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 내공 100 드려요 급해서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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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7.1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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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국사문제 드립니다 ..자세히좀 ..

 

1.성종의 업적에 대하여 4가지

 

2.고려 중앙정치제도에서 대간의 구성,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자세히 !!

 

3.고려 군사제도의 특징을 중앙군과 지방군 으로 나누어 쓰시오

중앙군-

지방군-

4.고려 관리 등용제도에 대하여 쓰시오

과거제-

음서제-

5.고려전기 사회는 문벌 귀족사회이다. 문벌귀족의 형성과 혜택 폐단을 간략히 쓰시오

문벌귀족의 형성 -

                  혜택-

                 사회의 폐단 -

6.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으로 규정하여 각 파의 특징을 쓰시오

7무신정변의 발생 원인

8.최씨 무인정권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기반에 대해 쓰시오

9.고려 민중들의 대몽 항쟁에 대하여  쓰시오

10.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반원 자주화 정책과 왕권 강화 정책으로 나누어 설명 각각 4개씩 ...

11.여말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대부에 대하여 간략히 쓰시오.

12.조선 중기에 등장한 사림의 특징과 성장을 훈구파와 비교하여 쓰시오

13.16세기 사림의 정권 장악후에 전개된 붕당에 대해 쓰시오

14.임진왜란의 승전요인과  이후의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쓰시오 따로따로

15.광해군의 중립외교와 병자호란에 대하여 시기를 구분하여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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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종의 업적에 대하여 4가지

1. 문물제도의 정비

2. 숭유억불정책(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 )

3.경국대전완성

4.홍문관설치(세조 때 페지된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

 

2.고려 중앙정치제도에서 대간의 구성,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자세히 !!
중서 문하성의 낭사(특히 간관, 낭사 중에서도 간쟁을 주업무로 하는 관리를 간관이라 부름)와 어사대 의 대관(삼찰 업무에 종사하는 관리)을 구성원으로 하여 국황에 대한 보좌와 견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언 듯 보면 모순을 지닌 제도였습니다. 이들 간관과 대간은 형식면에서는 업무를 달리했지만 흔히 언관이라고 통칭되어 대성을 이루고, 실제 역할에서 구분이 모호했습니다.
대성의 수행한 역할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간쟁, 곧 국왕의 과실을 비판해 시정하게 하는 것
②봉박, 곧 국왕의 부당한 조칙을 거부하는 것
③서경, 곧 관리 임명 등에 대해 인준권(동의권)을 행사하는 것
④감찰, 곧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것

형식면에서는 ①②③항은 낭사(간관)의 업무이고, 어사대는 ④항을 주로 하면서 ③항의 관리에 대한 기초 조사 업무도 담당했 을 것입니다만, 실제로는 이러한 업무들이 대성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왕권과 귀족권 사이의 상관 관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귀족에 유리한 낭사의 기능과 국왕에 유리한 어사대의 기능이 혼합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대성이 왕권과 귀족권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3.고려 군사제도의 특징을 중앙군과 지방군 으로 나누어 쓰시오.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로 구성되었습니다. 2군(응양군,용호군)은 국왕의 친위군이고, 6위(천우위·금오위·감문위·좌우위·신호위·흥위위)는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들은 상장군·대장군으로 일컬어졌고, 그 휘하에 장군들이 있었습니다. 문신 귀족들이 국가의 중요 정책을 도병마사에서 의논했듯이 상장군·대장군 등은 무관들의 회의 기관인 중방에서 군사 문제를 의논했는데, 중방은 나중에 무신 정변이 일어나 무신들이 집권한 뒤에는 권력의 중추 기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2군 6위의 병력은 모두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常領)·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으로 구분되어 도합 45령으로 4만 5000명이었습니다. 영의 지위관은 장군 1명, 중장군 2명, 그 아래 낭장(郎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등 군관이 배치되었으며, 이들도 합좌기관인 장군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군 6위의 중앙군은 신분과 군역 의무를 세습하는 군반씨족 출신의 전문적 군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군인전이 지급되었으며, 중앙군과 지방군과는 교류가 없었습니다.

지방군으로는 5도에는 주현군, 양계에는 주진군이 있었습니다. 5도의 중간 행정 단위가 주·군·현이므로 지방군의 명칭도 주현군이라 하고, 양계에서는 군·현보다 진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주진군이라 한것이지요. 당연히 군사 행정 구역인 양계의 주진군이 정예 부대이며 국가의 상비군이었습니다. 주진군은 도령의 지휘 아래 초군·죄군·우군으로 구성되었으며, 특별히 정용이라는 기병도 포함되어 국방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주현군은 군인전이 지급되지 않는 병농일치의 군인이였습니다. 즉 농민이 순서에 따라 군역의 의무를 지는 것이므로 군인전의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교대로 중앙군에 배속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광군·별무반과 치우집권 때는 삼별초가 있었습니다.

