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문을쓴33인이름무엇인가요

독립선언문을쓴33인이름무엇인가요

작성일 2008.07.23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독립선언문을쓴33인에이름  업 적  생년월일다써주시고다음주까지부탁함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하여

 

각 단체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던 민족독립운동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각 단체를 묶는 대연합전선이 절실하였다. 천도교와 그리스도교는 1919년 3·1운동의 초기 조직단계에서 민족 대연합전선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천도교 측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에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이 기초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 측의 오세창()이 총책임을 담당하고,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총실무를 담당했다. 이종일은 보성사의 직공 신영구와 감독 김홍규에게 지시하여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면서 극비리에 2월 27일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을 인쇄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세창의 총책임 아래 천도교, 그리스도교, 불교, 학생단 등으로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서는 그 자체가 독립만세시위를 지시하는 기능과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범위까지는 초기 조직단계의 활동가들에 의하여 3·1운동이 사전 조직화된 범위라고 볼 수 있다.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지역은 서울, 평양, 선천, 원산, 개성, 서흥, 수안, 사리원, 해주, 대구, 마산, 전주, 군산 등이었다. 민족대표의 선정은 교단별로 추천을 받았다.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최린() 등 15명이 선정되었다. 그리스도교측에서는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16명이 선정되었다. 불교측 대표로는 한용운()과 백용성()이 서명·날인했다.

 

 

손병희 [孫秉熙, 1861.4.8 ~ 1922.5.19]

충청북도 청원에서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2년 조카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때문이었다.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 및 관서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무너진 조직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었다.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만나서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켰으며, 이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던 와중에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먼저 동학에 입교, 자신에게 포교했던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여기에서도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였고,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1867년) 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03년부터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키게 된다.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하다가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천도교를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졌고, 손병희는 친일조직인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서 이들과 결별한다.

귀국 후에는 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교육 사업과 출판 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사망했다.

 

권동진 [, 1861.12.15~1947.3.9]

호는 애당()·우당()이고, 천도교에서의 도호()는 실암()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함안군수()·육군참령()을 지냈고, 그후 개화당()에 들어가 혁신운동에 참여했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그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도사()가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의 핵심적 지도인물이 되었으며,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구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광주학생운동 때 다시 1년 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정계에 투신하여 신한민족당() 총재, 민주의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임예환 [, 1865.7.17~1949.4]

호 연암()이고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났다. 1888년 동학()에 입교한 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평안도 지방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싸웠으며, 1912년 천도교 도사()가 되어 평양에서 민중계몽과 포교에 힘썼다. 1919년 2월 24일 고종의 인산()과 교주 최제우() 환원()기도 참배차 상경하였다가 25일 손병희()·오세창()·권동진() 등을 만나 거사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 28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신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나인협 [, 1872.10.8~1951.4]

호 홍암().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19세 때 동학()에 입문하여 동학농민운동 때는 나용환()과 평안도 지방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로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홍기조 [, 1865.12.6~1938.7.6]

본관 남양(). 호 유암().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하였다. 홍경래()의 후손으로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886년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대접주()·창의대령() 등을 역임하고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의 도사()·장로()를 지내면서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박준승 [, 1866.11.24~1921.3.24]

호 자암. 전라북도 임실()에서 출생하였다. 1891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 접주()가 되고, 1908년 수접주(), 1912년 전라남도 장성()의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이 되었다. 1916년 전라도 도사()에 임명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수교도() 유태홍()·박영창()·김의규()에게 인쇄된 독립선언서 5,000장을 나누어 주어 장성·남원()·임실() 등 각지에서 궐기하게 하고, 서울로 올라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양한묵 [, 1862.4.29~1919.5.26]

본관은 제주(), 자는 길중(), 호는 지강()이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했다. 1894년(고종 31) 탁지부() 주사()로 능주()에서 세무관리로 있다가 1897년(광무 1) 관직에서 물러나 중국베이징[] 등지를 유람,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일본 나라[]에서 그 곳에 망명차 와 있던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의 권유와 천거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 후 개화운동단체인 진보회()를 결성하였는데 1905년 이용구() 등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자 이준()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06년 손병희·권동진 등과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고, 집강진리과장()·우봉도()가 되었으며, 1909년 법도사()를 거쳐 11년에는 직무도사()가 되어 서울에 교리강습소를 개설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권병덕 [, 1867.4.25~1944.9.15]

