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공100> 1870년~ 1960년 사이에 부산에 지어진 건축물은 무엇무엇...

<내공100> 1870년~ 1960년 사이에 부산에 지어진 건축물은 무엇무엇...

작성일 2004.03.25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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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건축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1870년에서 196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부산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었는데요...

전쟁이나 일본의 침략기 등으로 해서 자료가 많이 부족합니다.

지식인들이 도움을 간절하게 구합니다.



- 1개 2개등의 자료가 아닌 다수의 건축물에 관한 자료였으면 합니다.

- 출처가 명시되어졌으면 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부산광역시청에 주르르...
예를 들어..

구 경남도청사

경상남도청은 1925년 4월 1일(실제 업무개시는 4월 25일)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왔다. 도청이전의 이유는 부산은 유일한 항만 관문일 뿐 아니라, 교통의 중심지이며, 산업·교육·문화 등의 시설이 상당히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청은 부산부 부민정 2정목(현 부민동 2가)에 있었던 자혜병원의 신축 건물에 임시로 사무를 보게되었다. 또한 병원 주변 대지 8,735.7평을 경남도청 건물 및 그 대지로, 1923년 착공 1925년 4월 준공하였다.

본관은 2층 붉은 벽돌 건물인 서구식 르네상스 양식의 변형된 양식으로, 1984년11월부터 2001년 9월까지 부산지방 검찰청사로 사용되었다. 1983년 도청이 창원으로 옮기기 직전에는 서구 부용동 2가 16번지 일대 4필지와 부민동 1가외 12필지의 대지 9,619평에 도 본청 등의 건물이 있었다. 8.15 광복이후 미군정정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년 10개월만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8월 18일 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9월 28일 서울수복으로 10월 27일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1차로 임시수도로서 경남도청의 본관은 정부청사, 상무관은 국회의사당, 뒤편 경찰국은 군·경합동 작전사령부로 쓰였으며, 도지사의 관사는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었다.

1950년 11월 28일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2차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환도(8월 15일) 때까지 1차 때와 같이 사용되었다. 1963년 1월 1일부로 부산이 정부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에도 경상남도청은 부산시에 계속 있었다. 1983년 7월 1일 창원으로 경남도청사가 이전하였다.


구 부산시청사

부산부청사는 알제강점 당시 부산이사청 청사를 사용하였는데 그 건물은 1904년 일본영사관 건물로 건축된 것이다. 그 위치는 오늘날 중구 동광동 용두산 남쪽 중턱(기업은행 동광동지점 뒷편 언덕)에 있었다. 1929년 부청사 이전계획이 구체화되어 예산에 올랐으나 부재정(府財政)이 어려워 시행되지 못하다가, 1933∼34년의 계속사업으로 추진하여 총독부 부담 18만원과 부산부 부담 12만원으로 계획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롯데월드 자리인 용미산터에 자리잡게 되었고, 부지는 국유지 660평, 인접 부유지 507.5평 합계 1167.5평으로 충당하였다. 청사 신축설계는 수정을 걸쳐 1934년 2월 23일 확정하고, 준공일을 1935년 10월 18일로 결정하여 추진하였다.

이후 공사는 설계변경과 부대공사로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여 준공일을 1936년 1월 24일로 다시 연기하였다가 부청사 부속창고 등 기타 시설공사로 준공기한을 1936년 3월 31일로 연기하여 1936년 3월 31일 준공을 보아 4월 1일부터 사무를 시작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서구의 전형적인 공공건물 양식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었다.

8.15광복 이후 부산시청사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8년 1월 연제구 연산동 1000번지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중앙동시대를 마감하고 그 자리에 제2 롯데월드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구 부산역

1901년 6월 창립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8월 초량과 영등포에서 동시에 경부선 철도부설공사를 착공하였는데, 1903년 러일관계가 악화되자 일본정부는 공사를 서둘러 1904년 11월 전 노선을 준공, 1905년 1월 1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당시 남쪽 기점이 초량이어서 교통상 매우 불편하였다. 1908년에는 철도를 부산까지 연장하여 동년 4월 1일 임시 부산역사에서 철도업무를 개시하였다. 1909년 1월 8일 순종 황제의 순행이 있어 처음으로 궁정열차를 운행하였다.

부산역사(釜山驛舍)는 1908년 6월에 착공하여, 1910년 10월 31일 준공하였다. 건물의 평수는 370.6평에 처마 높이가 34척, 둠(Doum) 지붕의 꼭대기까지는 75척 높이에 이른다. 역사건물은 대단히 아름다운 건축으로 맞은편의 부산세관청사와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본래 매축지로 지반에서 25척 땅속 깊이까지 말뚝을 숱하게 박고 요소 요소에 콘크리트를 넣어 붉은 벽돌 말장을 걸친 다음에 기초부분 전부를 연결시켜 놓았다.

건물은 철저한 서구식 건축기법에 따른 붉은 벽돌 건물로서 외관 장식은 벽돌벽의 상반부에 화강암으로 세 겹의 테두리를 둘렀고, 처마 밑에는 벽돌과 화강암을 엇갈린 사라센 계통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지붕은 슬레이트로 이었고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角塔)이 있었다. 구내에는 대합실, 매표실, 욕실, 화장실 등이 마련되어 있는가 하면 일반승객의 숙박을 편하게 해주는 설비까지 갖추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어 사라져 버렸다.


구 부산지방기상청

우리 나라는 안개, 일식 등이 관측된 기록이《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등에 기상기록이 전하여 오고있다. 특히, 조선 세종 23년(1441)에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를 발명하여 8도감영에 설치함으로써 과학적인 전국의 강우량 측정망을 구축하였다.