 

4.고려 관리 등용제도에 대하여 쓰시오

[고려의 과거제도]

국가에서 관리를 선발하려고 실시한 시험입니다. 과거란 과목에 따라 관리를 뽑는다는 뜻으로 과거에는 3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3가지는 무과, 문과, 잡과와 같은 시험의 종류입니다.

과거시험의 조건

1.응시자격

양인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 가능. 단, 부모가 돌아가셔서 상중에 있는 사람은 탈상 때까지

응시를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직급이 6품 이상 관리는 응시를 하지 못하고  6품 이하 관리는 3회까지 응시가 가능합니다.

2.시험과목

진사과: 시, 부, 송, 책

명경과: [상서], [주역], [모시], [춘추], [예기]

복업과: [맥경], [침경], [본초경] 등 6과목

의업과: [소문경], [갑을경], [명당경], [난경] 등 7과목

3.시험조건

1. 수험생은 자신의 이름과 나이, 4대조까지의 이름을 기록하고 가계를 시험관리소에 제출

2. 수험생은 시험일 이전에 시험지 윗면에 이름, 본관, 나이, 4대조 이름을 쓴 다음에 그 부분에 풀을 붙여 시험관리소에 제출해야 합니다.

3. 시험 도중 시험에서 관리가 일일이 신원을 확인해서 시험지에 시험을 관리하는 사람의 금인을 찍음

4.시험문제 출제

시험 전날 문제를 출제하는 사람이 문제를 만들어 왕에게 허락을 받은 뒤 시험 장소에서 개봉합니다.

5.합격자 발표   

1. 시험 종료 후 지공거가 채점을 하여 2일 뒤에 시험을 관리하는 사람이 합격자를 발표함

2. 합격자는 국왕 면접 후 합격증서인 홍패를 받습니다.

[음서제]

공신과 종실의 자손은 물론이고 5품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료로 진출하는 혜택을 말합니다 그 대상에 있어서도 아들,자손만이 아니라 동생,사위,조카까지 혜택이 돌아가 5품 이상의 귀족들은 관료로서의 지위을 세습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시킬수 있었습니다

 

5.고려전기 사회는 문벌 귀족사회이다. 문벌귀족의 형성과 혜택 폐단을 간략히 쓰시오

1. 문벌 귀족의 형성

 ㉠ 시기 : 성종 이후 새로운 지배층 형성

 ㉡ 출신 :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 6두품 계통의 유학자 →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의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한 가문

 

2. 문벌 귀족의 성장

 ㉠ 과거와 음서로 관직 독점

 ㉡ 과전과 공음전(세습 가능한 토지), 토지 겸병으로 경제력 독점

 ㉢ 문벌 귀족 상호간, 왕실과의 혼인으로 권력 장악

③ 사회적 모순과 갈등 발생 :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료 일부가 왕의 측근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 →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3. 문벌 귀족의 혜택

고려의 문벌 귀족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음서 제도의 특전과 함께 과전, 공음전 등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력을 확보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었다. 문벌 귀족의 자제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음서(蔭敍)에 의해 관직에 나아가고, 가문을 배경으로 요직에 승진하여 정치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문벌 귀족의 폐단

문벌 귀족 사회의 전성기였던 문종대를 지나 인종대에 이르는 시기에 귀족 사회 내부에서는 점차 모순들이 축적되었다. 문벌 귀족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직에 따라 과전을 지급받고, 또 공음전 및 사전(賜田)의 혜택을 받은데다가, 권력을 이용해서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겸병하였다. 이러한 정치 권력의 독점과 경제적 특권의 확대를 둘러싸고 문벌 귀족 사회의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엇다.

  귀족 사회의 모순으로 나타난 내부 분열은 전통적인 문벌 귀족과 지방 출신의 신진 관료 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었다.
 

