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에 관해서 질문이요!!!

아르헨티나에 관해서 질문이요!!!

작성일 2009.11.13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제가6학년인데 학교숙제가 나라 조사하기거든요???

 

거기서 아르헨티나를 맡게 됬는데 아르헨티나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유적,문화재라든가 인구 땅 넓이 그런것좀 알려주세요!!!

오늘 2시까지만 해주세요 ㅜ

 

내공 60 겁니다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십니까!!

 

ㅇ 아르헨트나

 

개요 남아메리카 대륙 남동부에 있는 나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Buenos Aires)
언어 에스파냐어
기후 아열대, 온대, 건조...[현재날씨]
종교 가톨릭 92%, 개신교 2%, 유대교 2%
면적 276만 6890㎢
인구 약 4068만명 (2008)

 

지형 [편집]

아르헨티나의 지형도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부에 위치하며, 브라질에 버금가는 넓은 국토를 가진 남아메리카에서 두번째로 큰 나라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러시아, 미국, 브라질, 캐나다, 중국, 호주 등에 이어 8위의 넓은 면적을 가진 나라이다. 북쪽은 볼리비아, 동북쪽은 우루과이·브라질·파라과이, 서쪽은 칠레에 접하고, 동남쪽은 대서양에 잇닿아 있다. 남쪽의 최장거리는 3,700㎞, 동서의 최대거리는 1,700㎞라는 넓은 국토의 서부를 안데스 산맥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팜파스(Pampas)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서쪽과 남쪽에 펼쳐진 중앙의 대평원이다. 습한 팜파라고도 하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코르도바 주의 대부분과 산타 페 주, 라 팜파 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라 팜파의 서쪽 부분과 산 루이스 주도 대체로 평야(건조한 팜파)인데, 건조해서 주로 초지로 쓰인다. 이름이 같은 코르도바 주 지역의 시에라 데 코르도바 산맥은 팜파스에서 가장 지리적으로 두드러지는 지형이다.

이 지역과 우루과이 사이에는 길이 약 4,700㎞의 라 플라타 강이 흐른다. '은(銀)의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어귀의 강폭은 약 220㎞ 가량이다.

팜파스는 농업에 적절한 비옥한 땅으로 쇠고기·양모··옥수수 등을 많이 산출하며, 이 나라의 중요 경제 지역이다. 제조 공업도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란 차코 (Gran Chaco) 북부의 아열대 평원 그란 차코 지역은 계절에 따라 건조하거나 습해진다. 주로 목화를 재배하고 가축을 방목한다. 이 지역에는 차코 주, 포르모사 주가 있다. 간간히 아열대우림, 관목림, 습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수많은 식물과 동물의 서식지이다. 산티아고델에스테로 주는 그란 차코에서도 건조한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이 땅은 파라나 강우루과이 강 사이에 있어서 메소포타미아라고 한다. 이 지역에는 코리엔테스 주엔트레 리오스 주가 있다. 목축과 식물 재배에 적합한 평야 지역으로, 코리엔테스 중부에는 이베라 습지가 있다. 미시오네스 주는 더 더운 지역으로, 브라질 고원의 지형적 영향을 받는다. 아열대우림과 이과수 폭포가 있다.

파타고니아 (Patagonia) 아르헨티나 남부의 리오 네그로 강에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파타고니아스텝 초원에는 네우켄 주, 리오 네그로 주, 추부트 주, 산타 크루스 주가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은 북쪽으로는 반건조 기후에 추우며, 남쪽으로는 건조하다. 그러나 서쪽 경계에는 숲이 자라며 여러 호수가 있다. 그리고 대륙의 돌출부 끝에는 칠레와 절반씩 영유하는 미개지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가 있으며, 바다의 영향으로 서늘하고 습하며, 온화하다. 파타고니아 북부(리오 네그로, 리오 네그로 강 남쪽, 네우켄)은 코마우에 지역이라고도 한다.

파타고니아는 목양지로서 유명하며, 석유 자원 지대로서도 중요하다.

쿠요 (Cuyo) 아르헨티나 중서부는 안데스 산맥의 영향권이다. 산맥 동족의 건조한 지역을 쿠요라고 한다. 고산지대에서 녹은 물은 저지 오아시스에 물을 공급하여, 이 지역은 멘도사 주산후안 주의 과실과 포도주 생산의 중심을 이룬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가면 라 리오하 주의 더 덥고 건조한 기후를 만난다. 산 루이스 주 북쪽의 시에라 팜페아나스라는 세 곳의 낮은 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이곳 최동단 경계를 이룬다.

칠레 국경 지역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콩카과 산이 있다. 안데스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일 뿐 아니라 서반구에서도 최고봉이다. 높이는 약 7,000m이다.

