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1. 혁명의 배경
18세기 중기의 프랑스는 사회적으로는 중세 이래의 봉건적 잔재와 사회적 모순이 여전히 일소되지 않은 형편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의 전 인구 2600만 중 1%를 조금 웃도는 수의 사람들만이 특권층인 제1신분(성직자계급) 및 제2신분(귀족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특권층은 국가의 반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며, 교회, 군대 및 정부의 가장 좋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1신분인 성직자들은 가끔 왕에 대한 기부금을 내는 것 이외에는 거의 모든 세금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다. 더구나 교회 고위직은 종교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는 귀족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또한 제2신분인 귀족들은 타이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요한 과세에서 면세되었으며, 부재지주로서 토지를 관리인들에게 맡기고는 궁정생활에 참여하였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특권층인 제3신분에 포함된 사람들은 직업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변화의 폭이 넓은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부유한 은행가, 유명한 문인에서부터 극빈한 농민이나 노상의 걸인에 이르기까지 실로 비동질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 신분의 사람들을 크게 1)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 계급, 2) 도시의 하층에 속하는 공인계급, 3) 농민층 등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인구의 80%정도인 농민은 여전히 봉건적 부담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농민들은 토지세인 타이유, 교회에 내는 십일세, 인두세, 소득세 등과 같은 직접세와 염세(鹽稅) 등과 같은 간접세로 그 수입의 절반을 빼앗겼다. 특히 염세는 프랑스 혁명 전의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된 세금이었다. 정부는 7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도록 강요하였다. 소금의 부정매매를 단속하여 엄벌에 처했는데, 염세 때문에 매년 3만 명 이상이 투옥되고 500명 이상이 사형에 처해졌다. 염세는 관리가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회사에게 청부를 주어 징수하는 것으로 이런 업자들의 횡포는 아주 심하였다. 영주는 여전히 봉건적 공납을 요구했으며, 농민으로부터 노역을 제공받거나 노역 대신 면역세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소상인과 공인 등 도시의 하층 계급은 농민보다는 비교적 형편이 나았지만,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한 편이 되지 못하였다.
반면에 법률가, 의사, 교사, 문인, 상인, 수공업자들이 포함된 부르주아 계층은 교육수준이 높았으며, 따라서 그만큼 자기들의 사회적 지위향상과 정치적 참여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적인 관점에서 국가 행정의 비효율성을 비판하였으며, 문벌보다 능력과 업적에 의한 출세의 원칙을 바라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부르주아 계급은 국가의 부채를 주로 담당하면서도 정치적 권리가 박탈당한 현실을 개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구체제에 대한 비판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재정의 파탄에 있었다. 이제 프랑스 왕이나 정부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재정 위기는 이미 루이 14세 시대의 거듭된 전쟁으로부터 유래하였으나, 미국독립전쟁에 프랑스가 개입함으로써 더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1763년에 비해 1789년에 정부부채는 배로 증가되었다. 1789년의 적자는 2700만 리브르였으며, 국가수입의 반 가량이 정부의 경상수지를 메우는 데 지출되었다.
루이 16세는 이러한 국가재정의 위기를 깨닫고 일찍이 1774년에 튀르고를 임용하여 사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튀르고는 상공업의 제한을 철폐하여 자유방임원칙을 답변확정하는 한편 재정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세율을 낮추고 제1신분 및 제2신분에 과세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1776년에 파면 당하고 말았다. 그 뒤 여러 번 재무대신이 경질되었으나, 개혁작업은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787년 8월에는 국고가 텅 빈 최악의 상황이 초래되었다. 귀족층이 과세의 부담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한편, 궁중 안의 반동적인 세력은 모든 개혁시도를 반대하고 나섰다.