이자겸의 난  - 문벌 귀족 사회가 전개되면서 문벌 귀족들은 자기들끼리만 혼인 관계를 맺어 나갔다. 특히, 최고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자신의 문벌을 높이고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 대표적 문벌은 경원 이씨로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80년간 정권을 잡았다.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 때에 거듭 외척이 되어 그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자겸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자, 인종은 이를 염려하여 사전에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이자겸은 척준경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여 불을 지른 다음, 인종을 가두고 독살하려고까지 하였다(1126). 그 후,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지자 왕은 척준경을 달래어 이자겸을 제거하였고, 얼마 후 척준경도 정지상의 탄핵으로 축출되었다. 이자겸의 난은 고려 전기의 문벌 귀족 사회가 붕괴되는 발달이 되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으로 왕의 권위가 실추된데다가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불안해지자, 지덕이 쇠한 개경 대신에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서경 천도의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묘청 등은 서경 천도를 적극 추진하여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게 하고,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풍수 지리설을 이용하여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 서경에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해 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실권자였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는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서경 천도와 금국 정벌을 반대하였다.  이와 같이 대립이 계속되어 서경 천도가 불가능하게 되자,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는 서경에서 대위국이란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천개라 하며 난을 일으켰다(1135). 그러나 이 난은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진압되었다. 이로써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묘청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 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과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이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귀족 사회의 폐단과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후, 정권을 장악한 김부식 등 보수적 문벌 귀족들은 자신의 세력을 더욱 강화하여 문신 위주의 문벌 귀족 체제를 굳혀 나감으로써 마침내 무신 정변이 일어나는 배경을 만들게 되었다


 

6.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으로 규정하여 각 파의 특징을 쓰시오

 

구분

개경파(보수)

서경파(개혁)

중심 세력

김부식 중심, 보수적 관리

묘청·정지상 중심, 개혁적 관리

사상

유교

풍수지리설, 자주적 전통 사상

대외 정책

금에 대한 사대주의

금국 정벌, 칭제 건원

역사 의식

신라 계승의식

고구려 계승의식

 

7.무신정변의 발생 원인

첫째, 의종의 실정(失政), 둘째, 고려 귀족 정권의 문무관 차별에 대한 무신들의 불만, 셋째, 일반 군인들의 불만을 들 수 있다.
첫째 원인인 의종의 실정을 살펴보면 이는 의종이 군주로서의 정치 역량 부족보다는 귀족들이 주도하던 정치 상황이 문제였다. 당시 집권층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앞세웠기 때문에 정치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왕권과 귀족 세력간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은 왕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으며 귀족들 상호간의 대립 갈등은 정치적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정치적 불안을 가중시켜 무신 정변 발생의 소지를 제공했던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이 된 문무관의 차별 대우를 살펴 보면 제도적으로 무반은 정 3품인 상장군이 최고의 관직이며 그 이상의 승진이 어려웠고 군대의 최고 지휘 통솔권은 문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 급제한 문신이었고 여진 정벌의 윤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토벌한 김부식 역시 같은 예였다.
마지막으로는 군인들의 불평을 들 수 있다. 군인들은 전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평시에도 노동력봉사에 동원되어 시달렸으며,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여 그들의 불평,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이들은 상급 지휘관으로부터 "문관(文冠)을 쓴자는 비록 서리(胥吏)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는 행동 지침이 하달되었을 때 이에 호응하여 벌떼처럼 일어났다. 무신 정변은 일반 군인들이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있을 때 발발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성공할 수 있었다.

 

8.최씨 무인정권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기반에 대해 쓰시오

정치적- 교정도감, 정방

 교정도감:   최충헌이 설치한 무신 정권의 최고 정치 기구로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한다. 1209년 4월 청교(靑郊)의 역리 3명이 최충헌을 제거하려고 거짓 공첩(公牒)을 만들어 여러 절로 돌려 승려들을 소집하였는데, 귀법사(歸法寺)의 승려가 이를 최충헌에게 고발하였다. 최충헌은 흥국사의 남쪽 영은관(迎恩館)에 임시로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관련자를 색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계속 두어져서 최씨 정권의 반대 세력 을 제거하는 데 이용되었고, 서정(庶政) 감시, 세정(稅定), 비위 규찰(糾察)과 제반 명령 하달 등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 기구로 기능하였다. 교정도감의 최고 책임자인 교정별감은 무신 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겸임하면서 국정을 독단하였다. 교정도감은 최씨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존속되다가 1270년(원종 11) 임유무가 피살되면서 무신 정권이 끝나자 폐지되었다

