는 등 공포 분위기가 살벌하였다.
이러한 농촌의 혼란과 난동에 관한 보고가 8월초 국민의회에 전해지자 극단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일부 귀족들이 봉건 특권의 폐지를 제의하자, 나머지 귀족과 성직자들도 봉건제의 폐지에 찬성하였다. 이 때에 나온 8월의 법령은 "봉건제의 사망문서"라고 불리는 의미심장한 조치였다. 8월의 나머지 기간에 의회대표들은 새 헌법의 기본원칙이 될 문서를 기초하였다. 자유시민의 불가양의 권리들을 차례로 적은 이 기본원칙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이미 영국의 혁명과 미국혁명의 결과 답변확정된 "권리장전"과 미국 "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으며, 루소의 정치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1791년 9월까지 국민제헌의회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다. 거기에 의하면 국가의 주요 기관은 선거를 통한 2년 임기의 입법의회였는데, 그것은 법률을 제안하고 통과시키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기관이었다. 새 헌법에 의해서 국왕은 여전히 중요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 권한은 의회에 의해 견제되도록 하였다.
권리선언에 보장된 권리에도 불구하고, 1791년에 제정된 헌법은 제한선거제를 답변확정하였다. 모든 프랑스 남자시민은 능동시민과 피동시민으로 양분되었으며, 일정액 이상을 납세하는 능동시민만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거인과 의원후보는 더욱더 심한 재산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2,600만의 프랑스 인구 가운데 5만 명만이 선거인이 될 자격이 있었고, 의원직 피선거권은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갔다. 일반시민들의 발언권은 이와 같이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간접선거제로 인하여 그 비중이 더욱 약하였다. 예컨대 능동시민은 선거인들을 선거할 뿐이며, 그들이 다시 입법의원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권리선언 6조에서 모든 시민이 입법과정에 대한 참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91년의 프랑스 헌법은 재력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반영한 데 불과하였다.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한 이외에도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중에서도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과 권한을 없애고, 성직자들을 공무원으로 만들었던 "성직자 기본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조치를 거부한 성직자들은 "비선서성직자"로 박해받게 되어 반혁명 세력에 동참하게 되었다. 정부는 국채총액에 해당하는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그것을 담보로 지폐역할을 할 아시냐를 발행하게 되었다. 일종의 불태환지폐와 같은 아시냐는 처음에는 제한부로 발행되었으나 점차 증발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게 되었다.

3. 입법의회 시기

프랑스 혁명은 1791년 중기 이후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농민이나 도시의 소시민들은 제헌의회가 제정한 헌법에 따라 소집된 입법의회에 대해 결코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입법의회는 벽두부터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되었다. 입헌 체제의 유지를 바라는 우익보다는 혁명을 더 과격하게 밀고 나가려는 좌익에 더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았다.
더구나 프랑스 정치의 대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대외 관계도 복잡해져갔다. 1792년 봄에 제1차 대불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는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대불 동맹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혁명 세력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지만, 구체적인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주로 독일 지방에 망명한 반동귀족들이 국경지대에서 반혁명운동을 책동하고, 이를 위해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2) 봉건제 폐지로서 일부 독일 지방의 제후들이 알사스 지방의 권리를 잃었으므로 그 보상을 요구하였다. 3) 아비뇽 시민의 요청에 의해 국민제헌의회는 아비뇽 시를 프랑스에 병합하였는데, 그것은 본래 교황령에 속하였다.
그러나 1792년 4월에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군이 열세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침입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동맹군의 사령관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은 프랑스 국민에게 포고문을 내서 혁명분자들을 위협하고 왕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 파리 시민은 반혁명 세력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1794년 8월 9일과 10일에 주로 과격파가 중심이 되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파리 자치시 정부가 점령되었다. 의회는 개회 중이었으나 우익 의원들은 폭도들을 겁내어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좌익 의원들이 왕권정지를 가결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국민공회 선거를 규정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제 프랑스의 실질적인 지배권은 당통이 장악하게 되었고, 파리 자치시 정부는 도시하층민을 대변하게 되었다.
당통은 1개월 가량의 기간에 정력적인 활동을 개시하여 외세침입을 막기 위한 군대 모집사업을 추진시켰다. 프랑스에서는 반혁명의 기운을 꺾기 위해 가택수색이 벌어지고, 혐의자는 가차없이 투옥되었다.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의 기간에는 천 명 이상의 왕당파가 무차별 학살되었다.
왕정이 정지된 후 입법의회는 능동시민과 피동시민의 구분 없이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시민의 투표권을 인정하였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0일 그 첫 회합을 갖고, 그 다음날에는 국민공회는 프랑스의 왕정을 폐지하고 1792년 9월 22일로서 공화정의 제1년이 시작함을 공고하였다. 이리하여 비교적 온건한 프랑스 혁명의 제1단계는 끝났던 것이다.