1787년 루이 16세는 절망적인 가운데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였다. 145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이게 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마지막 남은 길은 1302년에 창설되고 1614년 이래로 1세기 반 이상이나 소집된 일이 없는 신분회를 개최하는 것뿐이었다. 왕이나 귀족들이 신분회를 소집하고자 한 의도는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을 얻고자 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그것을 기화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신분회 소집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2. 삼부회와 국민의회의 소집
제3신분에 속한 프랑스 국민의 절대다수는 1789년 5월의 신분회 소집을 계기로 하여 사회개혁을 요구하였다. 이 당시에 불평불만, 시정사항, 건의 등을 적은 진정서인 까이에는 구체제하의 프랑스가 당면한 어려움과 향후의 해결방향을 제시하였다. 까이에에서 지적된 공통된 결론은 1) 특권계급인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면세특권을 버리고 공평한 과세에 응해야 한다는 것과, 2) 프랑스는 명문화된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국민의 자유와 제 권리를 성문화한 헌법은 정부의 무책임한 권리남용을 방지하고 자의적 체포에 대한 인신 보장을 기할 수 있으며, 정당한 재판 및 생명과 재산보호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까이에는 광범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대체로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 한도 내에 머무른 온건한 것이었다. 5월 5일에 개회된 신분회는 관례에 따라 별실에서 따로 신분별 회의를 하고 신분별 투표를 할 예정이었다. 중세에는 각 신분의 대표 수가 거의 비슷했으나, 1789년에는 1, 2신분이 각각 300명 가량이었으며, 제3신분은 그 2배로 늘려 600명이었다. 따라서 모두 1,200명 정도로 구성된 신분회에서는 특권층과 비특권층이 거의 비슷했으나, 표결 방법이 1인 1표가 아닌 신분별로 행해진다면 2대 1로 제3신분이 패배할 것이 분명하였다.
투표 방법을 둘러싼 논란이 복잡해지자, 1789년 6월 20일에 제3신분 대표들은 제1 및 제2신분의 일부대표들의 합세한 가운데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하였다. 이 "구회장의 선서"는 절대왕권의 종말과 주권재민의 출발을 선언한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이 국민제헌의회를 승인하기는 했으나, 의회가 개인의 자유, 사회적 평등, 민주적 민족주의 등을 목적으로 헌법제정에 착수하자 반동 귀족들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네케르를 해임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 활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의 시민들이 직접적인 행동에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7월 14일에 파리 시민들은 파리의 동쪽 끝에 있는 바스티유를 습격하였다. 이 습격 사건은 군중심리에 의한 난동행위였으나, 그 이래로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신화가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이후에 파리 시내에는 곧 자치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시 정부는 민병을 모집하여 4만 8천의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이 때 3색기가 처음 나왔는데 수도를 의미하는 적청색과 부르봉 왕가의 색인 백색을 합친 것이었다. 이렇듯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귀족들 가운데 국외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소식은 지방에 퍼져서 여름 내내 농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농민들은 오랜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기를 갈망하였으며, 영주 측이 보관중인 장원문서를 불태우고 장원과 성곽을 소각, 약탈하였다. 농촌은 대혼란에 빠지고 강도의 무리가 횡행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농민들은 밤에 문을 잠그고 또는 무장하여 자기방위를 하는 등 공포 분위기가 살벌하였다.
이러한 농촌의 혼란과 난동에 관한 보고가 8월초 국민의회에 전해지자 극단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일부 귀족들이 봉건 특권의 폐지를 제의하자, 나머지 귀족과 성직자들도 봉건제의 폐지에 찬성하였다. 이 때에 나온 8월의 법령은 "봉건제의 사망문서"라고 불리는 의미심장한 조치였다. 8월의 나머지 기간에 의회대표들은 새 헌법의 기본원칙이 될 문서를 기초하였다. 자유시민의 불가양의 권리들을 차례로 적은 이 기본원칙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이미 영국의 혁명과 미국혁명의 결과 답변확정된 "권리장전"과 미국 "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으며, 루소의 정치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1791년 9월까지 국민제헌의회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다. 거기에 의하면 국가의 주요 기관은 선거를 통한 2년 임기의 입법의회였는데, 그것은 법률을 제안하고 통과시키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기관이었다. 새 헌법에 의해서 국왕은 여전히 중요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 권한은 의회에 의해 견제되도록 하였다.
권리선언에 보장된 권리에도 불구하고, 1791년에 제정된 헌법은 제한선거제를 답변확정하였다. 모든 프랑스 남자시민은 능동시민과 피동시민으로 양분되었으며, 일정액 이상을 납세하는 능동시민만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거인과 의원후보는 더욱더 심한 재산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2,600만의 프랑스 인구 가운데 5만 명만이 선거인이 될 자격이 있었고, 의원직 피선거권은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갔다. 일반시민들의 발언권은 이와 같이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간접선거제로 인하여 그 비중이 더욱 약하였다. 예컨대 능동시민은 선거인들을 선거할 뿐이며, 그들이 다시 입법의원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권리선언 6조에서 모든 시민이 입법과정에 대한 참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91년의 프랑스 헌법은 재력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반영한 데 불과하였다.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한 이외에도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중에서도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과 권한을 없애고, 성직자들을 공무원으로 만들었던 "성직자 기본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조치를 거부한 성직자들은 "비선서성직자"로 박해받게 되어 반혁명 세력에 동참하게 되었다. 정부는 국채총액에 해당하는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그것을 담보로 지폐역할을 할 아시냐를 발행하게 되었다. 일종의 불태환지폐와 같은 아시냐는 처음에는 제한부로 발행되었으나 점차 증발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게 되었다.