정방: 정방(政房) 은 1225년(고종 12) 최고 집권자인 최우(崔瑀)가 자기 집에 설치하고 문무 백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정치 기구이다. 원래 문반의 인사 행정은 이부에서, 무반의 인사 행정은 병부에서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최충헌 때부터 교정도감에서 인사행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최우는 이것을 더욱 강화하여 정방을 설치하였다. 정방에는 최우의 막료로서 왕에게 상주하는 직책을 가진 정색승선을 두었고, 이를 맡은 자가 3품이면 정색상서, 4품 이하면 정색소경이라 하였다. 또 문사 가운데서 뽑은 자로 정색승선 아래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정색서제, 또는 필도치(必者赤)라는 직책이 있었다. 정방에서는 직접 인사 행정을 관장하여 국왕의 결재를 받았다. 이제 국왕은 인사 행정에서 정방의 결정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하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최우는 인사 행정을 정방에서 전담케 함으로써 관인 및 그 후보군들에 대한 사적 충성을 유도해 나갔다. 최우대에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 금의(琴儀), 김창(金敞), 박훤(朴暄) 등이 유명하였다.
  한편, 최씨 정권은 정방을 통해 문무 양반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문신들이 대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므로, 정방은 무신 정권 몰락 뒤에도 국가 기관으로 탈바꿈하여 존속하였다. 최씨 집권기에는 유능한 신진 관인들이 이곳을 통해 진출할 수 있었으나, 국가 기관으로 변한 뒤에는 권문 세가들이 이곳을 지배함으로써 신진 관료의 진출을 막아버리는 관부로 변질되었다.

 

군사적 - 삼별초, 도방

 삼별초: 1219년(고종 6)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가 방도()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 병사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을 조직,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전위()로서 다분히 사병적()인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항몽전()에서는 그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골병을 괴롭혔으며,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골과 강화()가 성립되고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개경정부 및 몽골과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도방(都房):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경대승이 최초 조직한 개인 경호 부대였으며, 경대승의 사후 해체되었다가 최충헌이 집권하자 다시 부활시켰다.

정중부에서 이의민에 이르기까지 역대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별다른 사병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일으킨 각종 쿠테타에 동원된 병력은 일반 관군이었다. 물론 각기 문객(文客)·악소(惡少)·사사(死士)·용사·장사등으로 불리던 사료에 나타나는 사병조직이 있으나, 이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조직이었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이때에는 사병조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 중에서 다만 예외적인 인물이 경대승이었으니, 그는 모든 무신들을 적대세력으로 집권한 만큼 신변보호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었다.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도방은 이 경대승이 조직하였다. 경대승의 도방은 신변호위만이 아니라, 정보 수집, 반대파 숙청, 심지어 권세를 배경으로 살인 등 갖가지 폐단을 끼쳤다가 경대승이 병사한 이후 해체된다.

신종 3년에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고 나서, 본격적인 사병 조직이 건설된다. 신변보호와 정권안정을 위해 다시 경대승의 도방을 설치한 것이다. 새로운 도방은 이전 경대승의 도방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대규모였으며,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내도방(內都房)'과 '외도방(外都房)'으로 도방 을 나누어 내도방은 직접적인 신변보호를 담당케 하고, 외도방은 친척과 기타 외부의 경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도방은 무인정권의 호위 및 집권체제 강화와 안전을 위해 존속했다. 그러나 한편 도방이 직접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원된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두고 도방은 관군이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던 무신정권의 양해하에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할때, 종래의 해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도방은 무신정권의 출발에서 형성되어 무신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해체되는 것에서 보이듯이 이 기구는 무신정권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백성을 약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끼쳤다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제적 - 농장경영, 고리대, 상업

 무인집정자들은 토지탈점을 자행하고 그를 토대로 농장을 경영하여 경제기반을 형성하였다. 특히 최충헌정권은 신종 원년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설치하여 사원을 정리하면서 사원과 연결된 전집권무인의 토지와 노비를 확보하여 집권초기의 경제기반을 구축하였다. 그후 최씨정권은 토지탈점의 확대와 함께 공적으로 식읍·내장전 등을 받아서 토지지배를 확대하였다. 또 무인집정자들은 고리대와 상업을 통하여도 부를 확대하였다. 정중부의 대표적인 족당 송유인은 상업과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의민 역시 상업과 무역을 통하여 경제기반을 확대하였을 것이다. 그의 상업에 대한 관심은 그의 아버지 이선(李善)이 소금과 체(篩)를 파는 것을 업으로 하였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으며, 상업을 통한 부의 축적은 최씨집권기에도 이어졌을 것이다.

 

9.고려 민중들의 대몽 항쟁에 대하여  쓰시오

몽고의 침입을 당하여 정부가 적극적인 방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자신들의 안전만을 도모한 반면, 농민과 천민들이 항몽의 주체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여러 사례들이 있다.

  먼저, 몽고의 1차 침입 때 이른 바 초적(草賊)의 참전을 들 수 있다. 당시 마산(평북 귀주 부근)의 초적이 관군에 가세하여 동선역(황해도 해주 부근)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활약한 바 있다.