4. 프랑스의 제1공화정

라파예트 같은 진보적인 귀족계층이 주도하고 재산 소유정도와 교육수준이 높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이 크게 반영된 프랑스 혁명의 1단계는 끝나고, 이제 도시의 소시민층이 주도한 혁명의 2단계가 시작되었다. 급진적인 공화제를 답변확정한 국민공회는 이제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1) 폐위된 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2) 외국군의 침입으로부터 어떻게 프랑스를 구원할 것인가? 3)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과 폭동을 어떻게 진압할 것인가? 4) 군주제를 대체한 공화제를 합리화하는 헌법의 내용은 어떻게 규정될 것인가? 5) 1789년부터 1791년까지 사이에 국민제헌의회에서 입법한 경제, 사회적 개혁은 어떻게 집행되고 완성될 수 있는가?
프랑스 혁명이 시작됨과 거의 동시에 정당이나 정파가 형성되었으며, 국민공회가 소집된 기간 중에는 좀더 과격한 정파들이 정계를 좌우하게 되었다. 브리소파라고 칭한 지롱드당에는 195명의 의원들이 국민공회 우측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대쪽인 좌측에는 산악파가 앉아 있었는데, 이들은 자코뱅당 소속의원들이었다. 이 두 파의 중간의석을 차지한 국민공회 대다수 의원들은 평원파라고 불렸다.
일단 왕정이 폐지되자 혁명 주도 세력은 점점 극단적인 노선을 답변확정하게 되었다. 급진파인 산악파는 국왕이 살아있는 한 왕정복고의 음모가 계속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왕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표결 결과 사형이 확정된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날은 1793년 1월 21일 아침이었다. 국왕의 처형 소식으로 전 유럽의 군주들은 경악하였으며, 또다시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인 공세를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792년 초가을에 벌어진 발미 전투 이후에 잠시 후퇴했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국은 1793년 봄에 새로운 침공을 계획하였다. 이제는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및 그 밖의 군소 국가들도 대불동맹군에 합세하였다.
이로써 당시에 프랑스의 방위 문제가 긴박한 과제로 부각되었으나, 지롱드당과 자코뱅당 사이에는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전개되고 있었다. 지롱드당은 주로 지방의 지지를 받았고, 자코뱅당은 도시 특히 파리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다. 두 당파간의 싸움은 파리 시민의 6월 폭동을 통하여 지롱드당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롱드당은 지방에서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쟈코뱅당은 자체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자코뱅당이 주도한 정부는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고 전쟁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상당 부분의 권한을 공안위원회에 위임하였다. 또한 보조기관으로 일반보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를 두었는데, 일반보안위원회는 반역자를 색출하며, 혁명재판소는 재판하고 처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공안위원회와 그 보조기관은 "공포정치"라 알려진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파리에서만 5,000 여명이 처형되고, 지방에서는 처형된 사람의 수가 2만 명에 달하였다.
혁명정부는 국내의 반혁명적인 요소를 일소함과 동시에, 전쟁수행의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전 국민에게 병역을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것이었다. 국민공회는 1793년 초에 30만 명에 대한 소집령을 내리고, 18세에서 40세에 이르는 모든 남자의 군복무를 규정하였다. 또 1793년 8월에는 국민총동원령이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자는 등록되어 전쟁을 돕고 노동자들은 징발되어 군사업무에 할당되었다.
자코뱅당의 주도하의 프랑스 정부는 대내적으로 국민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새 기풍을 조성하였다. 먼저 아주 강력한 반(反)기독교 운동이 전개되었다. 교회가 폐쇄되고, 종교적인 조각상이 파괴되었다. 기독교 대신에 이성교(理性敎)가 창시되어 1793년에 노틀담 교회에서 이성의 축제가 벌어졌으며,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존재에 대한 종교를 창시하였다. 또한 복장에서 남자들은 귀족의 차림에 반대하여 상퀼로트를 입었는데, 이 의복은 그 이래로 서양식 남자 바지가 되었다. 또 귀족 칭호는 없어지고, "시민"이라는 단어가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 되었다. 가정마다 혁명가들의 흉상들이 비치되었고, 거리명칭은 왕이나 귀족의 이름으로부터 혁명적 사건이나 영웅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794년 봄 무렵이면 프랑스는 대외전쟁에 있어서나 국내사정에 있어서 안정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공안위원회를 장악한 로베스피에르는 기요틴을 정치적 도구로 삼아 공포정치를 지속시켰다. 그의 일파는 과격한 에베르 일당을 숙청하고, 다시 당통과 그 밖의 분파의 주도자들을 처형하고 독재정치를 확립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미온적인 공화론자들을 숙청하고 모든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사심 없는 애국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의 목표는 이상적인 "덕의 공화국"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로베스피에르의 광신적인 이념에 무관심하였고, 공포정치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국민공회는 1794년 7월에 로베스피에르의 영도권을 거부하고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5. 총재 정부와 나폴레옹의 쿠데타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프랑스에서는 다시 반동체제가 성립되었고, 혁명은 다시 부르주아 중심으로 돌아갔다. 많은 혐의자들이 석방되고 로베스피에르 시기에 제기된 입법이 파기되었으며, 파리 자치시 정부, 공안위원회 및 혁명재판소는 해체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체제를 이끄는 두 집단은 혁명으로 벼락부자가 된 계층 및 왕정복고를 기피하는 국민공회 의원들이었다.
이제 국민공회가 결정한 정부설치령에 따라서 5명의 총통으로 된 행정부가 구성되고 양원제 입법부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1795년에 집권한 총재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하였다. 국내 경제사정은 악화되고 있었으나, 대외전쟁 중 오스트리아 군과의 교전은 성공적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 군사적인 승리를 통하여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1796년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사르디니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대불동맹국으로서 프랑스에 맞설 수 있는 주요 국기로는 해군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영국만이 남았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하는 의미에서 인도로 가는 길목인 이집트를 원정하였다. 그는 대체로 육전(陸戰)에서는 우세를 유지하였으나 나일 해전에서 넬슨의 영국해군에 패배 당하였다. 1799년 나폴레옹은 급히 단신 귀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을 수습하지 못하는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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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이란?