그후 1904년 3월 7일에는 기상업무 전담기구인 측우소가 부산·인천·목포에 설치되어, 동년 4월 체계적인 기상업무가 이루어지고, 1905년 12월 31일 榮町(현 영주2동)에 임시 청사를 지어 1906년 9월 1일 기계식 지진계를 설치 지진측정이 시작하고, 중구 대청사의 현 청사는 1933년 7월 착공 12월 준공하여, 1934년 1월 이전하였다. 건물은 4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변형된 르네상스 양식이며, 본 건물은 선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꼭대기 층과 지붕의 모습은 선장실을 상징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39년 7월 조선총독부 기상대 부산측우소로 개칭되었고, 1948년 8월 국립 중앙기상대 부산측우소로 개칭, 1992년 부산지방지방기상청으로 승격하였다. 2002년 1월에는 청사를 동래구 명륜동으로 이전하여 부산·경남지역과 남해안 일부의 기상관측을 담당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1호(2001. 10. 17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구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진에 있었던 사립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는 호주장로교 선교회 여자전도부가 1895년 10월 15일 촤천동 초가에서 3년의 소학교 과정으로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선교사 Menzies(1895∼1902)로 1905년 4월 15일 초가집을 허물고 근대식 건물을 준공하였다.

건물은 2층 벽돌 서민풍의 건축양식으로 1층 40.35평, 2층 38.25평 총 76.8평이다. 정면 4각형에 가까운 평면은 장식이 없으나, 전면에 벽돌의 長柱를 2층 처마까지 계속하여 세우고, 2층에는 목조의 발코니를 내고 거기에 외부에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배치하였다.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형태였다. 1층 벽체는 4군데의 창둘레의 벽돌외에는 전부 石材로 되어 있고, 2층은 벽돌로 쌓았다. 이 건물은 1905년 준공된 부산 상품진열관과 대비할 때 같은 벽돌 건축물이기는 하나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하나는 경제침략을 위한 중대한 사업으로 추진된 우수한 기술자까지 고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선교를 위한 교육시설이란 점에 있어서 두 건물이 나타내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할 것이다.

1909년 8월 9일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고등과(수업연한 3년)를 병설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여성이 높은 교육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1913년 3월 고등과 제1회 졸업생(4명)을 배출하였다.

1915년 8월 7일에는 학칙개정에 의해 수업연한 3개년이었던 소학교를 4개년으로 하고 고등과를 4개년으로 하였다. 이 고등과는 1925년 6월 10일, 동래구 복천동 500번지에 신축교사(현 우성아파트)를 지어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라 불리게 되었으니, 좌천동의 부산진 일신여학교 고등과는 오늘의 동래여자고등하교 전신이 된다. 1987년 1월 19일 현재의 부곡동 교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舊) 부산진 일신여학교 현재 부산 경남교역자연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건물은 부산시 기념물 제55호(2003. 5. 2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구 조흥은행 영주동 지점

구 조흥은행 영주동지점 건물은 부산부 영정(榮町) 3정목(丁目) 71(현 동구 초량동 1210-15번지)에 위하였던 건축물이었다. 1892년(명치 25) 7월 第五十八銀行 부산지점이 개업하여 영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명치 42) 第五十八銀行과 제第百三十銀行의 합병으로 百三十銀行 부산지점으로 개편되었다가, 1923년(대정 12) 1월 安田銀行 부산지점으로 개칭하였다.

본 건물은 1926년 6월 착공, 1927년 8월에 준공하여 安田銀行 부산지점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부산지역의 대다수 공공건물들이 그랬듯이 서구양식의 건축물로 2층 벽돌의 서구식 르네상스 양식이며, 외벽은 잘 다듬은 화강석을 잘 조화시켰고, 실내는 철골 콘크리트로 마무리하고 있다. 건물은 비대칭 구성을 이루고 있으면서 안정감이 잘 배려되어 있을 뿐 아니라 창틀과 창틀사이는 원형으로 화강석을 둘러 웅장감을 느낄 수 있다. 건물이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은 잘 고려된 비례관계의 소치이다.

본 건물은 1928년 대구은행과 경남은행이 합병한 주식회사 경상합동은행 부산지점이 1936년 5월 1일 이곳으로 옮기면서 사용되었다. 1941년 10월 1일 漢城銀行과 경상합동은행의 통합으로 한성은행 북부산지점으로, 1943년 10월 1일 한성은행과 동일은행 합병으로 조흥은행 북부산지점 이후 계속하여 은행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88년 5월 2일 1년여의 공사 끝에 현대식 건물을 신축준공으로 당시까지 보존되어오던 부산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이었으나, 행정기관의 무관심과 기업의 영리목적에 의해 주요 문화유산이 사라져버렸다.


구포다리

구포다리로 더 잘 알려진 이 다리는 1930년 9월 13일 착공하여 1932년 3월 7일 준공되었다. 길이 1060m, 폭 8.4m(중앙차도 5.4m, 좌우보도 각 1.5m)의 게루바식판항교로 교각이 56개이다. 강서구 대저동과 북구 구포동을 잇는 다리로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으므로「낙동장교」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공사 총인원은 7,760명, 공사비 70만원(정부보조 40만원, 지방비 19만원, 지방지원부담 11만원)이 소요되었다.

이 다리 건설이전 구포와 대저 사이는 나룻배로 왕래하였다. 다리가 개통된 이후 구포는 경남지방과 경부선을 통한 내륙지방과 연결하는 교통요지로 새로운 면모로 바뀌었다. 이 다리는 그 동안 부산과 경남을 잇는 대동맥으로 산업·경제·문화·정치의 교량역할을 해왔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물자 수송에 큰 몫을 해낸 귀중한 것으로 낙동강과 더불어 우리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97년 12월 첨단공법을 이용한 구포대교의 준공되었다. 구포다리는 노후화가 지속되어 붕괴의 우려로 차량통제를 하고 있다.


부산근대역사관(구 미문화원)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이라 칭함) 부산지점 건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동척은 1910년(명치 43년)에 마산출장소를 설치하여, 1920년(대정 9)에 마산지점으로 승격되었다. 1921년(대정 10) 부산 榮町(현 영주2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29년(소화 4) 지금의 대청동으로 옮겨왔다. 건축은 철근콘크리트 3층으로 외벽 기초에는 대리석을 벽면에 두르고 바닥에도 대리석을 깔아 웅장함이 느껴진다.