  한편, 민병이 항몽전에 참가한 예는 적지 않게 사료에 보인다. 몽고의 1,2차 침입 때 광주(경기도)의 민병은 광주성을 굳게 지켜 몽고 적을 물리쳤다. 이 때 몽고군은 광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처인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곳에 모여 사는 부곡민들의 용전과 승병 김윤후의 활약으로 그들의 장수 살리타를 잃은 채 후퇴하였다.

  역시 1차 침입 때 몽고군은 충주성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몽고군의 침입이 있자, 충주성의 지휘관과 양반 별초가 도망한 가운데 노군(奴軍)과 잡류 별초만이 남아 지광수의 지도하에 끝까지 성을 지켰다. 충주는 교통의 요지로서 남진하는 몽고군과 몇 차례 더 전투를 치렀고, 특히 몽고군의 5차 침입 당시 이들이 이룬 승리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때에 적을 맞아 싸운 장수는 김윤후였다. 그는 몽고군의 포위로 성내의 식량 사정이 위급하게 되자, 관노의 전적을 가져다가 태워 버리고, 노획한 우마를 나누어 주며 사졸을 독려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처하므로, 몽고군은 기가 꺾여 물러났다. 김윤후는 이 싸움의 공으로 상장군으로 승진하였고, 나머지 군공이 있는 관노와 백정들에게도 관작이 주어졌다. 충주의 피지배 백성들에게 잠재해 있는 항전의 의지를 신분 해방 내지 격상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여 분출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 싸움은 항몽전에서 일반 백성들의 역량이 과시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출처] 고려 후기 민중의 대몽 항쟁

10.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반원 자주화 정책과 왕권 강화 정책으로 나누어 설명 각각 4개씩 ...

반원 자주화 정책

1. 친원파의 숙청: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으로부터 시작됨

2. 정동행성 폐지: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개경에 설치한 내정간섭기구

3.관제 복구: 몽고식 관제를 폐지하고 원 간섭 이전으로 복구 시킴

4.쌍성총관부 회복: 유인우로 하여금 무력으로 쌍녕총관부를 공격하게 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함.

5.요동 수복 정책: 고구려 옛땅을 되찾기 위해서 지용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진격하게 함.

그리해서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점령하고, 이 땅이 원래 우리 땅이라고 선포했으나 뒤에 명의 군대가 점령함(공민왕이 집권할 당시 중국은 원,명 교체기였습니다. 이때 요동을 수복하려 합니다)

 

왕권 강화 정책

1.정방 폐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함

2. 교육, 과거 제도 정비: 성균관을 통하여 유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함

3.전민변정도감 설치: 세력이 없는 집안 출신의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 시킴.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 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함

 

11.여말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대부에 대하여 간략히 쓰시오.

신진사대부는 저 무신정권때 처음 등장 . 그리고 충선왕때 본격적으로 등장

공민왕때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공민왕은 저 성균관을 만들었고 성균관서 성리학을 마구 가르쳐서 신진 사대부들이 다수 육성되기 시작하였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는 온건개혁파와 급진개혁파로 나뉘어 지게 된다. 온건개혁파는 고려조정의 부패를 인정하고 고려를 섬기면서 차차 개혁을 해서 고려의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서 태평성대를 이루자는 입장으로 정몽주가 중심이었으나, 그에 반해 급진개혁파는 지금의 고려조정은 낡고 부패해서 이대로는 백성들의 도탄과 굶주림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고려조정을 갈아 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급진개혁파는 자신들의 세력을 늘리고 입지를 굳히기 위해 당시 권력과 군부의 핵심이었던 이성계를 주축으로 정도전이 중심이 되었다.
이성계는 자신을 밀어주는 급진개혁파를 위해 과전법을 도용해서 급진파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자신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고, 온건개혁파의 핵심인 정몽주를 살해하고 이성계는 급진개혁파를 선동하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다.

12.조선 중기에 등장한 사림의 특징과 성장을 훈구파와 비교하여 쓰시오

주요개념

훈구파(관학파)

(공신집단)

사림파(사학파)

(재지사족)

경향

사장 중심

(제술 : 시와 문장능력)

경학 중시

(강경 : 유학의 깊이)

사상

성리학 이외도 포용

(도교 · 불교 포용)

성리학 이외는 배격

(성리학 중심주의)

성향

부국 강병책 · 실리 추구

명분과 도덕과 의리 숭상

정치체제

중앙집권 추구

향촌자치 추구

민족

자주적 사관

존화주의적(사대주의)

역사관

단군 중시

기자 중시

정치 사상

패도 정치 인정 (법치주의)

왕도 정치 추구 (왕도주의)

활동 시기

혁명파 사대부의 후예

15세기 민족 문화 주역

온건파 사대부의 후예

16세기 이후 사상계 지배

인재 양성

관학 통해 양성

(성균관, 집현전)