3. 입법의회 시기
프랑스 혁명은 1791년 중기 이후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농민이나 도시의 소시민들은 제헌의회가 제정한 헌법에 따라 소집된 입법의회에 대해 결코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입법의회는 벽두부터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되었다. 입헌 체제의 유지를 바라는 우익보다는 혁명을 더 과격하게 밀고 나가려는 좌익에 더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았다.
더구나 프랑스 정치의 대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대외 관계도 복잡해져갔다. 1792년 봄에 제1차 대불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는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대불 동맹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혁명 세력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지만, 구체적인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주로 독일 지방에 망명한 반동귀족들이 국경지대에서 반혁명운동을 책동하고, 이를 위해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2) 봉건제 폐지로서 일부 독일 지방의 제후들이 알사스 지방의 권리를 잃었으므로 그 보상을 요구하였다. 3) 아비뇽 시민의 요청에 의해 국민제헌의회는 아비뇽 시를 프랑스에 병합하였는데, 그것은 본래 교황령에 속하였다.
그러나 1792년 4월에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군이 열세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침입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동맹군의 사령관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은 프랑스 국민에게 포고문을 내서 혁명분자들을 위협하고 왕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 파리 시민은 반혁명 세력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1794년 8월 9일과 10일에 주로 과격파가 중심이 되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파리 자치시 정부가 점령되었다. 의회는 개회 중이었으나 우익 의원들은 폭도들을 겁내어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좌익 의원들이 왕권정지를 가결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국민공회 선거를 규정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제 프랑스의 실질적인 지배권은 당통이 장악하게 되었고, 파리 자치시 정부는 도시하층민을 대변하게 되었다.
당통은 1개월 가량의 기간에 정력적인 활동을 개시하여 외세침입을 막기 위한 군대 모집사업을 추진시켰다. 프랑스에서는 반혁명의 기운을 꺾기 위해 가택수색이 벌어지고, 혐의자는 가차없이 투옥되었다.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의 기간에는 천 명 이상의 왕당파가 무차별 학살되었다.
왕정이 정지된 후 입법의회는 능동시민과 피동시민의 구분 없이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시민의 투표권을 인정하였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0일 그 첫 회합을 갖고, 그 다음날에는 국민공회는 프랑스의 왕정을 폐지하고 1792년 9월 22일로서 공화정의 제1년이 시작함을 공고하였다. 이리하여 비교적 온건한 프랑스 혁명의 제1단계는 끝났던 것이다.
4. 프랑스의 제1공화정
라파예트 같은 진보적인 귀족계층이 주도하고 재산 소유정도와 교육수준이 높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이 크게 반영된 프랑스 혁명의 1단계는 끝나고, 이제 도시의 소시민층이 주도한 혁명의 2단계가 시작되었다. 급진적인 공화제를 답변확정한 국민공회는 이제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1) 폐위된 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2) 외국군의 침입으로부터 어떻게 프랑스를 구원할 것인가? 3)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과 폭동을 어떻게 진압할 것인가? 4) 군주제를 대체한 공화제를 합리화하는 헌법의 내용은 어떻게 규정될 것인가? 5) 1789년부터 1791년까지 사이에 국민제헌의회에서 입법한 경제, 사회적 개혁은 어떻게 집행되고 완성될 수 있는가?
프랑스 혁명이 시작됨과 거의 동시에 정당이나 정파가 형성되었으며, 국민공회가 소집된 기간 중에는 좀더 과격한 정파들이 정계를 좌우하게 되었다. 브리소파라고 칭한 지롱드당에는 195명의 의원들이 국민공회 우측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대쪽인 좌측에는 산악파가 앉아 있었는데, 이들은 자코뱅당 소속의원들이었다. 이 두 파의 중간의석을 차지한 국민공회 대다수 의원들은 평원파라고 불렸다.
일단 왕정이 폐지되자 혁명 주도 세력은 점점 극단적인 노선을 답변확정하게 되었다. 급진파인 산악파는 국왕이 살아있는 한 왕정복고의 음모가 계속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왕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표결 결과 사형이 확정된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날은 1793년 1월 21일 아침이었다. 국왕의 처형 소식으로 전 유럽의 군주들은 경악하였으며, 또다시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인 공세를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792년 초가을에 벌어진 발미 전투 이후에 잠시 후퇴했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국은 1793년 봄에 새로운 침공을 계획하였다. 이제는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및 그 밖의 군소 국가들도 대불동맹군에 합세하였다.