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에는 문양을 넣고, 실내는 전형적인 은행 건물형태로 대형 기둥을 세워 문양을 새겨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창문은 아치 형태로 되어있고, 옥상을 철근콘크리트로 마무리하였다. 동척 부산지점은 일제가 우리나라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책회사로 토지와 금융수탈의 선봉 역할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를 강제로 매수·착취하였다.

이 건물은 부산·경남지역의 토지 및 경제 침탈을 자행하였던 식민지 정책의 대표기관의 건물로 사용되어왔다. 8.15 광복 이후 이 건물은 미군이 진주하여 주둔지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9월 11일 체결된 "한미간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미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1950∼53년까지 한국전쟁기에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 1982년 3월 반미학생운동으로 방화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84년 1월 부산미문화원 2층에 영사관을 개설하여 부산, 대구, 경남·북, 제주도의 영사업무를 담당하여 오다가 1996년 미대사관으로 통합 운영하게 되면서 폐쇄되었다. 미문화원으로 50년 3개월 동안 무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9년 4월 30일 우리정부에 반환하였다. 6월 10일 재정경제부와 협의를 통하여 시유지와 교환으로 부산시에 이관되었다. 부산시에서는 건물의 역사성과 주변환경을 고려하여 부산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현장학습의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여 2002년 7월 3일 개관하였다. 이 건물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9호(2001. 5. 16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부산 상품진열관

商品陳列館은 부산항 개항이후 부산에 모습을 들어냈던 서구식 건축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최초의 신축 건물이었다. 오늘날의 중구 신창동(현 미라지오 상가 자리)에 1903년 6월 착공, 1904년 12월에 준공하여 4개월 뒤인 1905년 4월 17일 개관식을 가졌다 한다.

대지면적 65평에 건물은 연건평 165평, 총공사비 8만여원을 들인 3층벽돌 건물로 내외부는 물론 건축자재까지 붉은 벽돌과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쓴 완벽한 서구식 기법으로 중세 프랑스 스타일이나 외벽의 구성은 오히려 독일풍과 영국풍의 요소를 두루 갖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특징은 중앙 입구의 아치를 전면 폭의 3분의 1가량으로 잡고 그 높이도 2층까지 닿게하고 그 좌우에 원형 탑형의 室을 3층까지 쌓아 올림으로써 좌우대칭이 엄격하고, 장중한 아름다운을 주었다. 층대(層帶)에 의한 각층의 분할을 기의 같은 비례로 하였고, 또한 각 층마다 외관의 구성을 달리하고 있다. 1층은 화강석으로 수개의 폭선을 돌리고, 2층은 단순한 벽면에 미식창(眉式窓, 미닫이 창)을 내고, 3층에는 아아케이드(Arcade)형식의 연속창을 내어 그 중앙부분에 석조난간을 붙였다. 부산 상품진열관에는 분수대와 연못을 중심으로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도 마련되어 있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에 순행 왔던 순종 황제가 1월 9일 부산상품 진열관을 시찰하고 5백만원을 하사하였고, 이듬해 1910년 정부에서도 2천원의 지원금을 주었다. 4월 21일 신장개관 때 2층에는 일본수입 상품과 부산지방 생산 상품을 진열했고, 3층에는 우리나라 곳곳의 상품과 참고자료를 진열해 놓았다. 1층에는 우리나라 농상공부에서 기증한 조선지리 모형을 진열해 두었다 한다. 2층 원탑형방에는 신문열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부산상품 진열관은 부산최초의 서구양식의 건축물로서 그 가치는 대단하였으나 건물이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도시심의 상권발달로 인해 신축건물 건립에 따라 철거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63년까지는 현존하고 있었으나,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산세관

부산세관의 효시는 1878년 9월 27일 지금의 동구 수정동에 설치되었던 두모진해관이다. 조선정부에서 두모진해관을 설치해 일본상인들에게 관세를 징수하자 일본관리관은 10월 9일 해관 설치가「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 위배된다고 동래부사에게 철폐를 요구하였다. 그날 일본상인 135명이 동래부로 몰려와 항의 시위를 벌였고, 11월 24일에는 대리공사 하나부사는 군함을 이끌고와 사람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계속되는 철폐요구와 시위에 12월 해관 폐쇄와 관세징수를 중지하였다. 1883년「조일관세협정」이 체결되면서 1883년 11월 부산해관이 개설되어 관세사무를 담당하였다. 1905년「신한일협약(을사조약)」을 맺어지면서 외교권이 박탈당하면서 부산해관 사무가 일본에 넘어가고 그 명칭도 부산세관으로 바뀌었다.

본 건물은 1905년 세관확장공사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나, 착공일자는 알 수 없다. 부산세관 청사가 우람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0년 11월이다. 건너편에 있었던 부산역 건물과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건물로 쌍벽을 이루었던 건물이었다. 총면적 308.4평에 건물은 146.9평으로 2층 벽돌건물로서 길모퉁이를 따라 그 평면이 ㄱ자의 건물로 우측 모퉁이에는 8각의 4층탑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의 양식은 영국풍의 르네상스 양식이며, 벽돌과 다듬은 화강암을 잘 조화시킨 외관을 갖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비대칭 구성을 이루고 있으면서 안정감이 잘 배려되어 있었다.

건물의 중앙 현관문 좌우측에 있는 창출부는 우측에 비하여 좌측이 작은데, 그 상부에 좌보다는 2배 높이의 탑을 얹음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모퉁이의 탑신은 별다른 장식도 없이 쌓여있는 한편 아치 창문을 내달아 아담한 모습이 돋보이게 해놓았다. 이 건물은 1973년 6월 7일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가, 1979년 6월 22일 부산대교의 건설과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철거되면서 사라져버렸다. 건물 지붕위의 철탑은 부산경남 본부세관에 보관되어 있다.


부산우편국

1876년 11월 1일 부산에 제국우편국을 창설하여 초기에는 관리청내에 두었다. 1884년 업무를 개시한 전신국과 우편사무를 통합하여 부산우편전신국이라 하였다. 1905년 5월 한일통신기관합동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소속의 통신기관 부산우편사 및 부산전보사의 사무를 계승하여 부산우편국이라 개칭하였다.