프랑스에서 일어난 근대 민주 혁명으로,

몇 백년동안 계속됀 왕족과 귀족의 사치로 평민의 등은 휘게 돼었어요.

그래서 열받은 평민들이 곡괭이, 삽 등을 들고 바르세유 감옥을 쳐 들어가서 무기를 훔치고,

그걸로 파리로 입성해서 루이 16세?를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왕비인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돼지"라고 말해서 오히려 국민들에게 더욱 심한 반발심을 샀습니다.

그래서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망 가다가 남편과 같은 길을 갔죠.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공화정이 설립됐죠.

그러나 제정,왕정,공화정이 1번 더 반복돼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생겼고, 프랑스 국기의 색이 나타내는 의미인 자유, 평등, 박애라는 사상이 생겼구요.

그리고 지금의 프랑스로 내려 온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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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IN에서 뒤져서 나온건데.. 괜찮네요.. 베스트 답변 받은글임..



1)배경
★구제도(신분제)의 모순: 제 1신분(성직자)과 2신분(귀족)은 합쳐봐야 50만명 정도임에도(프랑스 인구 약 2700만)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는데다 면세혜택까지 있어 실로 사치스런 생활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 제 3신분(평민)은 지대와 세금으로 국가의 재정적 부담을 전담했습니다. 거기다가 정치 참여 또한 배제되고 있었죠.
★계몽 사상의 보급 : 계몽 사상과 미국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 개혁을 요구하게 만들고, 절대왕정 타파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재정위기(직접적 계기) : 프랑스 왕정의 무능함으로 인해 국가가 재정 파탄의 위기에 몰리자 루이 16세는 150여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3부회를 소집합니다. 여기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고자 특권계급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는데요. 그치만 3부회에서 제 1,2신분과 제 3신분(특히 부르주아)가 서로 반목해 그 대립이 심해집니다.
이에 제3신분 대표들은 국민의회를 선포하고 사회 하층인 민중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2)결과
루이 16세가 베르사유에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회를 탄압 하려하자 파리 민중은 그간 압제와 전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곧 불길은 번져 농촌에서도 농민들이 무기를 들고 영주들의 성을 공격하면서, 봉건문서들을 소각시킵니다.
국민의회에선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하고 인권 선언을 발표합니다.(자유와 평등의 원리, 국민 주권의 원리, 압제에 저항할 권리, 불가침의 사유 재산 인정) 이는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합니다.
입헌군주제를 답변확정하고, 시민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는 등 개혁을 실시합니다만 쫌 웃기는 건 유산계급에게만 참정권을 줘, 그들만의 지배체제를 수립했다는 거죠.(결국은 똑같애~ 똑같애~ 이는 부르주아가 혁명의 주도층이었기 때문)

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한 이웃나라의 개입, 국왕의 탈출 실패 사건들로 혁명은 더 과격해져 파리 민중은 왕궁을 습격하고, 결국 루이 16세를 처형합니다. 제 1공화정이 선포된 이후죠. 그치만 프랑스 정세는 너무 불안했고, 자코뱅당의 독재정치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로 이어졌죠. 결국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하고, 공포정치를 종식시킵니다만 이후 집권한 총재정부는 너무 무능했죠. 이에 나폴레옹이 군사쿠테타를 일으켰죠.