사학 통해 양성

(서원)

기타

군사 · 기술학 중시

과학 기술 발달

한문학 발달

 

 

 

군사 · 기술학 경시

과학 기술 쇠퇴

한문학 쇠퇴

 

 

13.16세기 사림의 정권 장악후에 전개된 붕당에 대해 쓰시오

사림파의 근원은 고려말 고려를 존속시키며 개혁을 지향했던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에 근원합니다. 이들의 정치이념은 왕도정치로 주희의 성리학에 기초한 이상적 정치이념을 현실화 하려는데 집중합니다. 이들은 향촌의 향리로 존재하다가 성종의 유교적 정치이념의 강화 일환으로 중앙 정치에 진출하여 훈구파의 폐단에 맞서 정치투쟁을 벌입니다. 이들은 4대 사화에도 소멸되지 않고 서원등에 기반을 두어 계속적인 투쟁을 벌인 결과 결국 선조의 등극과 함께 집권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사림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리인 이조전랑의 임명을 놓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으로 분열되지만 학문적 근원에 따른 분열도 무시 못하죠. 서인은 비록 중립을 표방하고 양당간 화목을 도모한 율곡 이이의 학통에 기원하며 동인은 퇴계 이황의 학통에 기원을 많이 하죠.
이후 서인 정철의 치죄(죄과를 논하는 것) 놓고 동인이 분열되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열됩니다. 강경파 북인은 정철의 사형을 주장하는 파로 학문적 근원은 서경덕의 통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온건파 남인은 유배형을 주장하는 파로 학문적 근원은 우계 성혼등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후 광해군때는 이이첨등이 주동이된 북인이 정권을 잡고 지내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에게 권당을 내주고 서인의 극심한 탄압으로 북인은 소멸되고 맙니다.이후 정계는 집권당 서인과 야당인 남인으로 지내게 됩니다. 이후 대동법 시행 문제로
서인 내부에서 산당과 한당으로 의견대립이 일어납니다. 산당은 송시열,송준길등이 주동이
된 분파로 대동법 시행에 반대하며 인조의 며느리인 강빈의 신원에 적극적이며 양반층 권익에 몰두하는 성향이며 한당은 김육등이 주동이 되어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이며 일반 백성들의 권익에 몰두하는 쪽입니다. 다만 이들은 이념적 분리현상까지는 않고 제한적인 정책 차이로 분당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이들은 서인이라는 큰 테두리속에서 공존하죠.
아무튼 이런 상황이 1,2차 예송논쟁속에서 변질되어 남인,서인은 상대당을 살육하는 단계로 진행되며 결국 숙종때 원자 고묘(임금의 친아들을 세자로 지명한다는 것을 종묘에 고하는 것)문제로 서인이 실각되어 남인이 집권하게 됩니다. 이때도 남인은 서인 처리 문제로 강경파인 청남과 온건파인 탁남으로 의견대립이 일어나지만 이들 역시 남인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공존합니다. 이후 숙종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며 이후 서인 일당체제로 진행되며 남인은 다시는 집권층이 되지 못하고 정계에서 배제됩니다.
이후 서인은 숙종대에 이르러 남인의 처리문제로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를 지지한 송시열 중심의 노론으로 그리고 온건한 처리를 주장한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분열됩니다. 당시에는 노론이 집권층이 되고요…
이후 노론과 소론은 정치투쟁을 벌이다가 영조의 등극으로 이르러 소론은 소수파로 전락하게 되며 이후 노론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지한 벽파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반대한 시파로 나뉘어 지죠. 정조대에는 벽파와 시파뿐 아니라 소론과 남인(채제공)을 적절히 기용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보여주어 안정이 되지만 정조 사후 정조의 안동김씨 일문의 세도정치로 흐릅니다.
세도정치라 하더라도 그 가문은 노론으로 한정되어 진행되며 이는 흥선 대원군의 등장이전까지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등 세도정치가 계속 진행되어갑니다.