우편국 청사는 벽돌 2층 건물로 신축하여 1910년 5월 25일 준공된 건물로 연면적이 848평(1층 485평, 2층 351평, 3층 12평)이다. 건물의 표면에는 화강석 대석위에 벽돌을 쌓고 표면을 몰탈로 바른 러스티카 형식으로 하였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르네상스식 요소는 모두 갖추었고, 주현관문 角部의 상부에 8각형 드럼(Durm) 위에 도움(Dome)을 올려 위풍을 도우고 있다. 그리고 여타 작은 출입구 측부에는 단개주를 붙였다. 2층 창은 홍예창으로 하고 지붕은 만사드로우프로 되어 있다.

건물의 전체적인 특징으로 볼 때 기발한 점은 없으나, 큰 규모에 안정되고 장중한 감을 주는 건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 건물은 당시 부산역사, 부산세관청사와 더불어 부산 3대 건축이라 불리었다. 이후 1959년 준공한 부산우체국청사를 신축하여 사용하다가, 1985년 12월 착공 1989년 3월 현청사를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지곡수원지

어린이대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동천의 상류계곡으로 상류에는 성지곡수원지가 있다. 부산의 이름난 경승지로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유명한 풍수지리 지관인 성지라는 사람이 전국의 명산을 찾던 중 경상도에서 가장 빼어난 골짜기를 이곳에서 찾고는 성지곡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한다.

우리 나라에 있어 상수도의 도입은 부산에서 비롯되었다. 개항 이후 일본전관거류지내에서는 왜관 내에 과거부터 내려오던 2갱의 정호수(井戶水)를 사용해 오다가 1880년 처음으로 보수천 상류로부터 대흠통에 의한 도수설비를 하여 물을 받아쓰기 시작했고, 1886년에는 이를 나무통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설만으로는 거류민의 급증과 다수의 일본 어선들에 대한 급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고, 청일전쟁의 반발로 다수의 일본군인들까지 상주하게 되자 1894년 6월부터 보수천에 집수언제(集水堰堤)를 축조하여 자연여과장치로 하는 한편 일본거류지 내의 대청동배수지를 만들어 내경(內徑) 약 15㎝의 토관(土管)으로 이를 송수(送水)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1895년 1월에 준공하였다. 이것이 부산상수도의 효시이다.

성지곡 상류에 있는 수원지는 1907년 일본인들에 의해 착공되어 1909년 9월에 완공(면적은 7,920㎡)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상수도 수원지로서 제방의 높이가 27m에 이르는 철근콘크리트로 축조되었다. 당시로서는 거대한 토목공사였고, 서면에서 지금의 동광동까지 급수한 수원지이다. 그러나 1972년 물금에 낙동강 상수도 취수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이 수원지는 유원지와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영도대교

부산시민들에게 영도다리로 더 잘 알려진 영도대교(개통 당시에는 부산대교)는 부산 본토와 유인도인 영도 사이를 잇는 연육교로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되었다. 정식 명칭이 당시 부산대교이던 이 다리의 길이는 214.63m, 폭은 18m, 교량의 면적은 3,948㎡, 도개면적은 1,044㎡터이며, 또한 도개속도는 저속일 때 4분, 고속일 때 1분 30초, 도개동력으로는 22마력이다.

그중 부산 내륙측은 31.30㎝를 도개교로 하여 1,000톤급 기선의 운항을 가능하도록 건설되었으며, 그 밖의 부분은 캔틸레버식 강판항교로 하였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 만조시에도 50톤급 이하의 기선이 교량 밑을 자유로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의 화폐로 총공사비 700만 8천원이 투입되었다.

이 대교 가설공사는 당시 매우 어려운 토목공사로서 현재 영선초등학교와 해동고등학교 자리의 산을 깎아 영도대교 호안 매립공사를 하면서 산이 무너져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노무자들이 비명에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다리 자체공사 때에도 희생자가 속출하여 밤이 되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 1934년 11월에 개통된 이 다리는 하루에 여섯 번씩 도개 부분이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다리로서 개통식날 신기한 이 도개식 다리를 보기 위하여 부산을 비록 인근 김해·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의 학정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말없이 지켜 본 영도대교는 전설 같은 옛 이야기만 남기고 지난 1966년 9월 1일 도개식의 기능이 멈추었다. 영도다리는 우리 나라의 근현대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현장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임시수도기념관(구 경남도지사 관사)

임시수도기념관은 서구 부민동 2가 2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부 부민동으로 옮겨 온 것은 1925년 4월 17일이었다. 그에 따라 부민동 3가 221번지에 경상남도지사 관사가 1926년 8월에 준공되었다. 건물은 목조 2층 일식기와집 양식이다. 그 이후 줄곧 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도가 서울에서 대전·대구를 거쳐 8월 18일에 부산으로 옮겨져 경상남도 도청은 중앙정부 청사의 중심부가 되고, 도지사 관사는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도지사 관사가 대통령이 집무하는 관저가 된 것은 1950년 8월 18일 이후였다. 그러나 그해 9월 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정부는 서울로 환도(10월 27일)하였다. 하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로 다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 성립과 함께 환도(8월 15일)할 때까지 부산은 중앙정부의 임시수도 역할을 하였다.

1963년 부산시가 정부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상남도의 관할에서 벗어나고, 경상남도 도청은 1983년 7월 1일 창원에 새청사를 신축하여 옮겨갔다. 1984년 11월 1일부터는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지방법원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도지사 관사는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유물전시를 위하여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기념관에는 임시수도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품이 여섯개 방에 전시되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한국전쟁 44주년을 맞아 1997년 6월 24일에는 한국전쟁의 내용과 임시수도로서의 부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기념관으로서 민족상잔의 역사를 이해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새천년을 맞아 시에서는 건물의 개·보수와 한국전쟁 당시의 생화유물 등을 수집, 구입을 토해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관 하였다. 시에서는 건물의 전면 개보수를 통하여 전시공간의 재단장을 위한 시설공사를 진행하여 2001년 상반기 개관예정이다. 부산광역시에서는 기념물 제53호(2002. 5. 6 지정)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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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청에 주르르...
예를 들어..