(3)영향
유럽 곳곳에 자유와 평등 사상을 전파하고, 산업활동의 자유와 사유 재산의 보장을 요구하는 등 오늘날 인권의식과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죠. 이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혁명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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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典型)이라고 불린다. 이 경우에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을 그대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인 것이다.

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왕권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을 계속하였다. 신권왕정 밑에서는 모든 국민이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하다. 그 위에 소수의 귀족 ·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 %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우아하고 무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순은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졌다.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에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臨時地租)’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귀족 ·성직자들은 국왕의 사법관료 아성(牙城)인 파리 고등법원과도 결탁하고 고등법원이 가진 법령심사권한을 이용해서 왕정고문부의 재정안(財政案)에 저항하였다. 이 왕권 내부(또는 체제 내부)에서 투쟁하는 사이에 재정총감 칼론과 그 후임자 브리엔이 실각하고, 88년 8월에 네케르가 재차 재정총감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전국 삼부회를 다음해에 소집할 것을 국민에게 확약하였다.

1.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


프랑스의 전국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회되었다. 의원 총수는 약 600명으로 특권 2신분의 300명에 대하여 평민대표도 동수였다. 혁신을 갈망하는 자유주의 귀족이나 평민의원은 모든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사안(事案)을 머릿수 투표로써 결정하자고 주장하여 부별투표(部別投票)를 고집하는 특권층 보수파 의원과 대립하였다. 6월 13일 평민의원은 그들만으로 삼부회를 영국식 의회로 개조하는 결의를 하고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왕권은 이에 대해 위협과 방해를 가했으나, 미라보를 중심으로 한 평민의원의 과감한 용기에 눌려 6월 말에는 전대표가 합류, 국민의회가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국민의회는 7월 초에 ‘헌법 제정의회’로 명칭을 바꾸고, 마침내 국민이 바라던 헌법과 의회정치 개설에 착수하였다. 그때 왕권이 군대를 국경지대에서 불러들여 베르사유 주변에 집결시켰으므로 파리시민에게 극도의 불안과 분노, 그리고 공포를 야기시킨 형세가 되었다.

2. 바스티유감옥 습격


프랑스 왕권은 1789년 7월 11일 삼부회의 최고책임자인 네케르를 파면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에 알려지자 혼란이 발생하여 시민들은 자위를 위해 성문을 굳게 닫고 각 가로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여 경계하였다. 7월 14일 약 1만 명의 시민이 시의 동부 요새이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진압차 달려온 군대도 시민의 열렬한 열기에 위압되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성(城)은 함락되고 성내의 장병은 무참하게 살육당하였다.

3. 봉건적 특권의 폐지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순식간에 지방으로 전해져 각지에 격렬한 농민반란을 유발하였다. 영주의 성관(城館)과 호적 ·토지대장의 보관소가 습격당하고 전국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사태를 우려한 헌법제정의회는 1789년 8월 4일 밤의 회의에서 노아유 자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의 폐지를 단행하였다. 프랑스에는 비로소 법 앞에 평등한 조건이 실현되어 전국민이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보증받는 형태가 되었다. 다만, 농민에 대하여는 10분의 1세와 부역은 폐지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영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분을 돈으로 되사야 하였기 때문에 그 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헌법제정의회는 이러한 경우, 영주 ·지주층의 이해(利害)를 대변하였으므로 지주 부르주아 편향이라는 악평을 받았다. 8월 26일 의회는 라파예트 등이 기초한 ‘인권선언’을 가결하고, 인간의 자유 ·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 사상의 자유,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 신질서의 기본적 제원칙을 명시하여 혁명의 정의(正義)를 내외에 선양하였다. 이 ‘인권선언’은 부르주아적이기는 하였지만 근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일대 기념비로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 국왕의 귀환


프랑스 혁명 당시 근교농촌의 혼란도 있어 가을에는 파리의 식량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파리 하층시민의 부녀자들은 1789년 10월 5일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행렬을 지어 베르사유를 향해 시위행진을 하였다. 그 뒤에는 남편과 직인들이, 또 그 뒤에는 국민군의 병사들이 뒤따랐다. 저녁 때 일행은 왕궁에 도착하여 루이 16세에게 파리 귀환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룻밤을 숙영(宿營)하고 다음날 왕궁으로 난입하였다. 국왕 일가는 시민에게 포위된 채,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귀환하였다. 의회도 파리로 옮겨졌으며, 이후 왕궁과 더불어 파리 시민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날부터 프랑스에는 절대왕정으로의 복귀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많다.