북서부 (NOA) 이 지역은 평균 고도가 가장 높다. 산맥이 뻗어있으며, 어떤 봉우리는 6,000m에 이르기도 한다. 이 산지는 북쪽으로 갈수록 더 넓어진다. 산맥은 비옥한 강가 계곡에서 끊기는데, 가장 중요한 곳은 카타마르카 주, 투쿠만 주, 살타 주칼차키 계곡이다. 더 북쪽으로 볼리비아와 가까운 후후이 주는 주로 중부 안데스의 고원에 있다. 남회귀선이 이곳 북부를 지난다.

기후 [편집]

기후는 국토가 남북으로 뻗고 넓기 때문에 지역차가 크지만, 대체로 온화하다. 북부와 동북부는 아열대성으로, 우계(10∼3월)와 건계(4∼9월)로 나누어지며, 여름이 길고 덥고, 겨울철은 짧고 온화하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부는 온대 기후에 속하며, 강수량은 여름철에 많으나 대체로 연중 고른 편이다. 남부의 겨울, 즉 4∼9월은 혹독하다. 남반구에 있으므로 4계(四季)의 시기는 북반부와 정반대이다.

역사 [편집]

부에노스 아이레스 카빌도. 독립 선언으로 이어지는 1810년의 결의 장면

콜롬부스 이전 시대 [편집]

아르헨티나에 최초로 인간이 정주한 증거는 파타고니아에서 발견되며 기원전 11,000여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차쿠텍 왕이 통치하던 잉카 제국은 1480년에 공격을 시작하여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북서부를 정복해서 코야수유 지역에 포함시켰다. 과라니인들은 유카, 고구마, 예르바 마테 농업을 발전시켰다. 중부와 남부 지역(팜파스와 파타고니아)는 유목민들이 지배했으며 17세기에 마푸체인들이 통일시켰다.

식민 시대 [편집]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 아르헨티나와 칠레, 페루의 해방자

1516년 이 땅에 유럽인들이 들어왔다. 에스파냐는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설치했다. 이 지역은 주로 에스파냐 이민자들과 크리오요라는 그들의 후손과 토착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의 나라였다. 식민 시대 정착민 중 1/3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다른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나머지는 가우초라 하여 팜파스에서 살았다. 토착민들은 아르헨티나에서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 영국이 1806~1807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두 번 침공했으나 크리요오들은 그들을 물리쳤다.

독립 [편집]

1810년 5월 25일 페르디난도 7세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쫓겨났단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은 1차 의회(First Government Junta, 5월 혁명)을 조직했다. 현재의 아르헨티나를 이루게 되는 두 나라가 생겼는데, 남아메리카 합주국(1810년)과 자유 연맹(1815년)이었다. 다른 주들은 자치론자와 중앙집권론자들의 견해 차로 통합 국가에 귀속되는데 시간이 걸렸다. 파라과이는 1811년 독립을 선언하며 분리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1829~1852년 집권.
달마시오 벨레스 사르스필드. 그의 1869년 민법은 아르헨티나 법 제도의 초석을 놓았다.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 1928년 끈기 있는 활동가로 (남성) 보통 선거를 관철하여 공화국의 첫 민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호세 데 산 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군사 작전을 지휘하면서 점차 독립은 현실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산 마르틴과 그의 군대는 1817년 안데스를 넘어 칠레페루의 왕당파를 무찔러 독립을 공고하게 다졌다. 1816년 6월 9일 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에스파냐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1820년 자유 연맹(Liga Federal)은 남아메리카 통합주 군대와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으며, 이 주는 남아메리카 통합주로 귀속되었다. 1825년 볼리비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1828년에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전쟁이 정전을 맺고 우루과이가 독립했다. 이 정전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총독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상했는데, 연방주의자인 그는 공포 정치를 펴고 불안한 연맹을 계속 유지했다.

훌리오 로카 대통령. 1880년에서 1906년까지 정계를 지배했다.

1852년 로사스 총독이 축출되자 중앙집권당(Unitarios)과 연방주의자(Federales)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미래의 내분을 미리 막게 된다. 1853년 헌법이 통과된다. 이것은 법학자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가 초안을 썼으며, 프란체스코회 수사 마메르토 에르키우가 설교를 통해 헌법과 국가 통합을 변호했으며, 처음 몇 년간 어려운 시기를 맞았으나, 1865년 전쟁으로 국가 통합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 아르헨티나의 등장 [편집]

1870년대부터 해외 투자와 이민이 밀려 들어오면서 농업은 근대적으로 발전했고 아르헨티나 사회와 경제 새롭게 재편되어 국가 통합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 "사막의 정복" 남부 팜파스와 파타고니아의 토착 부족들을 탄압하여 1,300여명의 토착민이 죽었다.

1880년과 1929년 사이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부유한 10개국 중 한 곳이었으며 농업 수출 경제로 이익을 보았다. 이민이 들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아르헨티나 인구는 5배로 늘었고, 경제는 15배로 확대되었다.