구 경남도청사

경상남도청은 1925년 4월 1일(실제 업무개시는 4월 25일)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왔다. 도청이전의 이유는 부산은 유일한 항만 관문일 뿐 아니라, 교통의 중심지이며, 산업·교육·문화 등의 시설이 상당히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청은 부산부 부민정 2정목(현 부민동 2가)에 있었던 자혜병원의 신축 건물에 임시로 사무를 보게되었다. 또한 병원 주변 대지 8,735.7평을 경남도청 건물 및 그 대지로, 1923년 착공 1925년 4월 준공하였다.

본관은 2층 붉은 벽돌 건물인 서구식 르네상스 양식의 변형된 양식으로, 1984년11월부터 2001년 9월까지 부산지방 검찰청사로 사용되었다. 1983년 도청이 창원으로 옮기기 직전에는 서구 부용동 2가 16번지 일대 4필지와 부민동 1가외 12필지의 대지 9,619평에 도 본청 등의 건물이 있었다. 8.15 광복이후 미군정정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년 10개월만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8월 18일 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9월 28일 서울수복으로 10월 27일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1차로 임시수도로서 경남도청의 본관은 정부청사, 상무관은 국회의사당, 뒤편 경찰국은 군·경합동 작전사령부로 쓰였으며, 도지사의 관사는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었다.

1950년 11월 28일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2차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환도(8월 15일) 때까지 1차 때와 같이 사용되었다. 1963년 1월 1일부로 부산이 정부 직할시로 승격된 이후에도 경상남도청은 부산시에 계속 있었다. 1983년 7월 1일 창원으로 경남도청사가 이전하였다.


구 부산시청사

부산부청사는 알제강점 당시 부산이사청 청사를 사용하였는데 그 건물은 1904년 일본영사관 건물로 건축된 것이다. 그 위치는 오늘날 중구 동광동 용두산 남쪽 중턱(기업은행 동광동지점 뒷편 언덕)에 있었다. 1929년 부청사 이전계획이 구체화되어 예산에 올랐으나 부재정(府財政)이 어려워 시행되지 못하다가, 1933∼34년의 계속사업으로 추진하여 총독부 부담 18만원과 부산부 부담 12만원으로 계획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롯데월드 자리인 용미산터에 자리잡게 되었고, 부지는 국유지 660평, 인접 부유지 507.5평 합계 1167.5평으로 충당하였다. 청사 신축설계는 수정을 걸쳐 1934년 2월 23일 확정하고, 준공일을 1935년 10월 18일로 결정하여 추진하였다.

이후 공사는 설계변경과 부대공사로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여 준공일을 1936년 1월 24일로 다시 연기하였다가 부청사 부속창고 등 기타 시설공사로 준공기한을 1936년 3월 31일로 연기하여 1936년 3월 31일 준공을 보아 4월 1일부터 사무를 시작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서구의 전형적인 공공건물 양식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었다.

8.15광복 이후 부산시청사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8년 1월 연제구 연산동 1000번지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중앙동시대를 마감하고 그 자리에 제2 롯데월드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구 부산역

1901년 6월 창립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8월 초량과 영등포에서 동시에 경부선 철도부설공사를 착공하였는데, 1903년 러일관계가 악화되자 일본정부는 공사를 서둘러 1904년 11월 전 노선을 준공, 1905년 1월 1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당시 남쪽 기점이 초량이어서 교통상 매우 불편하였다. 1908년에는 철도를 부산까지 연장하여 동년 4월 1일 임시 부산역사에서 철도업무를 개시하였다. 1909년 1월 8일 순종 황제의 순행이 있어 처음으로 궁정열차를 운행하였다.

부산역사(釜山驛舍)는 1908년 6월에 착공하여, 1910년 10월 31일 준공하였다. 건물의 평수는 370.6평에 처마 높이가 34척, 둠(Doum) 지붕의 꼭대기까지는 75척 높이에 이른다. 역사건물은 대단히 아름다운 건축으로 맞은편의 부산세관청사와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본래 매축지로 지반에서 25척 땅속 깊이까지 말뚝을 숱하게 박고 요소 요소에 콘크리트를 넣어 붉은 벽돌 말장을 걸친 다음에 기초부분 전부를 연결시켜 놓았다.

건물은 철저한 서구식 건축기법에 따른 붉은 벽돌 건물로서 외관 장식은 벽돌벽의 상반부에 화강암으로 세 겹의 테두리를 둘렀고, 처마 밑에는 벽돌과 화강암을 엇갈린 사라센 계통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지붕은 슬레이트로 이었고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角塔)이 있었다. 구내에는 대합실, 매표실, 욕실, 화장실 등이 마련되어 있는가 하면 일반승객의 숙박을 편하게 해주는 설비까지 갖추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어 사라져 버렸다.


구 부산지방기상청

우리 나라는 안개, 일식 등이 관측된 기록이《삼국사기》,《고려사》,《조선왕조실록》등에 기상기록이 전하여 오고있다. 특히, 조선 세종 23년(1441)에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를 발명하여 8도감영에 설치함으로써 과학적인 전국의 강우량 측정망을 구축하였다.

그후 1904년 3월 7일에는 기상업무 전담기구인 측우소가 부산·인천·목포에 설치되어, 동년 4월 체계적인 기상업무가 이루어지고, 1905년 12월 31일 榮町(현 영주2동)에 임시 청사를 지어 1906년 9월 1일 기계식 지진계를 설치 지진측정이 시작하고, 중구 대청사의 현 청사는 1933년 7월 착공 12월 준공하여, 1934년 1월 이전하였다. 건물은 4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변형된 르네상스 양식이며, 본 건물은 선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꼭대기 층과 지붕의 모습은 선장실을 상징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39년 7월 조선총독부 기상대 부산측우소로 개칭되었고, 1948년 8월 국립 중앙기상대 부산측우소로 개칭, 1992년 부산지방지방기상청으로 승격하였다. 2002년 1월에는 청사를 동래구 명륜동으로 이전하여 부산·경남지역과 남해안 일부의 기상관측을 담당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1호(2001. 10. 17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구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진에 있었던 사립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는 호주장로교 선교회 여자전도부가 1895년 10월 15일 촤천동 초가에서 3년의 소학교 과정으로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선교사 Menzies(1895∼1902)로 1905년 4월 15일 초가집을 허물고 근대식 건물을 준공하였다.