본관은 안동, 자는 윤좌(), 호는 청암()·정암()·우운()이다.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손병희()와 함께 6만 군중을 이끌고 호응하였으나 실패한 후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 전제관장()·이문관장대리()·금융관장()·보문관장()을 지냈다.
그러나 1912년 천도교에서 시천교()가 분리될 때 이에 가담하여 시천교 종무장()을 거쳐 시천교에서 경영하는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18년 다시 천도교로 개종(), 도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3 ·1운동에 참여,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완규 [金完圭, 1876.7.9~1949.6.20]

호는 송암()이고, 서울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 여수통신주사()·한성부주사() 등을 지냈다. 1910년 국권피탈 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봉도()·법암장() 등을 역임하고,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가 되어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하였고, 광복 후에는 국민회 재정부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나용환 [羅龍煥, 1864.8.7~1936.8.19]

호 봉암(). 평안남도 성천에서 출생하였다. 23세 때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천도교 전체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도사()로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종훈 [, 1858.2.9~1931.5.2]

호 정암(). 1858년 2월 9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25세 때 동학()에 입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서 활약하고, 1898년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자 옥리()를 매수, 시신을 몰래 빼내어 장례를 치르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2년 귀국, 손병희()·권동진() 등과 천도교 개편에 힘써 도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25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손병희가 죽은 후 1922년 7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의 고문에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갔는데,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홍병기 [, 1869.11.5~1949.1.26]

호 인암().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천도교 장로()로 있으면서 교세확장과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6년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다시 검거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승훈 [李昇薰, 1864.3.25.(음2.18)~1930.5.9]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하였다. 빈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으며 10여년 동안 유기행상과 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이승훈은 뛰어난 경영가로서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하여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여 근로자들의 생산능률은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이 날로 번창하였다.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 전쟁의 발발로 파산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과 고종 강제 퇴위로 정세가 뒤숭숭하던 시기에 평양에서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이승훈은 40대의 나이에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교육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한평생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 봉사했다.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워서 인재 양성에 힘썼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무렵부터 기독교에 귀의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오산학교는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함께 이 지역 민족주의 교육의 두 축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흐름들은 일본의 경계를 샀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계열, 신민회 인사들이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105인 사건이 적발될 당시 그는 이미 이전의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나, 서울로 압송되어 와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때도 기독교계 대표로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였으며,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

세 사건으로 총 9년여를 복역한 뒤 출옥한 후에도 이승훈은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며 분신처럼 생각했던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1930년 사망하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박희도 [, 1889~1951]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04년 평양의 숭실전문을 졸업한 후 서울의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서울에 영신학교·중앙보육학교를 설립, 부교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신생활사()를 설립하여 《신앙생활》의 주필로 독립사상과 신앙운동에 힘쓰다가 다시 체포되어 2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잡지 《동광()》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하다가 1948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하여 친일파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갑성 [, 1889.10.23~1981.3.25]

본관 전주(), 호 연당()이다. 1889년 10월 23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의 지배인이 되고, 19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의 지배인이 되었다.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상하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였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 회장, 1947년 과도입법의원을 지냈고, 1950년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국민회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정무부장을 역임하고, 1963년 공화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오화영 [, 1880.4.5~1950(납북)]

호 국사(). 일명 하영().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원산() 감리교회 목사, 원산 광성()보통학교 교감을 지낸 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부터 신간회() 간부, YMCA 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9년 비밀결사 흥업구락부()사건으로 6개월간 구금되었다.

8·15광복 후 조선민족당 당수, 한중협회() 회장, 반탁()투쟁위원회 위원, 1946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정무위원·외교협회 이사·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정치학관(:현 건국대학) 초대 관장과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최성모 [, 1874.1.9~1937.3.14]

1874년 1월 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어 해주() 남본정()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19년 상경하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1920년 경성() 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에 만주로 망명하여 펑톈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필주 [, 1869.12.9~1942]