국민자치당은 비민주적으로 아르헨티나 정치를 지배했으나 1912년 로케 사엔스 페냐 대통령이 남성 보통 선거비밀 선거를 법제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전통적인 정적인 중앙집권론자 급진 시민 연맹이 1916년 아르헨티나 첫 자유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은 사회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가족농과 소상인 지원을 확대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1930년 군부는 그를 축출했다. 그리하여 십 여년간 보수주의자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며 경제 정책을 보호주의로 선회했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제1차 대전 때 중립을 지켰고, 세계 제2차 대전 때도 대체로 그런 태도를 보였으며, 연합국의 식량 공급처가 되었다.

페론에서 마지막 독재까지 [편집]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회 및 교육 정책을 폈으며 노동자 계급의 힘을 강화하고 노조 노동자수를 늘렸다. 그의 아내 에바 페론("에비타"로 잘 알려졌다.)은 페론의 두번째 임기까지 영부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페론의 성공으로 노동 계급 사이에 거물이었다. 1947년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복지를 베풀었다.

후안 페론 대통령(1946년)

이것은 아르헨티나 최초로 정부가 빈민 구제에 관심을 두게 된 사건이었으며, 기존의 과두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에비타는 무뚝뚝한 페론과 그의 지지자 사이의 "사랑의 다리"로 여겨졌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을 얻어냈으며, 페론주의 여성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페론의 두번째 임기까지 그의 경제학자들은 산업과 도시 발전을 장려했다. 1952년 에비타가 33살의 나이로 죽자 페론 행정부는 점차 카톨릭 교회와 자신의 운동 사이의 갈등으로 곤란에 처했다. 1955년 쿠데타가 일어나 그는 망명하에 에스파냐로 갔다.

아르투로 프론디시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1961년) 프론디시의 정책은 에너지와 공업 분야의 해외 및 지역 투자를 장려하여 아르헨티나가 두 분야에서 자립할 수 있게 했다.

이후 페론주의자는 숙청되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58년 선거에서 아르투로 프론디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페론 지지자들의 지원을 일부 얻었으며, 그의 정책은 무역 적자를 보이던 에너지와 공업 분야에 필요한 투자를 장려했다. 그러나 군부는 보수주의자의 이익을 위해 자주 간섭을 일삼았으며 프론디시는 1962년 사임했다. 1963년 아르투로 일리아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확장정책을 폈다.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그가 페론주의자들을 정계에 끌어들이려 하자 군부는 1966년 또 쿠데타로 대통령을 축출했다. 억압적인 새 정부는 국내 개발과 공공 사업에 대한 투자를 장려했다. 1975년에 경제는 매우 발전했고 빈곤은 7%나 떨어져 낮은 수준이었다. 부분적으로 군부 정권의 억압 때문에, 정치적 소요가 확대되었으며, 망명지에서 페론은 능란하게 학생과 시위대를 동원해서 결국 군사 정권은 1973년 자유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페론은 에스파냐에서 다시 돌아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74년 7월에 죽고, 그의 셋째 부인이자 부통령 이사벨 페론은 남편의 뒤를 승계했다. 이사벨 페론은 페론주의자 파벌 사이의 타협으로 선택된 것이었으며, 그녀는 은밀하게 페론의 고문 신세를 졌지만 다른 부통령 후보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좌우익 극단주의자 사이의 폭력 사태와 재정위기가 일어나자 1976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로 이사벨도 축출된다.

경제학자 호세 알프레도 마르티네스 데 오스와 호르헤 비델라 대통령. 이들의 정책은 아르헨티나에 끔찍한 폐해를 남겼다.
라울 알폰신(왼쪽)이 1983년 선거운동에서 그 특유의 제스처를 보이며 지지자에 인사하고 있다.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이 1982년 말비나스 제도(포클랜드)를 점령하면서 아르헨티나는 결국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자칭 국가 재조직 운동은 즉시 잔인하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와 좌익 집단을 탄압(일명 더러운 전쟁)했는데, 이때 비밀정보국은 칠레 비밀경찰 및 미국 중앙정보국과 협조하여 콘도르 작전을 수행해 수천명의 반체제 "행방불명자"가 생겼다. 더러운 전쟁에 낀 많은 군사 독재자들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아르헨티나 독재자 로베르토 비올라레오폴도 갈티에리도 있었다. 새 독재정부는 처음에 얼마간 안정적이었고 여러 중요한 공공 사업을 벌였으나 잦은 임금 동결과 금융 규제 철폐로 생활 수준이 급격히 떨어지고 외채가 늘어났다.

전례없는 부패와 더불어 산업 위축, 페소화 붕괴, 실질 이자율 하락이 겹치면서, 대중은 인권 유린에 맞섰고 결국 1982년 군사 정부가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다 패하자 신뢰를 잃고 1983년 자유 선거를 치르게 된다.