 

 

15C(초기) ~16(전반)   혁명파(관학파→①훈구파) - 조선전기 훈구파의 집권

                                            

                  온건파(사학파→②사림파)- 15세기 중엽 성종 대부터 관직에 진출

                                        ↙    ↘

16C(후반)       선조의 사림 대거 등용 (선조의 사림 등용은 15세기의 사건이 아닙니다)

                       심의겸, 김효원의 대립(동, 서의 붕당)

                      ③동인(선조)    서인(선조)

                               ↓  정여립의 모반사건

                      서인(선조) 집권

                                                     

                      ⑤동인(선조)

                               ↙     ↘ 세자 책봉 문제

17C(후기)   남인(온화파)   ⑥북인(강경파)  

                  (선조~광해군)    (광해군)

                                            ↙     ↘ 

                대북 -광해군 지지(집권)      소북- 영창대군 지지

                                              ↓ 인조반정

                                       ⑦서인>남인(인조~현종)

                                              ↓ 2차 예송문제

※동인⇒북인, 남인           ⑧남인>서인(현종~숙종)

                                             ↓ 경신환국(서인>남인),

                임술삼고변(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 계기입니다)   

                               ↙     ↘

                 ⑪노론(송시열)   ⑩소론(윤증) 

                                   ↓

                               기사환국(남인>서인),

                                   ↓

                               갑술환국(서인>남인)                 

                                 ⑨서인(1당 전제화)(숙종)

                                          ↙     ↘ 신임옥사

18C(후기)            ⑪노론             ⑩소론

 (영조의 탕평책)       (숙종~영조)      (경종 때 소론집권)

                               ↙     ↘ 사도세자 사건     

                          강경파   온화파     

                                ↓        ↓

 (정조의 탕평책)    벽파    ⑫시파(온화파+소론+남인)   

                                          ↓

19C(후기)                       세도정치


 

 

14.임진왜란의 승전요인과  이후의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쓰시오 따로따로

임진왜란 승전요인

1. 왜군의 구조적 약점과 한계 , 도요토미히데요시 사망
중앙 집권적인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국가의 군대가 아닌 각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의 개인적인 사병집단들이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임란 무렵 왜군들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각 다이묘들간의 이해관계  정치적 대립과 반목등으로 인해 상호 협조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토요토미에게 박해 받은바 있는 지방 출신 왜군들은 이로 인한 반감 때문에 스스로 조선에 투항해서 항왜로서 조선군에 협조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왜군에대한 중요한 군사정보와 화승총 제작 기술을 전수하는 등 상당히 중요한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조선에서도 점령지에서 왜군에 협조하는 반역자들이 나왔지만 이들 항왜는 체적으로 군사적인 패배로 인해 목숨을 구걸한것과는 달리 스스로 항복해 조선군에 협조했다는 겁니다.

2. 조선의 국가 시스템 -대부나 양반을 비롯하여 민중의 힘으로 단결된 의병활동
군의 최대 오판이 바로 수도만 점령하면 전쟁은 거의 끝날 것이라는 판단이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그 이전 왕조들 부터 대륙의 숱한 강적들의 침략을 받아 이에 저항하는
국가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었고 이는 일본군 지도부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들은 조선 이전의 역대 왕조들이 대륙의 강적들의 공격으로 수도가 함락당하고도
국가 기능이 마비되지 않고 유지되어 끈길기게 저항해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3. 명군의 참전
요즘엔 명군의 처절한 전적을 들먹이며 명의 참전 의의를 평가 절하합니다만
분명 명군의 참전은 전쟁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중요한 개기였습니다.
명의 참전이 예상되자 왜군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부대를 흩어놓지
않고 주요 전략 요충지에 집결 시켰습니다.
이는 각 지방의 미점령지에서 저항하던 조선군에게 한숨돌릴 기회를 줌은 물론이고
전략적 요충지에서 벗어나있어 상대적으로 방어가 허술해진 왜군 점령지에 대한
반격도 용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후 아시아 정세의 변화

일본 -정권 교체

왜란 당시 일본 제1의 실권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였다. 그러나 그가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취함으로 신임을 잃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이어 실권자가 된사람은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였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고작 5살 자리 아들이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도요토미에게 신임을 잃은 여러 무신들이 반도요토미를 외치고 일어났다.

이시다 미쓰나리(친도요토미)등 문신파와 가토 기요마사(반도요토미)등 무신파가 대립하여 세력 다툼을 버렸다.

반도요토미파가 무력으로 친도요토미파를 몰아내자 친도요토미는 제2의 실권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쫓겨난다.

이리하여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군이 대결하게된다

이리하여 1600년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전국의 모든 다이묘들이 두패로 갈라져 벌인 대전투로  '천하를 둔 전투' 라고 부른다

승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게되면서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게 된것이다.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왜란 직후에는 두나라가 앙숙 관계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으면서 두나라는 친하게 지내게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당시 한명의 군사도 조선에 보내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의 피해를 조선국왕에게 사과함으로써 다시금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고 할수있다.

이에 조선은 통신사를 보내 일본과 교류함으로써 메이지 이신까지 206년동안 12번에 걸친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우방관계를 유지했다.