건물은 2층 벽돌 서민풍의 건축양식으로 1층 40.35평, 2층 38.25평 총 76.8평이다. 정면 4각형에 가까운 평면은 장식이 없으나, 전면에 벽돌의 長柱를 2층 처마까지 계속하여 세우고, 2층에는 목조의 발코니를 내고 거기에 외부에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배치하였다.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형태였다. 1층 벽체는 4군데의 창둘레의 벽돌외에는 전부 石材로 되어 있고, 2층은 벽돌로 쌓았다. 이 건물은 1905년 준공된 부산 상품진열관과 대비할 때 같은 벽돌 건축물이기는 하나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하나는 경제침략을 위한 중대한 사업으로 추진된 우수한 기술자까지 고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선교를 위한 교육시설이란 점에 있어서 두 건물이 나타내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할 것이다.

1909년 8월 9일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고등과(수업연한 3년)를 병설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여성이 높은 교육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1913년 3월 고등과 제1회 졸업생(4명)을 배출하였다.

1915년 8월 7일에는 학칙개정에 의해 수업연한 3개년이었던 소학교를 4개년으로 하고 고등과를 4개년으로 하였다. 이 고등과는 1925년 6월 10일, 동래구 복천동 500번지에 신축교사(현 우성아파트)를 지어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라 불리게 되었으니, 좌천동의 부산진 일신여학교 고등과는 오늘의 동래여자고등하교 전신이 된다. 1987년 1월 19일 현재의 부곡동 교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舊) 부산진 일신여학교 현재 부산 경남교역자연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건물은 부산시 기념물 제55호(2003. 5. 2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구 조흥은행 영주동 지점

구 조흥은행 영주동지점 건물은 부산부 영정(榮町) 3정목(丁目) 71(현 동구 초량동 1210-15번지)에 위하였던 건축물이었다. 1892년(명치 25) 7월 第五十八銀行 부산지점이 개업하여 영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명치 42) 第五十八銀行과 제第百三十銀行의 합병으로 百三十銀行 부산지점으로 개편되었다가, 1923년(대정 12) 1월 安田銀行 부산지점으로 개칭하였다.

본 건물은 1926년 6월 착공, 1927년 8월에 준공하여 安田銀行 부산지점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부산지역의 대다수 공공건물들이 그랬듯이 서구양식의 건축물로 2층 벽돌의 서구식 르네상스 양식이며, 외벽은 잘 다듬은 화강석을 잘 조화시켰고, 실내는 철골 콘크리트로 마무리하고 있다. 건물은 비대칭 구성을 이루고 있으면서 안정감이 잘 배려되어 있을 뿐 아니라 창틀과 창틀사이는 원형으로 화강석을 둘러 웅장감을 느낄 수 있다. 건물이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은 잘 고려된 비례관계의 소치이다.

본 건물은 1928년 대구은행과 경남은행이 합병한 주식회사 경상합동은행 부산지점이 1936년 5월 1일 이곳으로 옮기면서 사용되었다. 1941년 10월 1일 漢城銀行과 경상합동은행의 통합으로 한성은행 북부산지점으로, 1943년 10월 1일 한성은행과 동일은행 합병으로 조흥은행 북부산지점 이후 계속하여 은행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88년 5월 2일 1년여의 공사 끝에 현대식 건물을 신축준공으로 당시까지 보존되어오던 부산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이었으나, 행정기관의 무관심과 기업의 영리목적에 의해 주요 문화유산이 사라져버렸다.


구포다리

구포다리로 더 잘 알려진 이 다리는 1930년 9월 13일 착공하여 1932년 3월 7일 준공되었다. 길이 1060m, 폭 8.4m(중앙차도 5.4m, 좌우보도 각 1.5m)의 게루바식판항교로 교각이 56개이다. 강서구 대저동과 북구 구포동을 잇는 다리로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으므로「낙동장교」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공사 총인원은 7,760명, 공사비 70만원(정부보조 40만원, 지방비 19만원, 지방지원부담 11만원)이 소요되었다.

이 다리 건설이전 구포와 대저 사이는 나룻배로 왕래하였다. 다리가 개통된 이후 구포는 경남지방과 경부선을 통한 내륙지방과 연결하는 교통요지로 새로운 면모로 바뀌었다. 이 다리는 그 동안 부산과 경남을 잇는 대동맥으로 산업·경제·문화·정치의 교량역할을 해왔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물자 수송에 큰 몫을 해낸 귀중한 것으로 낙동강과 더불어 우리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97년 12월 첨단공법을 이용한 구포대교의 준공되었다. 구포다리는 노후화가 지속되어 붕괴의 우려로 차량통제를 하고 있다.


부산근대역사관(구 미문화원)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이라 칭함) 부산지점 건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동척은 1910년(명치 43년)에 마산출장소를 설치하여, 1920년(대정 9)에 마산지점으로 승격되었다. 1921년(대정 10) 부산 榮町(현 영주2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29년(소화 4) 지금의 대청동으로 옮겨왔다. 건축은 철근콘크리트 3층으로 외벽 기초에는 대리석을 벽면에 두르고 바닥에도 대리석을 깔아 웅장함이 느껴진다.

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에는 문양을 넣고, 실내는 전형적인 은행 건물형태로 대형 기둥을 세워 문양을 새겨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창문은 아치 형태로 되어있고, 옥상을 철근콘크리트로 마무리하였다. 동척 부산지점은 일제가 우리나라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책회사로 토지와 금융수탈의 선봉 역할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를 강제로 매수·착취하였다.