민주주의 [편집]

라울 알폰신 정부는 "행방불명자"를 찾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군대에 대한 민간의 통제 및 민주적인 통합 조직을 세웠다. 과거 세 군사정권 출신자들은 고발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과거 정권이 떠안은 외채는 그대로 남아 국제통화기금과 개인 채권자들은 아르헨티나 경제에 몇몇 조건을 내렸으며, 국가는 우선 공공 사업과 국내 신용을 희생하고 외채를 갚아야 했다. 알폰신은 경제 악화를 해결하지 못하여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뒤이어 갑자기 닥친 1989년 통화 위기로 물가는 15배나 껑충 뛰었으며, 그는 5개월 일찍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새로 대통령에 선출된 카를로스 메넴은 사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으며, 1990년에 두번째 하이퍼인플레이션 이후 경제학자 도밍고 카바요를 기용하여 1991년 페소화 환율을 달러화에 고정시켰으며, 시장 기반의 정책을 추진해 사유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무역 장벽과 기업 규제를 철폐했다. 이런 개혁 덕분에 1990년대 거의 내내 물가 안정을 이루면서 투자와 성장 확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페소화는 시장에 달러화가 밀려들어와 제 가치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외채가 다시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1998년 일련의 국제 금융 위기가 닥치고 고정 페소화가 지나치게 고평가되면서 점차 경제 위기로 빠져들었다. 1990년대에 팽배하던 경제 안정에 대한 기대는 갑자기 무너졌으며, 그의 임기말인 1999년 누적된 문제들과 부패 보고로 메넴은 인기를 잃었다.

브라질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시우바(2003~)와 호세 사르네이(1985-90)가 아르헨티나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츠네르(2003-07)와 라울 알폰신(1983-89)과 다시 만났다.

후임 대통령 페르난도 데 라 루아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악화된 수출 경쟁력을 물려 받았다. 정치 연합은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고, 카바요가 다시 경제 장관으로 돌아오자 이는 금융 파생상품 시장에 의한 위기로 해석되었다. 이에 맞불로 카바요는 결국 자본 이탈 흐름을 막고 긴급한 채무 위기를 막을 수 밖에(은행 계좌를 동결하며 정점을 이루었다) 없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은 계속되었고 2001년 12월 20일 아르헨티나는 1890년 대불황 이래 최악의 사회 및 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거리에선 폭력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과 충돌하여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위 군중 사이로 점차 "모두 꺼져라"라고 외쳤으며, 결국 데 라 루아 대통령도 사임하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2주 동안 세 명의 대통령을 갈아치웠으며, 2002년 1월 2일 입법 의회가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면서 극에 달했다. 아르헨티나는 해외 채무에 대해 채무 불이행(default)를 선언했으며, 11년간 지속된 페소화의 달러화 연동은 폐지되었고, 이로서 페소화가 크게 절하되고 인플레이션을 막았다. 중도 좌파 성향의 페론주의자 두알데는 2002년 말까지 실업률이 25%에 이르고 실질 임금이 지난 60년간 최저치를 보이면서 금융 및 사회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이 위기로 대중은 정치인과 제도를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이듬해 시위가 득세했으며, 경제는 2002년 말부터 안정되기 시작했으며 그해 12월 은행 인출 제한이 해제되었다.

현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츠네르. 2007년 12월에 취임했다.

환율의 평가절하 덕택에 정부는 산업 부흥, 수입대체(import substitution), 수출 증가에 기반을 둔 새 정책을 실행했고, 재정과 무역 면에서 안정적으로 흑자를 보였다. 2003년 5월 사회민주주의 페론주의자 네스토르 키르츠네르 주지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키르츠네르 시기에 아르헨티나는 대부분의 채권에 높은 할인율(약 66%)로 채무 재조정을 하여 국제통화기금에 모든 빚을 갚았고 공익 사업을 재조정하고 몇몇 이전에 사유화된 기업을 국유화했다. 키르츠네르와 그의 경제학자 특히 로베르토 라바냐는 강력한 소득 정책과 공공 사업 투자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을 계속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네스토르 키르츠네르는 2007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 대신,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츠네르 상원의원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해 10월의 승리로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직접 선거로 뽑힌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며, 뒤이어 중도 좌파 정치인 파비아나 리오스티에라델푸에고 주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아르헨티나 역사상 첫 여성 주지사가 되었다. 크리스티나 키르츠네르 대통령의 정당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농업 수출세 인상 계획을 펴다, 2008년 7월 16일 부통령 훌리오 코보스가 의회의 가부 동수(同數) 결과에서 여당에 반대표를 던져서 대통령의 정책을 좌절시켰다. 그리하여 3월부터 7월까지 농업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직장폐쇄로 맞서자 건실한 경제 성장은 급속히 퇴행하고 두자릿수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치자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남편의 정책대로 경제의 문제 부분에 국가가 직접 나서게 되었다.