1869년 12월 9일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20세 때 구()한국군에 들어가 8년간 장교로 근무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를 중심으로 하는 상동청년회에 가입,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어 기독교청년회(YMCA)에 들어가 상동 공옥()소학교의 체육교사로 근무하면서 미신타파, 계급차별의 배격, 자립정신의 고취 등을 표방하고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왕십리교회·정동()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이상재()·최병헌() 등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미아리·청파동·용두동·신촌 등의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부설 유치원·소학교·부녀자를 위한 야학 등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후에 노령으로 서울을 떠나 수원 남양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창준 [金昌俊, 1889~1956]

평안도 강서군 중산면 출생으로, 강서군 반석면의 소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아오야마학원()을 수료하였다.
18세 때 미국인 선교사인 문약한(, Moore, J. W.)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평양 중앙교회, 박구리 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 전날인 2월 28일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 900매를 건네받아, 이 중 600매를 이갑성()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300매는 경성화상점 사무원 이계창()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가져가 나누도록 하였다.
삼일독립선언서에는 예수북감리교 전도사 신분으로서 기독교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당시 30세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는 독립선언서 발표 모임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1년 12월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최린(), 함태영, 한용운 등과 함께 가()출옥하였다. 그 후 그는 서울 감리교 중앙예배당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였다. 목사로 있는 중앙예배당 뿐만 아니라, 서울 상동교회, 성북동교회, 석교교회 등을 돌며 설교 및 강연활동을 계속하였다.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의 순회 강연 등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에서 1926년까지 한 때 미국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광복후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하여 좌익활동을 하였고, 1946년 2월에는 좌익계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및 중앙상임위원직을 수행하였다. 1948년에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직에도 올랐다. 6.25전쟁을 겪은 후 북한을 선택하고 월북하였다.

 

신석구 [, 1875.5.3~1950.10.10]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은재()이다. 충청북도 청주()에서 출생했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뒤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는데,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이 운동의 주도인물이 되었다. 2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감리교단 차원의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 신사참배·전승기원예배()를 거부하여 여러 번 투옥되었다.

8·15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여 3·1절기념 방송사건·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기도 하였고 1949년 4월 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전쟁 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박동완 [, 1885.12.27~1941]

호 근곡(槿). 경기 양평() 출생이다. 한성외국어학교·배제학당 등에서 수학, 감리교 제일교회 전도사로 근무하는 한편 기독교신보사() 서기로 전도와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19년 3·l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출옥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위원장·신간회() 상임간사 등을 지내며 사회운동에 종사하였다.
1931년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옹호연맹(滿) 재무부장이 되어 현지 상황을 시찰하고 한·중 양 국민의 융화에 힘썼다. 그 후 하와이로 망명, 한인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국내의 흥업구락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홍식 [, 1872.3.1~1937]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34세 때 그리스도교에 입교,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충청남도 공주()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1917년 평양() 남산현()교회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3·1운동 계획에 대해 듣고, 이제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를 계기로 3·1독립선언서에 기독교 대표로 서명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창에 붙잡혀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뒤에는 인천·원주 등지에서 종교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양전백 [梁甸伯, 1869.3.10~1933.1.17]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호 격헌().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전도사로 일하다가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선천북교회에 부임하였다. 신성중학()·보성여학교() 등을 설립하였으며, 여러 곳에 양로원·고아원도 세웠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1914년 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1916년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19년 3월 1일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포고문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명룡 [, 1872.8.2~1956.11.12]

본관 전주(). 호 춘헌(). 1872년 8월 2일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을 배우고 1892년 그리스도교에 입교, 신앙생활과 육영사업에 힘썼다.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소 소장이 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한인토지수매를 적극 반대하였다. 1911년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 동안 복역하였다. 1916년 덕흥()교회 장로가 되어 농장을 경영하며 교회를 설립하고,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평동중학()을 세워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1954년 반공연맹 이사, 1955년 평북도민회 고문, 3·1정신선양회 고문, 이준열사()기념사업회 고문, 1956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오산중학건축발기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길선주 [, 1869~1935.11]

자는 윤열(), 호는 영계()이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선도()를 공부하면서 한의학()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다. 같은해에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의 평양지부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목회()활동과 구국운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숭덕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흥사()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평안남도 고창교회()에서 설교 도중에 죽었다.
문집에 《영계 길선주 목사 저작집》, 저서에 《해타론()》 《만사성취()》 《강대보감()》 《말세학()》 등이 있다.