이 건물은 부산·경남지역의 토지 및 경제 침탈을 자행하였던 식민지 정책의 대표기관의 건물로 사용되어왔다. 8.15 광복 이후 이 건물은 미군이 진주하여 주둔지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9월 11일 체결된 "한미간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미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1950∼53년까지 한국전쟁기에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 1982년 3월 반미학생운동으로 방화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84년 1월 부산미문화원 2층에 영사관을 개설하여 부산, 대구, 경남·북, 제주도의 영사업무를 담당하여 오다가 1996년 미대사관으로 통합 운영하게 되면서 폐쇄되었다. 미문화원으로 50년 3개월 동안 무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9년 4월 30일 우리정부에 반환하였다. 6월 10일 재정경제부와 협의를 통하여 시유지와 교환으로 부산시에 이관되었다. 부산시에서는 건물의 역사성과 주변환경을 고려하여 부산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현장학습의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여 2002년 7월 3일 개관하였다. 이 건물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9호(2001. 5. 16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부산 상품진열관

商品陳列館은 부산항 개항이후 부산에 모습을 들어냈던 서구식 건축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최초의 신축 건물이었다. 오늘날의 중구 신창동(현 미라지오 상가 자리)에 1903년 6월 착공, 1904년 12월에 준공하여 4개월 뒤인 1905년 4월 17일 개관식을 가졌다 한다.

대지면적 65평에 건물은 연건평 165평, 총공사비 8만여원을 들인 3층벽돌 건물로 내외부는 물론 건축자재까지 붉은 벽돌과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쓴 완벽한 서구식 기법으로 중세 프랑스 스타일이나 외벽의 구성은 오히려 독일풍과 영국풍의 요소를 두루 갖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특징은 중앙 입구의 아치를 전면 폭의 3분의 1가량으로 잡고 그 높이도 2층까지 닿게하고 그 좌우에 원형 탑형의 室을 3층까지 쌓아 올림으로써 좌우대칭이 엄격하고, 장중한 아름다운을 주었다. 층대(層帶)에 의한 각층의 분할을 기의 같은 비례로 하였고, 또한 각 층마다 외관의 구성을 달리하고 있다. 1층은 화강석으로 수개의 폭선을 돌리고, 2층은 단순한 벽면에 미식창(眉式窓, 미닫이 창)을 내고, 3층에는 아아케이드(Arcade)형식의 연속창을 내어 그 중앙부분에 석조난간을 붙였다. 부산 상품진열관에는 분수대와 연못을 중심으로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도 마련되어 있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에 순행 왔던 순종 황제가 1월 9일 부산상품 진열관을 시찰하고 5백만원을 하사하였고, 이듬해 1910년 정부에서도 2천원의 지원금을 주었다. 4월 21일 신장개관 때 2층에는 일본수입 상품과 부산지방 생산 상품을 진열했고, 3층에는 우리나라 곳곳의 상품과 참고자료를 진열해 놓았다. 1층에는 우리나라 농상공부에서 기증한 조선지리 모형을 진열해 두었다 한다. 2층 원탑형방에는 신문열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부산상품 진열관은 부산최초의 서구양식의 건축물로서 그 가치는 대단하였으나 건물이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도시심의 상권발달로 인해 신축건물 건립에 따라 철거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63년까지는 현존하고 있었으나,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부산세관

부산세관의 효시는 1878년 9월 27일 지금의 동구 수정동에 설치되었던 두모진해관이다. 조선정부에서 두모진해관을 설치해 일본상인들에게 관세를 징수하자 일본관리관은 10월 9일 해관 설치가「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 위배된다고 동래부사에게 철폐를 요구하였다. 그날 일본상인 135명이 동래부로 몰려와 항의 시위를 벌였고, 11월 24일에는 대리공사 하나부사는 군함을 이끌고와 사람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계속되는 철폐요구와 시위에 12월 해관 폐쇄와 관세징수를 중지하였다. 1883년「조일관세협정」이 체결되면서 1883년 11월 부산해관이 개설되어 관세사무를 담당하였다. 1905년「신한일협약(을사조약)」을 맺어지면서 외교권이 박탈당하면서 부산해관 사무가 일본에 넘어가고 그 명칭도 부산세관으로 바뀌었다.

본 건물은 1905년 세관확장공사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나, 착공일자는 알 수 없다. 부산세관 청사가 우람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0년 11월이다. 건너편에 있었던 부산역 건물과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건물로 쌍벽을 이루었던 건물이었다. 총면적 308.4평에 건물은 146.9평으로 2층 벽돌건물로서 길모퉁이를 따라 그 평면이 ㄱ자의 건물로 우측 모퉁이에는 8각의 4층탑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의 양식은 영국풍의 르네상스 양식이며, 벽돌과 다듬은 화강암을 잘 조화시킨 외관을 갖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비대칭 구성을 이루고 있으면서 안정감이 잘 배려되어 있었다.

건물의 중앙 현관문 좌우측에 있는 창출부는 우측에 비하여 좌측이 작은데, 그 상부에 좌보다는 2배 높이의 탑을 얹음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모퉁이의 탑신은 별다른 장식도 없이 쌓여있는 한편 아치 창문을 내달아 아담한 모습이 돋보이게 해놓았다. 이 건물은 1973년 6월 7일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가, 1979년 6월 22일 부산대교의 건설과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철거되면서 사라져버렸다. 건물 지붕위의 철탑은 부산경남 본부세관에 보관되어 있다.


부산우편국

1876년 11월 1일 부산에 제국우편국을 창설하여 초기에는 관리청내에 두었다. 1884년 업무를 개시한 전신국과 우편사무를 통합하여 부산우편전신국이라 하였다. 1905년 5월 한일통신기관합동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소속의 통신기관 부산우편사 및 부산전보사의 사무를 계승하여 부산우편국이라 개칭하였다.