통신사가 일본에 올때마다 일본은 현재돈 약 6백억원정도의 돈을 들여 행사를 열었다고 하는데 이는 통신사가 일본에게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말해준다. 

여러 문화가 발전하였다.

왜란 당시 일본에서는 수많은 자기공들과 성리학자등을 납치해갔다.

일본에 건너간 도자기공들은 일본 도자기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공을 세웠다.

 사무라이의 변화

전국시대에는 사무라이가 칼을잡는 즉 무인 계급이었다 그것은 임진왜란까지 이어졌으나

전쟁이 끝나고 시대가 평온해지자 사무라이들이 칼을 잡기 보다는 붓을 잡음으로써

사무라이가 무인이아닌 문인으로 변화했다고 할 수있다.

이는 사무라이가 임진왜란때문에 변한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변화한점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중국 - 명의 몰

명나라가 자국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기 위해 조선에여러 차례에 이르러 군대를 파견했다.

그 수는 명나라크기에 비하면 많지 않았으나, 명나라가 일본과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때 북쪽의 여진족이 크게 성장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움으로 명나라와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명나라는 10만대군을 모으고 조선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광해군은 1만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는 싸우기위함이 아닌 왜란때 명의 원병을 갚아주는 척 하기 위함이라 볼수있다.

광해군은 이전에 후금의 왕에게 후금하고는 싸울뜻이 없다고 전하여 왜란 복구의 총력을 가하던 조선을 다시한번 싸움터로 만들지 않게 하려고 한다.

후금은 태종이 즉위한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명과의 대대적인 전쟁을 벌인다.

결국 명나라가 패함으로써 청나라가 중국이 됬다고 할 수 있다.

 

15.광해군의 중립외교와 병자호란에 대하여 시기를 구분하여 쓰시오

 

당시 중국은 명나라가 지고 여진에 의해 통일된 후금이 새로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였고, 후금은 새로이 강성하게 일어나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의리를 따져서 명나라를 도와주는걸 주장할 수는 있었겠으나, 당시 국내 사정이 임진왜란때문에 국토는 황폐화되어있고, 조정에 국고는 바닥나있는 상태로, 아직 임진왜란 수습도 다 안되어있는 상태에서 전쟁을 다시 치루기는 무리였습니다. 

명을 도와 후금과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더라도 전쟁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명군을 편들지도, 후금 편을 들지도 않겠다는 중립적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이 중립외교의 결과, 인조반정이 일어나 훗날 병자호란을 야기하게 됩니다. (19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

국사 ...!!!! 내공 100 드려요 급해서 .ㅎ;;

바로 국사문제 드립니다 ..자세히좀 .. 1.성종의 업적에 대하여 4가지 2.고려... 최충헌은 흥국사의 남쪽 영은관(迎恩館)에 임시로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고 관련자를...

국사에 대한질문좀요~~~~((내공100))

... 좀급해서요 꼭이걸로만 해야되는것아닌되 만약 없으시다면... 빨리해주세요 내공(100))겁니다 1. 제가회의가 열렸던곳이요 - 고구려 때 주요 국사를 논의하고 심의·의결하던...

중3국사부탁드려요~ㅠㅜ(내공100)

중3국사수행인데요 길게말고짧게해주심되요 그러니까...... 부탁드려요ㅠㅜ 빨리해야해요 훈구와 사림은... 힘을써요 주세붕은 위에와 같이 백운동서원을 세웠어요 그럼이만...

역사/국사에 대해 내공 100

... 하려는데요 역사/국사 쪽에는 직업이 무엇이 있나요... 이런식으로요 ^^ 내공 100이니 정성껏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의 없는 답변은 채택 안드려요 ^^ 안녕하세요 지금...

(내공100드려요ㅎ)

... 지금너무급해서내공100드려요~ 틴탑 두번째 단콘~ 1.단콘갈때가져가야할것에는어떤것이있을까요? -인터파크에서 예매를 하니깐 거기서 날라온 티켓을 꼭 가져가야하구요....

[@내공 100@] 국사 고수님들 도와주세요...

중 2 국사 중 고려의 성립과 발전 ~ 무신정권의 성립에... 제 생각엔 기독교나 천주교가 될 거 같아요 * 다음은... 답변 성실하게 올려주시면 감사내공도 PLUS해 드려요 ^^!!!!...

중3 사회,국사공부법 갈쳐줘

... 쓰셈 내공은 뭐 알아서 줄테니 진짜 제대로 안쓰면 디짐 질문 1 : 중3 사회, 국사 공부범 갈쳐줘. 중3학년 이시라면 저보다 형 이시네요 제가 중2학년 이니까요 ㅎㅎ 나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