5. 국가소유재산경매


프랑스 혁명 당시 의회는 신체제의 건설에 착수하여 주(州)를 폐지하고 83개의 현(縣)을 설치하는 등 수많은 행정 ·사법상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삼부회 개최의 당면한 이유이기도 한 재정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1789년 10월 10일의 의회에서 주교인 탈레랑은 교회토지 재산의 국가관리를 주장하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의회는 즉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가 30억 리브르에 이르는 교회재산을 분할 매각해서 파산의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성직자에 대해서는 그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결국 ‘제례와 호적과 도의상의 관료’로서 국가가 봉급을 지불해야 한다는 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직자도 교회를 떠나서 국가와 의회에 새삼스럽게 선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많은 성직자가 선서를 거부하고 맡은 자리를 떠나갔다. 그들 비선서 성직자야말로 최초의 혁명진영에서의 이탈자이며 동시에 최초의 반혁명적 무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를 깊이 신앙하고 있는 시민과 농민을 혁명에서 이반(離反)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6. 바렌의 도피사건


1791년 4월 초기 프랑스 혁명의 중심인물인 미라보가 급사하였다. 미라보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파리에 갇혀서 불안했던 왕가 일족에게 더욱더 초조감을 안겨주었다. 미라보는 혁명의 추진력이긴 하였어도 입헌왕정을 신조로 삼았고, 그 뛰어난 역량과 안목에 의해서 왕가에게는 더없는 지주(支柱)로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더욱이 그는 왕비에게 매수되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그의 사망 후 도피계획이 급속히 구체화되어 국왕 일가는 6월 20일 새벽에 튈르리 궁전을 탈출하여 비밀리에 마차로 동부 국경으로 향했으나, 불운하게도 국경 근방의 바렌에서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당하였다.

의회는 왕을 처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였으나 민중은 간단히 납득하지 않았다. 이후 공화파와 왕정파 간의 대립이 격화하였고, 파리에서는 왕정폐지론이 급격히 대두하여 자코뱅당과 코르들리에 클럽의 시민은 7월 17일 마르스 광장에서 공화정체 수립의 서명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때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에게 짓밟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

7. 입법의회


1791년 프랑스 헌법제정의회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헌법(이른바 91년 헌법)을 9월 말에 제정한 뒤 해산하고 10월 1일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1791년 헌법에서는 일원제(一院制)의 의회를 갖는 입헌왕정이 국시(國是)로 되었고, 참정권은 규정된 금액 이상의 직접세를 지불하는 성년 남자에 한해서 인정되었다. 입법의희에서는 우익(右翼)의 푀양파, 좌익의 지롱드파가 대립하였다.

지롱드파는 베르니오, 장소네, 귀아데 등 남서프랑스 출생의 변설가들과 브리소, 콩도르세 등 파리 출생 이론가의 집합체로서 지방의 무역상 ·기업가 ·유산시민에 지반을 두고, 혁명의 혼란을 이용하여 외부로부터 프랑스 경제의 교란을 획책하는 여러 외국의 음모를 경계하였다. 이들은 의회를 독려하여 91년 10월 말에 해외로 도피한 에미그레(망명 귀족)에 대하여 2개월 이내에 귀국하도록 명령을 발하였다. 의회는 망명 귀족의 배후에서 줄곧 프랑스를 견제하고 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 파급될 것을 두려워하는 유럽 열강의 획책과 공작을 무엇보다도 우려하였다. 사실 독일에서는 혁명열이 유행병처럼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8. 혁명전쟁의 개막


1792년 4월 프랑스는 반혁명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2국에게 선전포고하였다. 프랑스군은 라파예트, 뒤무리에 장군 휘하에 10만의 대군을 파견하였으면서도 연전연패하고, 더구나 일선 장교의 태업도 있고 해서 총붕괴의 형세에 처하였다. 이에 분격한 파리 시민은 연일 의회로 몰려와서 패전책임자의 처벌 등을 요구하고, 보수파 의원의 언동을 방해하였다.