 

유여대 [, 1878.11.26~1937.1.13]

호 낙포().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생이다. 1895년 서당을 개설, 훈도가 되었고, 1900년 의주에 양실()학교를 세웠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의주 동교회() 목사가 되어 일하면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여 폐교에 이른 양실학교를 재건하고, 1931년 백마()교회 목사로 있을 때 병석에서도 민족계몽을 위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저서에 《면무식()》 《위인기담()》 《강도열전()》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병조 [金秉祚, 1877.1.10~1950. 9]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한학을 익혀 서당 훈장을 하던 중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3년 근대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개신교에 입교했으며, 1917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에 유여대 등 장로교 인사들과 함께 선천의 양전백목사 사택을 방문하여 이승훈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3·1 운동 거사 계획을 듣게 된다. 이미 경성부에서 천도교 지도자들과 연대에 합의하고 돌아온 이승훈의 권유로, 김병조와 유여대, 이명룡과 양전백은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장을 이명룡에게 맡기고 당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평북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

이후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고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대표와 선전위원회 이사(1920년) 등을 지냈다.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으로도 근무한 그는 독립운동 자료의 수집과 편찬에 관심을 두고 1924년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발간했다.

1923년부터는 상하이를 떠나서 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33년 귀국했다. 이후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공식 활동을 접고 정주의 묘두산 기슭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중 광복을 맞게 된다.

광복 직후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가했으나 반공 인사였기에 소군정과 마찰을 빚었다. 반소련 무장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1946년 겨울 체포되었다.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다. 그에 대한 저술로는 《일재 김병조의 민족운동》이 있으며, 차남이며 목사인 김행식이 《일재 김병조 평전》을 펴냈다.

 

정춘수 [, 1875~1951]

본관 광주(), 호 청오()이다.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원산()에서 영국 선교사를 만나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후 상경하여 경성()신학교·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이바지하였다.

3·1운동 때 원산 남촌동()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종사하였으며, 1934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서 105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친일행각을 한 것이 논란이 되어 청주시 3·1공원에 있던 동상이 철거당하였다.

 

한용운 [, 1879.8.29~1944.6.29]

본관 청주(), 호 만해(·), 속명 유천(), 자 정옥(), 계명 봉완()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에 가서 연곡()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백용성 [, 1864.5.8~1940.2.20]

본관 수원(). 법명() 진종(). 속명 상규(). 용성은 법호().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하였다. 16세 때 해인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전국의 명찰()을 돌면서 심신 연마에 힘썼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저술에 진력하면서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저서로 《수심론()》, 《귀원정종()》, 《용성선사어록()》 등이 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선언문을쓴33인이름무엇인가요

독립선언문을쓴33인이름 업 적 생년월일다써주시고다음주까지부탁함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대하여 각 단체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던...

기미독립선언문에대해서~

... 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 우리 나라 고유의 연도로 이름 붙였을 때 '기미년'이기 때문에 붙은 말입니다. 즉 기미년의 독립선언문이라는 뜻이지요. 민족 대표 33인은 자신들이...

독립 유적지 좀...

... 1999년 3·1운동 당시 33인 대표들이 최초로 독립선언문을... 탑의 이름을 따서 파고다공원으로 명명했다.... 김충현씨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33인이 자진자수를 한 이유..

... 그리고 33인을 애국지사처럼 교과서에 목적은 무엇입니까? 애국심을 기르기... 3.1운동의 시작인, 33인독립선언문은 그 만큼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입니다. 교과서에는...

독립운동

... 그래서 무엇을 남겼는지 (기념비같은것들...) 지금도... 김태련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 선언문을 남산동 자기... 일본인 재판장이 선생에게 이름이 허위가 맞는지 묻자...

한국 국기의 뜻은 무엇인가요?

한국 국기의 뜻은 무엇인가요?! (국기 전체) 답변: 아래... 민족대표 33인독립선언을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3.1절에 감사해야할 인물들을 알려주세요.

...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름은 다음과 같다. <민족... 되어 독립 선언문 낭독이 이루어졌고, 이후 3 · 1...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독립 열사........[[{{((내공5))}}]]

... 대한 독립선언문 선포, 정의단 군정회 참여 군사훈련... (1889-1930)이란 이름의 장군이 나타났던 것이다. 김 장군의... 무관학교를 세우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하다고...