인구 현황 [편집]

현재 수치 [편집]

아르헨티나 통계 및 인구조사국(INDEC)의 2001년 인구조사를 보면 아르헨티나의 총 인구는36,260,130명이다. 남아메리카에서는 3위이며, 전 세계로는 30위에 해당한다. 전 세계적으로 8위의 면적을 자랑하는 국토를 보유한 나라 치고는 인구가 너무나 적은 나라이기도 하다. 2008년에는 40,482,000으로 늘었다. 이 나라의 인구밀도는 1평방킬로미터당 15명으로 전 세계 평균 50명보다 낮다. 인구 분포는 편중되어 있으며,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인구 밀도는 1평방킬로미터당 14,000명이 넘는데 비해 산타 크루스 주는 1평방킬로미터당 1명도 채 안된다. 1930년대 이래 적정한 출산율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순 이민율이 양수(+)인 나라로 해마다 +0.4%로 순수 이민자가 들어온다.

지역별 인구[1]
코르도바 시청
순위 도시 인구 지방
1 부에노스아이레스 City + 31 partidos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12,789,000 팜파스
2 코르도바 코르도바 1,372,000 팜파스
3 로사리오 산타 페 1,242,000 팜파스
4 멘도사 멘도사 885,000 쿠요
5 산미겔데투쿠만 투쿠만 789,000  NOA (northwest) 
6 라플라타 부에노스아이레스 732,000 팜파스
7 마르델플라타 부에노스아이레스 604,000 팜파스
8 살타 살타 516,000 NOA (northwest)
9 산타페 산타페 493,000 팜파스
10 산후안 산후안 453,000 쿠요
11 레시스텐시아 차코 377,000 그란차코
12 산티아고델에스테로 산티아고델에스테로 357,000 그란차코
13 코리엔테스 코리엔테스 345,000 메소포타미아
14 바이아블랑카 부에노스아이레스 304,000 팜파스
15 산살바도르데후후이 후후이 298,000 NOA (northwest)
16 포사다스 미시오네스 287,000 메소포타미아
17 파라나 엔트레리오스 268,000 메소포타미아
18 네우켄 네우켄 255,000 파타고니아
19 포르모사 포르모사 229,000 그란차코
20 산페르난도델바예데카타마르카 카타마르카 196,000 NOA (northwest)
21 산루이스 산루이스 192,000 쿠요
22 라리오하 라리오하 172,000 NOA (northwest)
23 리오콰르토 코르도바 161,000 팜파스
24 콩코르디아 엔트레리오스 148,000 메소포타미아
25 코모도로리바다비아 추부트 141,000 파타고니아

인종 [편집]

"이민자 축제"(Fiesta del Inmigrante)에서는 19세기에서 20세기 오베라 시의 아르헨티나 이민을 기념한다.
 

아르헨티나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 더불어 이민자들의 나라이다.

대부분의 아르헨티나인들은 유럽에서 온 식민시대 정착민과 19~20세기 이주민들의 후손이며, 아르헨티나 인구의 85%는 스스로를 유럽인 후손으로 생각한다. 이들 유럽 이민자 대다수는 이탈리아에스파냐 출신이다. 인구의 8%는 메스티소이다. 또 4%는 아랍인이나 동아시아인 후손이다. 초근 국가 인구조사에 따르면 600,000여명 (1.6%)만이 원주민이다.

에스파냐 식민자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이래,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620만 여명의 유럽 이주민 이 나라로 들어왔다. 주요 출신지로는 이탈리아(피에몬테, 베네토, 롬바르드, 나중에는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에스파냐(주로 갈리시아바스크), 프랑스이다. 그 밖에도 아일랜드,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그리스, 포르투갈 등이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유럽이나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등 중부 유럽에서도 이민자가 왔다. 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 등 발칸 국가에서도 상당수가 왔다. 아르메니아인도 있으며, 추부트 계곡에는 웨일즈인들이 큰 집단을 이루고 있다.

1906년에 건설되어 수많은 새 이민자를 맞아주던 "이민자 호텔"은 이제 국립 박물관이 되었다.

소수 민족 [편집]

아직 적지만 동아시아에서 온 이주자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살고 있다. 최초의 아시아계 아르헨티나인은 일본인의 후손으로 이후 한국인, 중국인, 베트남인 등이 뒤 따라서 현재 60,000명이 넘었다.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집단은 대개 아슈케나짐 유대인으로 15~20%는 세파라딤으로 주로 시리아 유대인이다.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집단은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크다.

파타고니아에는 1902년 끝난 보어 전쟁 이후 이곳으로 이주안 남아프리카 보어인의 집단이 있다. 이들은 100~120명으로 추산되며, 훌리오 로카 장군이 그들에게 할당한 땅에 아직도 살고 있다. 그들은 주로 농촌에 살고 있다.

아랍 출신의 집단도 많은데, 레바논이나 시리아에서 온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동방 정교마론파 신도로 유대인이나 무슬림도 있다. 상당수는 재계나 정계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령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은 라 리오하 주의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이다.

수적으로 적긴 하지만 영국 이주민들도 현대 아르헨티나가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전통적으로 철도, 공업, 농업 분야에서 영향력있는 위치에 올랐다. 1940년대 후안 페론이 수많은 영국인 소유 회사를 국유화하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말비나스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계 아르헨티나인들이 이렇게 성공한 연유는 복잡하다.