6월 20일 시위로 들어간 수천의 군중은 튈르리 궁전에 난입하여 왕을 포위하고 요구조건을 강력히 내세웠으나, 루이 16세의 의연한 태도에 눌려서 조용히 물러났다. 입법의회는 7월에 전국민에게 격문을 발표,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각지에서 청년들이 애국적 정열에 불타 의용군으로 참가함으로써 파리는 다시 소란해지기 시작하였고, 그 중에서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은 재차 시민봉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9. 국왕의 체포


1792년 8월 9일 밤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임한 지구위원(地區委員)은 돌연 파리시청을 점령하고 혁명의 코뮌(commune:自治市會)을 수립하였으며, 국민군 사령관 망다를 사살하고 전지구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8월 10일 이들의 호소에 호응한 수만의 시민이 집결하여 튈르리 궁전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다. 왕궁의 스위스 용병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국왕 일가는 난을 피하여 입법의회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의회도 시민대중으로 포위당하여 국왕 일가는 코뮌에 인도되고, 왕권도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이후 약 1개월간 파리에는 정부 ·의회 ·코뮌의 3권이 분립하여 시민생활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9월 2일에는 오스트리아군이 전진한다는 소식과 함께 사제(司祭)를 주로 하는 반혁명 용의자가 애국자의 손에 의해 대량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0. 제1공화정 형성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다음날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성립되었다. 국민공회는 프랑스 왕정의 폐지, 공화정의 답변확정을 선언하였다. 이전의 좌익 지롱드파는 국민공회에서 우익으로 돌았고 좌익에는 새로이 산악파(山岳派)가 등장하였다.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처음부터 적대감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항쟁하였다. 지롱드파가 의회주의를 내걸고 자유주의경제 ·지방자치의 우선을 주장하는 부르주아 공화파라면, 산악파는 ‘유일 불가분의 공화국’을 원칙으로 하고 중소시민·농민의 옹호와 해방을 주창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수행하려는 과격파였다. 전자가 롤랑 부인의 살롱을 중심으로 계몽된 신사의 단체라면, 후자는 파리의 코뮌 자코뱅 클럽을 보루로 하여 실력으로 계급투쟁을 관철하려고 하는 애국자의 당파였다.

11. 루이 16세의 처형


프랑스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대립은 특히 국왕의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였다. 지롱드파는 국왕을 변호하여 그의 정치적 책임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투표에서 패하여 마침내 산악파의 주도하에 국왕은 1793년 1월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기요틴(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의 죽음은 지롱드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하의 프랑스에도 용이치 않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 ·나폴리 ·로마교황 등이 왕의 처형 사실을 알고 잇따라 참전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대(對)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방데현(縣) 등 서부 후진지대에서는 왕당파의 반란까지 발발하였다.

12. 지롱드파의 패배


1793년 3월 말 프랑스는 지롱드파가 임명한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고, 의회에서도 사사건건 로베스피에르, 마라 등 산악파의 영수(領袖)에게 지롱드파가 기선(機先)을 빼앗기는 형세가 되었다. 초조해진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범 단속의 명목으로 파리 코뮌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5월 31일 지롱드파의 부당한 체포에 격분한 시민은 대거(大擧) 공회를 포위하고 12인위원회의 폐지, 중앙혁명군의 징집, 귀족출신 장교의 퇴관, 반혁명 용의자의 체포, 노인과 불구자의 구제 등을 요구하였다.

6월 2일에는 더욱 많은 시민들이 공회로 몰려들었다. 회의장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지롱드 ·산악 양파 의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에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장내로 뛰어들어 시민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지 않는 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결과 지롱드파는 간부당원 29명이 의석을 잃고 공회에서 약체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산악파는 독주체제(獨走體制)를 형성하게 되었다.

13. 마라의 암살


프랑스 산악파는 국민공회를 제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들 앞에 어려운 과제가 잇따라 출현하였다. 첫째로, 의석을 잃은 지롱드파 명사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으로 잠입하여 각지에서 반(反)산악파의 음모를 계획하였으며, 왕당파와 호응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 파리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는 전쟁에 의해 발생한 물자의 결핍과 식료품의 등귀가 두드러졌으며, 극좌 파괴분자가 활약하였다.