우편국 청사는 벽돌 2층 건물로 신축하여 1910년 5월 25일 준공된 건물로 연면적이 848평(1층 485평, 2층 351평, 3층 12평)이다. 건물의 표면에는 화강석 대석위에 벽돌을 쌓고 표면을 몰탈로 바른 러스티카 형식으로 하였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르네상스식 요소는 모두 갖추었고, 주현관문 角部의 상부에 8각형 드럼(Durm) 위에 도움(Dome)을 올려 위풍을 도우고 있다. 그리고 여타 작은 출입구 측부에는 단개주를 붙였다. 2층 창은 홍예창으로 하고 지붕은 만사드로우프로 되어 있다.

건물의 전체적인 특징으로 볼 때 기발한 점은 없으나, 큰 규모에 안정되고 장중한 감을 주는 건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 건물은 당시 부산역사, 부산세관청사와 더불어 부산 3대 건축이라 불리었다. 이후 1959년 준공한 부산우체국청사를 신축하여 사용하다가, 1985년 12월 착공 1989년 3월 현청사를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지곡수원지

어린이대공원이 자리잡고 있는 동천의 상류계곡으로 상류에는 성지곡수원지가 있다. 부산의 이름난 경승지로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유명한 풍수지리 지관인 성지라는 사람이 전국의 명산을 찾던 중 경상도에서 가장 빼어난 골짜기를 이곳에서 찾고는 성지곡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한다.

우리 나라에 있어 상수도의 도입은 부산에서 비롯되었다. 개항 이후 일본전관거류지내에서는 왜관 내에 과거부터 내려오던 2갱의 정호수(井戶水)를 사용해 오다가 1880년 처음으로 보수천 상류로부터 대흠통에 의한 도수설비를 하여 물을 받아쓰기 시작했고, 1886년에는 이를 나무통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설만으로는 거류민의 급증과 다수의 일본 어선들에 대한 급수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고, 청일전쟁의 반발로 다수의 일본군인들까지 상주하게 되자 1894년 6월부터 보수천에 집수언제(集水堰堤)를 축조하여 자연여과장치로 하는 한편 일본거류지 내의 대청동배수지를 만들어 내경(內徑) 약 15㎝의 토관(土管)으로 이를 송수(送水)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1895년 1월에 준공하였다. 이것이 부산상수도의 효시이다.

성지곡 상류에 있는 수원지는 1907년 일본인들에 의해 착공되어 1909년 9월에 완공(면적은 7,920㎡)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상수도 수원지로서 제방의 높이가 27m에 이르는 철근콘크리트로 축조되었다. 당시로서는 거대한 토목공사였고, 서면에서 지금의 동광동까지 급수한 수원지이다. 그러나 1972년 물금에 낙동강 상수도 취수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이 수원지는 유원지와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영도대교

부산시민들에게 영도다리로 더 잘 알려진 영도대교(개통 당시에는 부산대교)는 부산 본토와 유인도인 영도 사이를 잇는 연육교로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되었다. 정식 명칭이 당시 부산대교이던 이 다리의 길이는 214.63m, 폭은 18m, 교량의 면적은 3,948㎡, 도개면적은 1,044㎡터이며, 또한 도개속도는 저속일 때 4분, 고속일 때 1분 30초, 도개동력으로는 22마력이다.

그중 부산 내륙측은 31.30㎝를 도개교로 하여 1,000톤급 기선의 운항을 가능하도록 건설되었으며, 그 밖의 부분은 캔틸레버식 강판항교로 하였다. 그리고 다리 아래로 만조시에도 50톤급 이하의 기선이 교량 밑을 자유로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의 화폐로 총공사비 700만 8천원이 투입되었다.

이 대교 가설공사는 당시 매우 어려운 토목공사로서 현재 영선초등학교와 해동고등학교 자리의 산을 깎아 영도대교 호안 매립공사를 하면서 산이 무너져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노무자들이 비명에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다리 자체공사 때에도 희생자가 속출하여 밤이 되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 1934년 11월에 개통된 이 다리는 하루에 여섯 번씩 도개 부분이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다리로서 개통식날 신기한 이 도개식 다리를 보기 위하여 부산을 비록 인근 김해·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의 학정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말없이 지켜 본 영도대교는 전설 같은 옛 이야기만 남기고 지난 1966년 9월 1일 도개식의 기능이 멈추었다. 영도다리는 우리 나라의 근현대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현장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임시수도기념관(구 경남도지사 관사)

임시수도기념관은 서구 부민동 2가 2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부 부민동으로 옮겨 온 것은 1925년 4월 17일이었다. 그에 따라 부민동 3가 221번지에 경상남도지사 관사가 1926년 8월에 준공되었다. 건물은 목조 2층 일식기와집 양식이다. 그 이후 줄곧 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도가 서울에서 대전·대구를 거쳐 8월 18일에 부산으로 옮겨져 경상남도 도청은 중앙정부 청사의 중심부가 되고, 도지사 관사는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도지사 관사가 대통령이 집무하는 관저가 된 것은 1950년 8월 18일 이후였다. 그러나 그해 9월 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정부는 서울로 환도(10월 27일)하였다. 하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로 다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 성립과 함께 환도(8월 15일)할 때까지 부산은 중앙정부의 임시수도 역할을 하였다.

1963년 부산시가 정부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상남도의 관할에서 벗어나고, 경상남도 도청은 1983년 7월 1일 창원에 새청사를 신축하여 옮겨갔다. 1984년 11월 1일부터는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지방법원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도지사 관사는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유물전시를 위하여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기념관에는 임시수도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품이 여섯개 방에 전시되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한국전쟁 44주년을 맞아 1997년 6월 24일에는 한국전쟁의 내용과 임시수도로서의 부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기념관으로서 민족상잔의 역사를 이해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새천년을 맞아 시에서는 건물의 개·보수와 한국전쟁 당시의 생화유물 등을 수집, 구입을 토해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관 하였다. 시에서는 건물의 전면 개보수를 통하여 전시공간의 재단장을 위한 시설공사를 진행하여 2001년 상반기 개관예정이다. 부산광역시에서는 기념물 제53호(2002. 5. 6 지정)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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