2004~05년 "원주민 보충 조사"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아르헨티나 원주민 인구는 600,000여명으로, 대다수는 마푸체인들이다.

아르헨티나의 인구조사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이 자료는 역사적으로 인종보다는 국적 기원의 범주로 조사를 해와서 아프리카계 아르헨티나인이나 메스티소를 빠뜨렸다는 것이다. 1887년 국가 인구조사에서 처음으로 흑인을 독립 범주로 설정했는데, 이전에는 정부에서 무시한 것이었다.

불법 이민 [편집]

불법 이민은 아르헨티나 인구 현황에서 최근에 생긴 요소이다. 대부분의 불법 이민은 아르헨티나 국경 북쪽의 볼리비아나 파라과이에서 오는 경우이다. 페루나 에콰도르, 우루과이에서도 불법 이민자가 들어온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750,000여명이 공적인 등록 기록이 없는 것으로 추산했고, 그리하여 "위대한 조국"(Patria Grande) 계획을 시행하여 불법 이주민을 공적 신분을 부여하여 670,000여명의 신청자가 이 사업으로 양성화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불법체류자에 대한 처우가 매우 관대하며 아르헨티나로 여행온 사람들이 아예 그 곳에 터를 잡고 죽을때까지 사는 경우도 빈번하다. 한국의 경우 상호비자면제협정이 이루어져 있으며 여권없이 최장 90일까지 아르헨티나에 체류할 수 있으나 90일이 지나도 여권을 갱신하지 않을 경우 벌금이 한화로 약 2만원에 해당되는데 이마저도 실질적으로는 흐지부지 상태이다.

도시화 [편집]

투쿠만의 주지사 관저
라 플라타의 연방 법원

아르헨티나는 대단히 도시화된 나라이며, 국내 10개 대도시 지역에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으며, 시골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은 인구의 1/10 이하이다. 약 3백만명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자치시에 살고 있으며, 대 부에노스 아이레스 광역권의 인구는 총 1,280만명이다.(2008년) 그리하여 이 지역은 세계에서 인구가 많은 대도시권 중에 한 곳이다.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로사리오 광역시도 인구가 각각 130만, 120만에 이르며, 나머지 다섯 광역 도시들도 각기 50만 정도 인구가 살고 있다.

대부분의 유럽 이주민들은 도시에 정착해서 직장을 얻고 교육 등 더 많은 기회를 얻어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었다. 또 철도망이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지방 소도시에도 정착했으며, 1930년대부터 시골 노동자들이 대도시로 이주했다.

1990년대 철도가 끊기고 지역 소규모 제조업이 대규모 저가 수입품에 밀려 몰락하면서 많은 시골 소읍들이 유령도시가 되었다. 동시에 아르헨티나의 대도시 외곽에는 슬럼(villas miserias)이 확산되어 슬럼 인구가 750,000 가구(약 4백만 명)에 육박했다. 슬럼에는 도시 하류층 빈민, 내륙(특히 북부)에서 올라온 시골 사람들, 1960~90년대 사이 이웃나라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2001~2년에 경제 위기로 상당수 이민자들이 떠나기도 했지만, 경제가 회복되자 다시 돌아온 사람도 많았다.

여러 도시 지역들은 유럽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유럽 도시처럼 보인다. 대개 도시는 에스파냐식으로 플라사plaza라 하는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당과 정부 건물이 둘러싼 격자 모양의 도시 구조이다. 이런 도시의 일반적인 배치를 "체커판"(damero)이라고 하는데, 사각형 블록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데, 현대에는 이런 방식을 벗어나기도 한다. 19세기 말에 건설된 라 플라타 시는 체커판 모양에 일정한 간격으로 대각선 도로가 나있다. (이 도시는 남아메리카 최초로 전기 가로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행정 구역 [편집]

아르헨티나의 행정 구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르헨티나의 행정구역 지도
주도 주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치시 멘도사 멘도사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라플라타 미시오네스 포사다스
카타마르카 주 산페르난도델바예데카타마르카 네우켄 네우켄
차코 레시스텐시아 리오네그로 비에드마
추부트 라우손 살타 살타
코르도바 코르도바 산루이스 산루이스
코리엔테스 코리엔테스 산후안 산후안
엔트레리오스 파라나 산타크루스 리오가예고스
포르모사 포르모사 산타페 주 산타페
후후이 산살바도르데후후이 산티아고델에스테로 주 산티아고델에스테로
라팜파 산타로사 티에라델푸에고 우수아이아
라리오하 라리오하 투쿠만 산미겔데투쿠만

정치 [편집]