산악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농민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취하여, 봉건적 공과(貢課)의 무상폐지, 망명자의 몰수재산 분할판매 등을 결의하여 무산농민을 소토지 소유자로 바꾸어 놓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1793년 7월 13일 산악파의 핵심적 지도자인 마라가 자택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산악파도 권력에 안주(安住)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어 ‘방종한 자유의 폐기’로 정책전환을 하였다. 국민공회의 최고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출마하여 입법 ·행정 ·통수의 지령본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인민의 이름에 의한 독재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14. 공포정치


1793년 8월 프랑스의 군사정세는 재차 악화되어 북동 국경지대의 프랑스군이 각 전선에서 부득이 후퇴하게 되자, 국내의 위장 왕당파나 지롱드파는 활개를 펴고 활동을 획책하였으며, 도시의 식량위기도 급속히 증대하였다. 파리에서는 최고가격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귀족과 함께 매점상인(買占商人), 악덕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외침이 끊이지 않았고, 당통까지도 부당소득자의 오명이 씌워졌다. 자코뱅당 좌파의 에베르는 9월 5일 시민을 동원해서 국민공회에 몰려가 ‘혁명의 무제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반혁명 용의자의 즉각 숙청을 요청하였다.

공안위원회는 스스로 위기극복에 나서 혁명재판소를 쇄신 강화하는 한편,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의 ‘혁명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1793년 가을부터 다음해에 걸쳐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먼저 반혁명의 이름 아래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 명사들이 처형되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롤랑 부인도 같은 운명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처럼 약 1년 동안에 1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15. 로베스피에르 독재


프랑스 공안위원회의 총력전체제는 정확히 성공을 거두어 1793년 말까지는 국내의 반항은 소탕되고 대외전쟁에서도 프랑스는 반격으로 나아갔으나, 산악파 내부에서는 당쟁이 끊이지 않았고 자코뱅 좌익의 에베르파를 보태어 우익 당통파와 로베스피에르파가 3파로 되어 대항하였다. 이들 중 에베르파는 1794년 3월 파리의 식량사정 악화를 이용하여 시민을 동원해서 봉기를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기요틴에서 처형되었다. 이어 4월에는 당통파가 숙청되었다. 로베스피에르파는 정권을 독점하기는 하였으나 인심을 얻지 못하여 겨우 3개월밖에 계속하지 못하였다.

공포정치하에서는 국민생활 자체가 동결되고, 모든 활력이 마비상태에 빠지는 반면, 관료통제가 새로운 퇴폐를 낳아 종전의 혁명가들도 권력의 남용자나 편승자로 바뀌어갔다. 로베스피에르를 미워하는 국민공회 의원은 그 동안 암암리에 밀모(密謀)를 진행시켜 7월 27일의 의회에서 그의 유죄를 선고하고, 다음날 그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테르미도르의 반동(反動)’이라 부른다.

16. 부르주아공화정


프랑스에서의 로베스피에르파의 몰락은 혁명극의 종막을 의미하며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방감을 주었다. 특히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고 있던 상류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의 숙청과 동시에 산악파적 노농정책 ·통제경제는 모두 폐지되고, 상업시민의 자유로운 세기가 재현되었으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기 때문에 자유의 도래는 생활비의 팽창을 초래하여 빈곤한 시민을 한층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는 이들 무산층과 우익 왕당파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政局) 가운데서 1795년 10월 왕당파는 ‘방데미에르의 반란’을 일으켰으며, 국민공회가 위기에 이르렀을 때 이것을 진압한 것이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그 뒤 이탈리아 전쟁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수완을 발휘하여 프랑스에서 일약 저명인사로 명성을 떨쳤다. 이집트 원정에는 실패하였으나,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의하여 정부를 쓰러뜨리고 집정정부(執政政府)를 수립하여 군사적 독재를 확립하게 되자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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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재미 있게 그걸 원하는거죠.....

유럽은 다들 알듯이 중세시대라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봉건제후가 세력이 강했

는데 프랑스의 경우 100년 전쟁으로 강한 제후들이 몰락하고 왕에게 권력이 집중

되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절대왕정이죠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으로 유명한 왕이

태양왕(스스로 그렇게 불렀담니다.) 루이 14세인데 이왕이 베르사유라는 사치스런

왕궁을 건설하는등 국가재정을 낭비해서 다음 왕인 루이 16세때는 돈이 부족하게

되죠 그래서 삼부회의라고 귀족, 성직자, 부르죠아(돈 많은 사람들)를 모아놓고

세금좀 많이 내라고 했는데 세금만 내고 권리는 주지 않으니까, "쌍! 돈 못내" 하고

반기를 든거고 거기에 식량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베르사유궁에 모여든 시위대에

총을 쏴버린거죠, 이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왕정

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선포됨니다. 프랑스혁명이 이전의 다른 민중봉기와 다르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유럽에 일어나고 있는 경제, 사회, 정치적 변화의

가장 극적인 표현있다는 겁니다.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싹트기 시작하면 봉건영주

에서 사회의 주역이 부르죠아지(자본가)로 바뀌기 시작했고,

슬슬 생산력 중심이 농업에서, 공업과 상업으로 이동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상의

획일화가 다양한 철학의 발전으로 쇠퇴한거죠........