이로써 당시에 프랑스의 방위 문제가 긴박한 과제로 부각되었으나, 지롱드당과 자코뱅당 사이에는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전개되고 있었다. 지롱드당은 주로 지방의 지지를 받았고, 자코뱅당은 도시 특히 파리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다. 두 당파간의 싸움은 파리 시민의 6월 폭동을 통하여 지롱드당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롱드당은 지방에서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쟈코뱅당은 자체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자코뱅당이 주도한 정부는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고 전쟁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상당 부분의 권한을 공안위원회에 위임하였다. 또한 보조기관으로 일반보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를 두었는데, 일반보안위원회는 반역자를 색출하며, 혁명재판소는 재판하고 처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공안위원회와 그 보조기관은 "공포정치"라 알려진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파리에서만 5,000 여명이 처형되고, 지방에서는 처형된 사람의 수가 2만 명에 달하였다.
혁명정부는 국내의 반혁명적인 요소를 일소함과 동시에, 전쟁수행의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전 국민에게 병역을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것이었다. 국민공회는 1793년 초에 30만 명에 대한 소집령을 내리고, 18세에서 40세에 이르는 모든 남자의 군복무를 규정하였다. 또 1793년 8월에는 국민총동원령이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자는 등록되어 전쟁을 돕고 노동자들은 징발되어 군사업무에 할당되었다.
자코뱅당의 주도하의 프랑스 정부는 대내적으로 국민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새 기풍을 조성하였다. 먼저 아주 강력한 반(反)기독교 운동이 전개되었다. 교회가 폐쇄되고, 종교적인 조각상이 파괴되었다. 기독교 대신에 이성교(理性敎)가 창시되어 1793년에 노틀담 교회에서 이성의 축제가 벌어졌으며,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존재에 대한 종교를 창시하였다. 또한 복장에서 남자들은 귀족의 차림에 반대하여 상퀼로트를 입었는데, 이 의복은 그 이래로 서양식 남자 바지가 되었다. 또 귀족 칭호는 없어지고, "시민"이라는 단어가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 되었다. 가정마다 혁명가들의 흉상들이 비치되었고, 거리명칭은 왕이나 귀족의 이름으로부터 혁명적 사건이나 영웅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794년 봄 무렵이면 프랑스는 대외전쟁에 있어서나 국내사정에 있어서 안정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공안위원회를 장악한 로베스피에르는 기요틴을 정치적 도구로 삼아 공포정치를 지속시켰다. 그의 일파는 과격한 에베르 일당을 숙청하고, 다시 당통과 그 밖의 분파의 주도자들을 처형하고 독재정치를 확립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미온적인 공화론자들을 숙청하고 모든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사심 없는 애국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의 목표는 이상적인 "덕의 공화국"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로베스피에르의 광신적인 이념에 무관심하였고, 공포정치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국민공회는 1794년 7월에 로베스피에르의 영도권을 거부하고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5. 총재 정부와 나폴레옹의 쿠데타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프랑스에서는 다시 반동체제가 성립되었고, 혁명은 다시 부르주아 중심으로 돌아갔다. 많은 혐의자들이 석방되고 로베스피에르 시기에 제기된 입법이 파기되었으며, 파리 자치시 정부, 공안위원회 및 혁명재판소는 해체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체제를 이끄는 두 집단은 혁명으로 벼락부자가 된 계층 및 왕정복고를 기피하는 국민공회 의원들이었다.
이제 국민공회가 결정한 정부설치령에 따라서 5명의 총통으로 된 행정부가 구성되고 양원제 입법부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1795년에 집권한 총재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하였다. 국내 경제사정은 악화되고 있었으나, 대외전쟁 중 오스트리아 군과의 교전은 성공적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 군사적인 승리를 통하여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1796년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사르디니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대불동맹국으로서 프랑스에 맞설 수 있는 주요 국기로는 해군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영국만이 남았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하는 의미에서 인도로 가는 길목인 이집트를 원정하였다. 그는 대체로 육전(陸戰)에서는 우세를 유지하였으나 나일 해전에서 넬슨의 영국해군에 패배 당하였다. 1799년 나폴레옹은 급히 단신 귀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을 수습하지 못하는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