정치는 공화제를 채용하고 삼권분립이며, 국민 투표에 의한 4년 임기의 대통령이 중심이다. 정·부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태생의 가톨릭교도에 한한다. 상·하 양원제로서, 1912년부터 보통 선거제가 실시되고 있다. 전국은 23개의 주와 1연방구로 이루어지는데, 각 주는 주의회를 가지며, 주지사를 선거한다. 2차 대전 후의 후안 페론이 집권한 이후 쿠데타나 정권 교체가 심하지만 외교 방침은 미국과의 협조가 기본이 되고 있다. 병역은 포클랜드 전쟁이후 모병제를 택하고 있다. 총 병력은 약 6만 7,300명이며,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근대화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경제 [편집]

아르헨티나의 산업의 근간(根幹)은 농업목축업이며, 국가의 경제는 이들 제1차 산업 위에 성립되어 있다. 농산물과 축산물이 GNP의 14%, 총수출의 69.3%를 점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공업화를 추진하여 공업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는 반면 공업의 생산 경비가 높아 경쟁력은 낮은 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비스업도 시장점유율이 높으며, 그 밖에 운수, 상 등을 포함하면 아르헨티나는 제3차 산업이 발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1900년대에 들어 농산물 가공에서 출현한 아르헨티나의 공업은 제1차 페론 정권시기인 1940년대부터 막강한 정부의 보호 아래 급속히 발전을 이뤘으며 그후의 각 정권 같은 공업화 정책을 계속 추진한 결과 현재는 대부분의 소비재, 내구소비재와 함께 중공업 부문에서는 철강, 선박,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제조하고 있다. 그러나, 장차 농목업이 국가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중요 산업임에는 변함이 없다. 목축업은 극히 왕성하여, 국토의 40% 이상이 목장과 방목지(放牧地), 10%가 사료 작물과 목초의 농지로 되어 있다. ·돼지·고기·원피(原皮)·양모 등이 산출되며, 육류(肉類)가 풍부하므로 국민 1인당 식육 소비량이 세계 제1위이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아마(亞麻)·면화·목초류·고구마 등인데, 이곳의 곡물은 북반구의 단경기(端境期)에 출하되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주요 수출품목은 ·육류· 등으로 미국·영국·네덜란드·이탈리아·러시아·브라질 등이 주요 수출 대상국이다. 이에 대하여 기계류·철강·화학약품·원유 등을 수입하는데, 미국·일본·이탈리아·독일·브라질 등이 주요 수입 대상국이다. 광업은 총생산의 4%에 불과하며, 파타고니아 지방의 석유 자원이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매장량은 풍부하나 개발이 뒤져 있다. 근대공업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났는데, 축산물의 가공업, 삼유·피혁 공업이 중심이다. 제철업은 소미자 제철소가 산니콜라스에 선강(銑鋼) 일관 공장을 건설한 후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아르헨티나 페소의 약세화로 인하여 자국의 경제공황을 막기 위해 1 아르헨티나 페소당 1 미국 달러로 환율고정을 시켰다. 그러나 자국민조차 자국의 화폐보다는 미국의 달러화를 즐겨 사용한다.

사회 [편집]

아르헨티나는 탱고목축으로 유명하며 교육과 문화 수준은 남아메리카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따라서 박물관, 미술관, 극장 등의 문화 수준과 대학을 비롯한 교육 시설은 상당히 충실하다. 다만 문화는 이 지역의 원주민 인디오가 볼 만한 문화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이식된 유럽 문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상류 계층에서는 프랑스 풍이 유행했다. 반면 중·하류계 층에서는 국민의 최대수를 차지하는 이탈리아계 이민과 그 자손을 통해 전파된 이탈리아 문화가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렸다. 또한 식민지시대 이후 스페인 문화의 토대 위에 생활양식, 관습, 특히 식생활, 언어,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최근에는 미국과의 정치, 경제관계가 긴밀해짐에 따라 미국 문명도 침투되고 있으나 큰 영향은 받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가장 교육이 진보한 나라이며 문맹률은 3%에 불과하다. 교육제도는 7년제의 초등 교육, 5년제의 중등 교육과 4∼6년제의 대학 교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등 교육은 의무 교육으로 7년간 무료이며 중등 교육(5년), 대학 교육(5∼6년)도 무료이다. 대학의 경우 입학은 쉽지만 졸업이 어렵다.

교통 [편집]

넓은 국토를 가진 아르헨티나는 교통도 필연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철도는 연장거리 4만 5,000㎞ 에 달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핵(中核)으로 하여 남아메리카에서는 가장 잘 정비되어 있으며 세계에서도 유수한 철도망으로 손꼽힌다. 항공 또한 발달하여,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문화 [편집]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 중의 하나인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on)을 비롯, 오페라, 발레, 연극, 영화, 클래식 음악, 미술 전시 등 200여 개가 넘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공연 시설을 가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민속춤은 '까르나발리또(carnavalito)' '삼바(zamba)' '가또(gato)' 등이 있는데 특히 '탱고(tango)'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다. 1978년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하였고, 1978년엔 자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했다. 하계올림픽에서 역시 발군의 성적을 보여줬는데 특히 2004년 하계 올림픽2008년 하계 올림픽에 연속으로 우승한 점은 주목할 만 하다. 또한 프로축구 리그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은 세계 5대 축구 리그 중 하나에 꼽히고 있다. 배구농구 역시 매우 인기있는 스포츠로써, 농구는 2004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미국을 완파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관광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르헨티나의 관광입니다.