이로인해 전 유럽의 부르죠아와, 노동자, 농민(영주에게 억압받던), 그리고

들이 활발하게 구체제를 변화 시켰게 되고 이러한 유럽의 변화가 결국 세계의 변화

로 이어져, 서구의 보편성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특별한 계기가 프랑스 혁명인거죠

이로써 인류는 진정한 역사의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중요하

다는 겁니다.프랑스 혁명의 평가-
구제도의 모순을 타도하고 시민계급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라고 설명된다. 봉건제도 사망확인으로서의 이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또한 인권선언을 통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의 성립을 가능케 하였다. 전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이 이성에 의거한 계몽사상으로 대체되고 종교가 세속정신에 의하여 자리를 본격적으로 내어준 것도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이다. 프랑스 혁명이 구체적으로 이룩한 업적들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혁명의 구호로서 내건 이념은 더욱 중요하였다. 자유ㆍ평등ㆍ박애로 표현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평등이라는 의미와 자유가 불가분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오늘날에도 그 중요성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 법의 평등 외에도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평등으로까지의 개념 확대는 공산주의처럼 사유재산권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빈부 차이의 소멸이 인간사회에서 바람직하다는 오늘날의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을 생각할 때 프랑스 혁명 이념의 의미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19세기 이후의 유럽사는 물론이요, 세계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프랑스 혁명시에 제기된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이념을 각국이 처한 역사적 상황 아래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의미있는 문제는 어떻게 자유의 희생없이 평등의 이념을 실천하는가가 아니겠는가?

되는데 가르쳐주세요ㅠㅠ(내공100)

5분동안 애들한테 설명하래여 ㅠㅠ 고등학교 꺼거덩여 프랑스 혁명에 대하여 간단하고 잼나게 좀 해주세요 100점... 인구의 80%정도인 농민은 여전히 봉건적 부담으로 허덕이고...

프랑스 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라는 이유...

... 해야되는데 도저히 모르겠더라구요 ㅠㅠ 제발좀 알려주세요 감사내공도 드림! 안녕하세요~! 프랑스 시민혁명은... 이에 대하여 자코뱅당은 급진적 혁명세력을 결집시키기...

잘하시는 분들 제발 가르쳐주세요 ㅜㅜ

... 아시는 분 조금이라도 답변해주시면 내공 100드립니당 1)물질이 빛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작 2개 이상 설명하시오...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 독일의 마르틴 루터 , .프랑스의...

프랑스여행계획서에들어갈내용...

내일까지 프랑스여행계획서에들어갈것을준비해야하는데 ㄷㄷ, 잘 못찾겠더라구요 ㅋㅋ 사진이랑 갈곳추천과 설명등이 푸짐하고 좋으면 내공팍팍 아시죠 ? ㅋㅋ 암튼...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곳 (내공 有)

... 3) 프랑스 에서 유명한 가볼만한 곳, 관광지 등... 소개해주세요:) 내공은 기본 30 드리구요 답변에 봐서 감사내공... 방법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또 한군데는 RER A선을 타고...

주세요ㅠㅠ 내일개학ㅠㅠ (내공100)

... 감사하겠습니다ㅠㅠ 10줄안으로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0분이내로적어주세요 내공얌얌 신고ㄱㄱ... 이런 다움이의 모습이 날 많이 가르쳐 주고 있다. 골수를 기증한...

프랑스 파리에서3일 있을예정인데......

... 하시면 되는데, 월요일부터 그 주의 일요일까지만 쓸 수... 관해 설명이 없는 것은 여행 안내서가 잘 되어있기 때문이니 참조하세요. 프랑스 대학생들의 일상이 배어있는...

미국에 대하여...

...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세요.. 학교에서 사회 수행으로... 미국의 독립혁명 1775년에 시작된 미국의 독립혁명은 약 1세기 반에 걸쳐 식민지인들이 확립한 자치에 대하여...

판타지 추천좀해주세요 보너스내공 100

... 이정도면 제 성향은 대충 눈치체실거라 생각합니다.. 아시는 작품이나 재미있는 작품 추천부탁드려요. 보너스 내공 100드립니다. 성의있고 알찬답변 채택합니다. 양판소는...

판타지소설추천좀~ 내공100

... 3개정도 다운받앗는데 소설 내용자체가 제가 썩 좋아하지 안하서... 암튼! 소설좀 추천해주세요 일단 주인공이... 암튼 내공 100검 !! 양판소만 보셨네요.. 양판소는 원래 1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