아르헨티나를 찾는 관광객들은 자연스러운 경관과 지리적 특질, 문화적 특성에 대해 크게 매료된다. 더욱이 2001년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약세로 환율이 외국인 관광객들에 유리해지면서 남미 중에 아르헨티나를 여행지로 찾는 사람들도 많다. 자국의 통계국에 따르면 2005년도의 관광객 수는 전년 대비 12% 성장하였으며 전체 서비스업 관련 총액의 8.1%, 국가 전체 생산 중 세 번째로 높은 산업을 관광이 차지하였다. 당시 방문객은 37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통계상 최초로 외국인들의 아르헨티나 방문객이 해외에 여행을 떠난 아르헨티나 사람보다 많아졌다. 2006년 1/4분기에는 전년 동일 분기에서 22%나 상승한 560,265명의 관광객이 찾았다. 31%는 유럽, 19.2%가 미국캐나다, 14.2%는 브라질, 9.1%는 칠레, 14.1%가 이웃 국가 출신의 관광객이었다.

외교 [편집]

대한민국

1962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현지에 상주공관을 설치하였고 현지교민과 체류자가 있다.

  • 문화협정
  • 발명특허권 보호협정
  • 무역협정
  • 복수상호 비자협정
  • 투자보장협정
  • 범죄인도 협정
  • 원자력 협정
  • 항공협정
  • 과학기술 협정
  • 수산기술 협력협정
  • 경제관련 협정
북한

1973년 수교하여 남북 동시수교국이 되었지만 주아르헨티나 북한 공관의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1977년 북한공관이 모두 철수 및 폐쇄하였으며 동년에 아르헨티나 정부도 대북관계를 단절화함에 따라 단교조치되었다.

일본

아르헨티나와 일본은 1898년에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아르헨티나로부터 군함 리바다비아(스페인어: Rivadavia)호와 모레노(스페인어: Moreno)호를 각각 가스가(春日, かすが)호와 닛신(日進, にっしん)호로 명명지어 구입하고, 이 군함들이 러일 전쟁에서 활약한 것에서부터 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우호관계가 계속되었다. 포클랜드 전쟁 중, 미국· 영국·EC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금수 조치를 하지 않는 등 일본이 답변확정한 독자외교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일본 전문가들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바깥 고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 분류가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아르헨티나에 관해서 질문이요!!!

... 거기서 아르헨티나를 맡게 됬는데 아르헨티나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유적... [편집] 아르헨티나의 지형도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부에 위치하며, 브라질에...

아르헨티나 유학에 관해서 질문드려요

... 대학생입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아무래도 아르헨티나 인식이 안좋아서 그럴꺼 같아서요 ㅠ... 아르헨티나가 근데 왜 인식이 안좋은가요..? 디자인쪽에선...

아르헨티나에 관련하여 질문을 드립니다.

... 대충 요 며칠 아르헨티나에 관해서 정보를 찾아봤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무래도 총기강도도 많고 한국인이 살기 좀 위험한 것 같더라고요. 부에노스 아이레스...

수화물 취급과 비자에 관해서 질문드립...

... 미국에 무비자로 입국했는데 아르헨티나로 친구 만나러 일주일 정도 갈껀데 아르헨티나 비자도 따로 발급... 미국에 무비자로 입국했는데 아르헨티나로 친구 만나러...

우표에 관해서 질문드립니다.

... 우표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르헨티나 우표네요. 국내에서는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소장하시거나, 버리셔도 크게 무리는 없어보입니다.

fm2009 능력치에 관해서 질문이요

제가 지금 fm2009를 하고있는데 선수를 영입하려고 하는중이거든요 근데 브라질이랑 아르헨티나쪽에 유망주들 능력치를 보니깐 능력치가 보이는것도 있고 안보이는것도...

2006 독일월드컵에 관해서 질문입니다..

... 어려운 질문내용에 비해 무내공이라 답변이 잘 없을 것 같아 한 줄 거듭니다.... 세 사람 모두 아르헨티나 출신입니다. 1. 한국 대 스위스전 주심 오라시오 엘리손도...

남미 여행에 관해서 질문(급)

... 하지만, 보름 정도면 브라질, 아르헨티나 집중으로... 배타고 빙하를 보러갈 수 있는 아르헨티나쪽 남단 파타고니아 방문이요. 또, 이과수도 브라질편과 아르헨티나편...

양성평등에 관해서 질문!!

... 내공 100걸어요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마르티네스 데 페론(Isabel Martínez de Perón)'으로 1973년에 남편인 '후안 페론'과 함께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